|
|
신약성경에 나오는 황제, 총독, 헤롯은 대체 누구인가?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성경 자체의 이야기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 역사와 함께 진행된 세상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예컨대, 출애굽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이집트 제국을 이해하면 도움이 되고, 다니엘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벨로니아 제국에 대해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 복음서의 경우 로마 역사를 알아야 하고, 로마 시대의 통치자 이름을 알면 이해가 쉽다. 마태의 직업 ‘세리’는 로마 식민지와 관련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이라는 방식으로 돌아가신 것,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 코스도 로마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쉽지 않다. 어려운 인명과 지명이 많고, 특히 황제, 총독, 분봉왕 등의 표현을 볼 때, 과연 누가 높은 사람인지, 어디를 다스리는 사람인지 헷갈린다.
누가복음 3:1-2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누가복음 2:1-2
(1)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사도행전 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사도행전 18: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1) 로마의 황제 – 가이사, 아구스도, 디베료, 글라우디오
누가복음 2:1-2; 3:1; 사도행전 11:28; 18:2 등의 성경구절에는 로마 시대의 황제 이름이 나온다. 가이사 아구스도, 디베료 황제, 글라우디오 등이다. 이들은 왜 성경에 나오는가?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가 되게 된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역대하 36:20에 보면 “칼에서 살아 남은 자를 그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의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르니라”라고 해서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나면 페르시아(바사국)가 통치할 때가 올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다니엘서 1:21에 보면 다니엘은 페르시아 왕인 고레스 왕 원년까지 바벨론에 있는다. 에스라서 1장에 보면 ‘바사 왕 고레스’가 나온다. 에스더서는 페르시아 왕인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가 다스리던 때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다. 이렇게 유대를 다스리던 제국이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바뀐다(BC 539-333년).
헬라 제국과 알렉산드로스
BC 356년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필리포스 2세와 왕비 올림피아스의 아들이 태어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는 아민타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후 마케도니아군의 군력을 확충하고 여기에 그리스군의 전술을 도입하여 전력과 전술에서 완벽한 최강의 군대를 만든 인물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열두 살 때 사나운 명마를 단숨에 길들일 정도로 용맹했고, 열여섯 살 때까지 그리스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교사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알렉산드로스는 뛰어난 무예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으로 탁월한 학문을 겸비했고,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읽으며 자랐다. 알렉산드로스는 BC 336년 약관 20세에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침략한다. 페르시아 제국은 지중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성립된 당시로서는 최대의 제국이었다. 전성기를 지나 쇠락하고 있다 해도 마케도니아 같은 작은 국가가 상대하기에는 여전히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조금씩 페르시아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이때 있었던 유명한 전투들이 바로 ‘마라톤 전투’, ‘살라미스 해전’, ‘플라타이아 전투’ 등이 있다. 그 결과 그리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포함한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알렉산더의 헬라 제국의 등장은 이미 다니엘을 통해 예고되었다. 다니엘 7장 6절, 8장 21절, 11장 2-3절에 나와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로 진격하여 다리우스 3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계자를 죽이고 페르시아 정복을 완성했다. 페르시아 정복이 끝났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야망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원전 323년, 동방원정을 다녀오던 도중 갑자기 열병에 걸려 신음하던 젊은 대왕은 자리에 누운 지 불과 열흘 만에 32세의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알렉산드로스는 너무 젊은 나이였기에 후계자를 두었을 리 없었다. 그가 그토록 공을 들여 세운 거대한 제국은 그의 사후 주인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으며 왕위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계속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거대한 헬라 제국은 그의 7명의 장수에 의해 나뉘어 다스려지다가, 권력 싸움에 의해 3명은 도태되고 4명의 장수가 분할 통치를 하게 된다. 4명 중에서도 1명은 소아시아 북쪽에 작은 왕국인 페르가몬을 세우고, 나머지 3명의 부하가 그리스 제국을 3개로 분할하여 다스렸다. 그것이 마케도냐의 안티고노스(Antigonus) 왕국,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국, 시리아의 셀류키드 왕국이다.
안티고노스 왕조 (카산더) : 마케도니아 지역
(프)톨레미 왕조 : 이집트 팔레스타인 지역
셀류커스(셀레우코스) 왕조 : 시리아 바벨론 지역
이들 세 왕조의 어느 누구도 제국의 유일한 군주로 우뚝 서서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 중에 2개의 왕조가 팔레스타인을 다스렸다. 먼저 프톨레미 왕국이 BC 323-198년까지 이 지역을 다스렸고, 전쟁으로 셀류커스 1세(Seleucus I)가 세운 왕국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톨레미 왕조에서 셀류커스 왕조
유대가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프)톨레미 왕조가 다스렸는데 톨레미 왕조는 유대교를 존중해 주었다. 톨레미와 셀류커스의 전쟁으로 유대는 전쟁터로 변해 유대교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BC 2세기에 셀류커스 왕국의 안티오쿠스 3세가 프톨레미 왕조로부터 유대 땅을 빼앗아 유대 땅을 합병하게 된다.
셀류커스 왕조와 하스몬의 저항, 마카비 혁명
셀류커스 왕조는 처음에 유대교를 배려하였으나 셀류커스 왕조가 로마와의 전쟁으로 패배한 후 모든 성전의 재산을 압류하여 유대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후 안티오쿠스 3세를 이어 셀류커스 4세가 왕이 되고, 그의 뒤를 이어 셀류커스 4세의 동생인 ‘안티오쿠스 4세’가 왕이 된다.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IV, BC 175-163)가 등극하면서부터 유대인들에게는 이전과 차원이 다른 험난한 세월이 시작된다. 유대인들은 헬레니즘 사상을 강하게 거부했음에도 안티오쿠스 4세는 로마에 대한 조공을 바치기 위해 유대교에 헬레니즘 사상을 강요하였고 이에 따른 유대교의 거부로 유대교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BC 168년 경에 성전이 심하게 더럽혀지게 되었다.
특히 그는 BC 168년에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를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것을 금지시켰고, 성전의 번제단에 제우스 신상을 세워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돼지를 제물로 바쳤다. 그렇게 되어 성전의 모습이 상실되게 된다. 또한 그는 할례를 실시한 아이들을 찾아내어 그 아이를 죽이고 죽은 아이의 시체를 그 어머니 목에 걸어놓게 하기도 했다. 또한 제사장 600명을 묶어 그 위로 마차가 지나가게 해 그들을 참혹하게 죽게 했다. 그는 스스로를 ‘에피파네스’(Epiphanes), 즉 ‘신현’(神顯)이라고 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에피마네스’, 즉 ‘미친놈’이라고 고쳐 부르며 저항했다. 이러한 핍박에 대한 저항으로 하스모니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 바리새인의 기원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인들을 헬라 문화로 개종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금지하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극심하게 핍박했을 때, 끝까지 정절을 지킨 사람들을 ‘하시딤’이라고 부른다. 하시딤(Hasidim)이란 용어의 어원은 헤세드라는 히브리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로 이 ‘하시딤’에서 ‘바리새파’가 나오게 되었다.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바리새인’(Φαρισαῖος)이란 ‘분리주의자’(separatist)라는 뜻이다.
마카비 혁명 시기
제사장인 ‘마타디아 하스몬’이 우상숭배를 요구한 유대인과 셀류커스 관리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하스몬의 셋째 아들 마카비(마카베오)가 셀류커스 군대와 게릴라 전을 시작하였고, 하스몬 가문은 BC 161년 로마와 동맹을 맺어 독립국가의 가문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셀류커스 왕조도 어쩔 수 없이 유대 독립을 인정하였고, 마카비는 유대의 대제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유대는 셀류커스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이는 페르시아와 헬라로부터의 440년 만의 독립이었다.
제사장 ‘마타디아 하스몬’으로부터 시작된 유대의 마카비 혁명은 그의 셋째 아들 유다 마카비(마카베오), 요나단, 시몬으로 이어지면서 BC 142년 경 마침내 시리아의 셀류커스(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독립한다.
그런데 대제사장이자 동시에 유대의 통치자인 시몬이 BC 135년에 쿠데타로 죽는다.
시몬이 죽자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 1세(John Hyrcanus I, 재위 BC 134-104년)가 아버지를 이어 유대의 대제사장 겸 통치자가 된다.
일반적으로 마타디아부터 시몬의 통치기까지를 마카비 혁명 시기라고 하고, 요한 히르카누스 1세 때부터를 하스모니아 왕조라고 부른다.
하스모니아 왕조와 요한 히르카누스 1세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 1세는 이두매(Idumea), 사마리아, 갈릴리 지방을 침략하여 그의 영역을 넓혔다. 그의 통치 기간에 고대 팔레스타인의 하스모니아 왕국은 세력을 얻고 큰 번영을 누렸다.
요한 히르카누스 1세는 통치 초기 시리아 해안도시들을 재정복하고, 계속해서 요단 동쪽으로 진격하여 옛 에돔 왕국인 이두매 지역을 징벌한다. 그는 이두매인들에게 학살당할지, 아니면 유대교로 개종할 지를 선택하게 했다. 이때 개종한 사람이 나중에 나오는 헤롯 대왕의 아버지 안티파터 2세(Antipater II)다.
요한 히르카누스 1세는 자기 아내가 왕위를 잇기 원했다. 그러나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죽자, 그의 큰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Aristobulus I, BC. 104-103)가 자기의 어머니를 감옥에 가두어 굶어 죽인다. 세 동생들도 감옥에 가둔다. 넷째 동생은 암살한다. 그리하여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요한 히르카누스 1세를 계승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아리스토불루스 1세(Aristobulus I, BC. 104-103)는 막내 동생을 암살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된다. 결국 병이 생기고 건강이 악화되어 1년간의 재위를 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Aristobulus I)가 죽자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 살로메(Alexanbbdra Salome)가 감옥에서 아리스토불루스 1세(Aristobulus I)의 세 동생을 풀어준다. 그중 가장 큰 동생인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년)와 알렉산드라 살로메(Alexanbbdra Salome)가 결혼한다.
뒤이어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년)가 하스모니아 왕조를 다스린다.
BC. 76년에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죽자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 살로메(Alexanbbdra Salome)가 통치한다. 살로메는 아리스토불루스 1세(Aristobulus I)의 아내였다가 그의 동생인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와 결혼한 여자였다.
살로메가 약 9년을 통치한 후 BC 67년에 죽는다. 살로메가 죽은 후, 그녀의 두 아들 히르카누스 2세(John Hyrcanus II)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왕권 쟁탈전을 벌였다.
먼저 BC 67년에 형인 히르카누스 2세(John Hyrcanus II)가 어머니 알렉산드라 살로메(Alexanbbdra Salome)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여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2세(Aristobulus II)가 무력으로 왕권을 빼앗아 BC 63년까지 다스렸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서로 로마의 힘을 이용하려 하였고, 그러다가 BC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Pompeius, BC 106-48년) 장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하스모니아 왕으로 아리스토불루스 2세(Aristobulus II)가 통치하던 때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구였으나 후에는 정적이 된 로마의 폼페이우스(Pompeius)가 시리아를 정복하는데 성공하고, 로마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히르카누스 2세(John Hyrcanus II)는 자신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2세(Aristobulus II)가 무력으로 왕권을 빼앗아 왕이 된 것에 불만을 품는다. 이에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덕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BC 63년 아무 희생 없이 손쉽게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반대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Aristobulus II)를 제거하고, 그의 형인 히르카누스 2세(John Hyrcanus II)를 왕으로 세웠다. 그 결과 유다는 로마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드리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유대는 BC 63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그에 앞서 BC 64년 폼페이우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시리아)를 정복했다. 이어서 BC 63년 유대(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의 속주인 시리아(수리아)에 편입되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의 시대는 바로 이러한 로마의 식민지 상황에 있었다.
(1) 가이사
먼저 마태복음 22:15-22에 나오는 ‘가이사’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본문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으로 유명하다(마 22:21).
이 본문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17)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고 말씀하신다(19). 이에 사람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온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물으신다(20). 이에 대해 사람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한다.
이 ‘가이사’는 누구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년 7월 2일-44년 3월 15일)다. 영어로는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라고 부른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줄리어스 시저’의 주인공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를 명실상부한 국가로 만든 인물이다. 그는 자기는 비록 ‘종신 독재관’이라는 직위로 마쳤지만, 실제적으로 황제의 길을 열었다. 아들이 없어서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황제가 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동전에 자기의 얼굴을 새겨 넣어 로마 제국 전체에 자신의 얼굴을 알렸다.
BC 59년 경 로마의 공화정이 끝나고, ‘제1차 삼두정치’(參頭政治, Triumvirate)가 시행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주인공이다.
당시 로마의 유력자였던 세 사람이 원로원의 눈을 피해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는 관계로 창설되었고 주창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0년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자신을 반대하는 원로원에 맞서 폼페이우스와 손잡는다.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의 집정관 당선을 도와주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퇴역병을 위한 토지배분을 추진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하고 크라수스도 협력관계에 끌어들였다.
기원전 59년 카이사르는 원로원파인 비불루스와 함께 무난히 집정관에 당선된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와 결혼하고,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피소의 딸 칼푸르니아와 결혼했다. 집정관이 된후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협약에 따라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지원으로 농지법을 개혁하고 원로원을 약화를 꾀했다.
이후 크라수스가 죽는데, 이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만 제거하면 자신이 모든 권력을 쥘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을 부추겨 갈리아에 머물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두고 혼자 로마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도록 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명령을 듣지 않기로 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적이 되어 칼을 겨눈다. 폼페이우스는 겁에 질려 도망갔다. 카이사르는 전투도 하지 않고 로마를 장악했다. BC 48년에는 폼페이우스가 암살당한다. 이로서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이 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년 7월 2일-44년 3월 15일)는 이전 로마와는 다른 새로운 로마 청사진을 그린다. 마침내 로마는 대제국으로 변모해 오랜 전통의 이집트나 고대 근동을 모두 발 아래 두고 마침내 지중해를 그들의 호수로 삼는 나라가 되었다.
(2) 아구스도
누가복음 2:1-2
“(1)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가이사’라고 번역된 말은 ‘카이사르’이며, 영어로는 ‘시저’라고 한다. 카이사르, 시저, 가이사는 모두 같은 말이다.
구레뇨라고 번역된 말은 시리아의 총독을 맡았던 ‘퀴리니우스’(Quirinius)를 말한다.
누가복음 2:1의 ‘가이사 아구스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이자 로마의 첫 번째 황제인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BC 29년 1월 15일 - AD 14년 8월 19일 통치)다.
BC. 4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공동 통치를 시작했다. 이것이 ‘제2차 삼두정치’의 시작이었다. 제1차 삼두정치는 원로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결성되었으나 제2차 삼두정치는 공인된 형태를 취했고 로마 공화정이 붕괴되고 제정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사건 중에 하나가 되었다. 5년을 단위로 갱신되어 기원전 33년을 마지막으로 파기되었다.
이들은 통치 영역을 나눴다. 안토니우스는 동방 지역, 옥타비아누스는 서방 지역, 레피두스는 아프리카 지역을 나눠 가졌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BC 31년 이들 사이에 내전이 터졌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면서 내전이 끝났다.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BC 29년 1월 15일 - AD 14년 8월 19일 통치)가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후 그는 자신을 신에 버금가는 존재인 ‘지존자’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부르도록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Caesar Augustus)로 알려졌다. 누가복음 2:1의 ‘가이사 아구스도’는 바로 그 말의 번역이다.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공화국도 끝이 나고 제국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로부터 제정(帝政) 로마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은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의 성취이기도 하지만, 누가복음 2:1에서 옥타비우스 카이사르가 명령을 내려 호적하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육체적 아버지 요셉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지만 원래는 다윗의 후손이기에 다윗의 동네라고 할 수 있는 베들레헴으로 향했다(눅 2:4-5).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에 의해 정착된 로마의 평화가 200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러한 평화(Pax Romana)는 모든 방면에서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켜 문학, 건축 그리고 조각 등에 위대한 업적을 낳았고, 법률연구가 대단히 발달했으며 경제가 번영했다. 모든 곳에서 로마군대는 로마제국의 그리고 법과 평화의 상징이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적어도 세 번의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3) 디베료 황제
누가복음 3:1-2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누가복음 3:1의 ‘디베료 황제’는 티베리우스(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AD 14년 9월 17일-37년 3월 16일 통치)황제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에 이은 두 번째 황제다.
(4) 글라우디오
사도행전 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사도행전 18: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사도행전 11:28; 18:2의 ‘글라우디오’는 로마의 네 번째 황제인 클라우디우스(글라우디오, 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AD 41년 1월 24일-54년 10월 13일 통치)다.
로마제국은 이후 여러 황제들을 거치면서 제국의 규모가 너무 방대해지자, 395년에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었다. 그후 서로마는 476년에 망하고, 동로마는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메트 2세의 침략으로 멸망한다.
로마의 황제
1. 아우구스투스 (Augustus, B. C. 27~A. D. 14)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무렵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황제 칭호를 처음 사용한 자). 스스로를 제일의 시민(princeps)라 부르고 지중해를 제패함. 천하에 호적 조사를 명함(눅 2:1).
2. 티베리우스 (Tiberius, AD 14~37)
예수님의 공생애 활약 당시의 황제. 카프리 섬에서 은둔하며 통치함. 성경의 ‘디베료’(눅 3: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막 12:17)와 관련. 아우구스투스의 사위이자 세번째 아내의 아들.
3. 칼리굴라 (Caligula, AD 37~41)
24세에 황제가 됨. 로마 전역에 황제 숭배를 강조하고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신상을 세우려다가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 티베리우스의 손자. 칼리굴라는 경비대장 마르코와 함께 티베리우스를 질식사 시킴.
4. 클라우디우스 (Claudius, AD 41~54)
유대인들에게 융화 정책을 실시하고 성전 의식을 허용함. 바울이 활약하던 당시의 황제로 그의 통치 기간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고(행 11:28), 로마의 유대인을 추방함(행 18:2).
5. 네로 (Nero, AD 54~68)
음란과 쾌락을 일삼으며 로마의 권위와 국운을 어지럽힌 인물. 주후 64년 발생한 로마의 대화재를 기독교인의 소행으로 몰아 대박해를 감행함. 베드로와 바울이 이 때 순교한 것으로 전해짐.
6. 갈바 (GALBA) (AD 68년 6월~69년 1월)
7. 오토 (OTHO) (AD 69년 1월~69년 4월)
8. 비텔리우스 (VITELLIVS) (AD 69년 4월~69년 12월)
네로가 죽은 후 1년간 로마는 내전과 무정부 상태에 빠져 차례로 황제들이 암살당함.
9. 베스파시안 (Vespassiam, AD 69~79)
유대 반란을 진압하던 책임자. 당시 적이었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당신이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인물
10. 티투스 (Titus, AD 79~81)
아버지 베스파시안의 명을 받고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파괴한 인물. 그러나 황제 등극 후 천재지변이 잇따르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요절함(베스비우스 화산 폭발과 폼페이 유적).
11. 도미티안 (Domitian, AD 81~96)
베스파시안의 둘째 아들. 형 디도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으나 자신을 ‘주님’, ‘하나님’으로 부르게 하고 공포정치를 시행해서 자신을 거역하는 무리를 핍박함. 기독교인을 크게 박해함. 사도 요한 밧모섬으로 유배.
12. 네르바 (Nerva, AD 96~97)
도미티안의 학정으로 혼란한 정국을 안정. 부당하게 추방된 자들이 사면·복권되었고 이 때 사도 요한도 풀려남. 그의 선정으로 이후 로마는 80년 동안 로마의 평화를 구가함
2) 헤롯 대왕, 헤롯 안티바스
마태복음 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성경에 보면 헤롯 왕이 나온다. 로마 시대에는 황제가 있었는데, 유대에 왕은 도대체 무엇인가? 헤롯 왕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다. 그렇다면 각각은 누구일까?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이 나라 저 나라의 핍박을 받으면서 살았다. 바벨론에게 70년, 페르시아에게 200년,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에게 30년, 프톨레미 왕조에 100년, 셀레우코스 왕조에 34년... 그러다가 소위 마카비 왕조의 혁명으로 하스모니아(하스몬) 왕조를 설립했으나 다시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톨레미 왕조에서 셀류커스 왕조
헬라 제국이 망한 뒤 유대가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프)톨레미 왕조가 다스렸는데 톨레미 왕조는 유대교를 존중해 주었다. 톨레미와 셀류커스의 전쟁으로 유대는 전쟁터로 변해 유대교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BC 2세기에 셀류커스 왕국의 안티오쿠스 3세가 프톨레미 왕조로부터 유대 땅을 빼앗아 유대 땅을 합병하게 된다.
셀류커스 왕조와 하스몬의 저항, 마카비 혁명
셀류커스 왕조는 처음에 유대교를 배려하였으나 셀류커스 왕조가 로마와의 전쟁으로 패배한 후 모든 성전의 재산을 압류하여 유대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후 안티오쿠스 3세를 이어 셀류커스 4세가 왕이 되고, 그의 뒤를 이어 셀류커스 4세의 동생인 ‘안티오쿠스 4세’가 왕이 된다.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IV, BC 175-163)가 등극하면서부터 유대인들에게는 이전과 차원이 다른 험난한 세월이 시작된다. 유대인들은 헬레니즘 사상을 강하게 거부했음에도 안티오쿠스 4세는 로마에 대한 조공을 바치기 위해 유대교에 헬레니즘 사상을 강요하였고 이에 따른 유대교의 거부로 유대교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BC 168년 경에 성전이 심하게 더럽혀지게 되었다.
특히 그는 BC 168년에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를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것을 금지시켰고, 성전의 번제단에 제우스 신상을 세워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돼지를 제물로 바쳤다. 그렇게 되어 성전의 모습이 상실되게 된다. 또한 그는 할례를 실시한 아이들을 찾아내어 그 아이를 죽이고 죽은 아이의 시체를 그 어머니 목에 걸어놓게 하기도 했다. 또한 제사장 600명을 묶어 그 위로 마차가 지나가게 해 그들을 참혹하게 죽게 했다. 그는 스스로를 ‘에피파네스’(Epiphanes), 즉 ‘신현’(神顯)이라고 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에피마네스’, 즉 ‘미친놈’이라고 고쳐 부르며 저항했다. 이러한 핍박에 대한 저항으로 하스모니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마카비 혁명 시기
제사장인 ‘마타디아 하스몬’이 우상숭배를 요구한 유대인과 셀류커스 관리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하스몬의 셋째 아들 마카비(마카베오)가 셀류커스 군대와 게릴라 전을 시작하였고, 하스몬 가문은 BC 161년 로마와 동맹을 맺어 독립국가의 가문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셀류커스 왕조도 어쩔 수 없이 유대 독립을 인정하였고, 마카비는 유대의 대제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유대는 셀류커스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이는 페르시아와 헬라로부터의 440년 만의 독립이었다.
제사장 ‘마타디아 하스몬’으로부터 시작된 유대의 마카비 혁명은 그의 셋째 아들 유다 마카비(마카베오), 요나단, 시몬으로 이어지면서 BC 142년 경 마침내 시리아의 셀류커스(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독립한다.
그런데 대제사장이자 동시에 유대의 통치자인 시몬이 BC 135년에 쿠데타로 죽는다.
시몬이 죽자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 1세(John Hyrcanus I, 재위 BC 134-104년)가 아버지를 이어 유대의 대제사장 겸 통치자가 된다.
일반적으로 마타디아부터 시몬의 통치기까지를 마카비 혁명 시기라고 하고, 요한 히르카누스 1세 때부터를 하스모니아 왕조라고 부른다.
하스모니아 왕조와 요한 히르카누스 1세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 1세는 이두매(Idumea), 사마리아, 갈릴리 지방을 침략하여 그의 영역을 넓혔다. 그의 통치 기간에 고대 팔레스타인의 하스모니아 왕국은 세력을 얻고 큰 번영을 누렸다.
요한 히르카누스 1세는 통치 초기 시리아 해안도시들을 재정복하고, 계속해서 요단 동쪽으로 진격하여 옛 에돔 왕국인 이두매 지역을 징벌한다. 그는 이두매인들에게 학살당할지, 아니면 유대교로 개종할 지를 선택하게 했다. 이때 개종한 사람이 나중에 나오는 헤롯 대왕의 아버지 안티파터 2세(Antipater II)다.
요한 히르카누스 1세는 자기 아내가 왕위를 잇기 원했다. 그러나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죽자, 그의 큰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Aristobulus I, BC. 104-103)가 자기의 어머니를 감옥에 가두어 굶어 죽인다. 세 동생들도 감옥에 가둔다. 넷째 동생은 암살한다. 그리하여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요한 히르카누스 1세를 계승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아리스토불루스 1세(Aristobulus I, BC. 104-103)는 막내 동생을 암살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된다. 결국 병이 생기고 건강이 악화되어 1년간의 재위를 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Aristobulus I)가 죽자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 살로메(Alexanbbdra Salome)가 감옥에서 아리스토불루스 1세(Aristobulus I)의 세 동생을 풀어준다. 그중 가장 큰 동생인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년)와 알렉산드라 살로메(Alexanbbdra Salome)가 결혼한다.
뒤이어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년)가 하스모니아 왕조를 다스린다.
BC. 76년에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죽자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 살로메(Alexanbbdra Salome)가 통치한다. 살로메는 아리스토불루스 1세(Aristobulus I)의 아내였다가 그의 동생인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와 결혼한 여자였다.
살로메가 약 9년을 통치한 후 BC 67년에 죽는다. 살로메가 죽은 후, 그녀의 두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 2세(John Hyrcanus II)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왕권 쟁탈전을 벌였다.
먼저 BC 67년에 형인 요한 히르카누스 2세(John Hyrcanus II)가 어머니 알렉산드라 살로메(Alexanbbdra Salome)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여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2세(Aristobulus II)가 무력으로 왕권을 빼앗아 BC 63년까지 다스렸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서로 로마의 힘을 이용하려 하였고, 그러다가 BC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Pompeius, BC 106-48년) 장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로마의 유대 지배
하스모니아 왕으로 아리스토불루스 2세(Aristobulus II)가 통치하던 때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구였으나 후에는 정적이 된 로마의 폼페이우스(Pompeius)가 시리아를 정복하는데 성공하고, 로마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요한 히르카누스 2세(John Hyrcanus II)는 자신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2세(Aristobulus II)가 무력으로 왕권을 빼앗아 왕이 된 것에 불만을 품는다. 이에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덕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BC 63년 아무 희생 없이 손쉽게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반대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Aristobulus II)를 제거하고, 그의 형인 요한 히르카누스 2세(John Hyrcanus II)를 왕으로 세웠다. 그 결과 유다는 로마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드리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유대는 BC 63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그에 앞서 BC 64년 폼페이우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시리아)를 정복했다. 이어서 BC 63년 유대(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의 속주인 시리아(수리아)에 편입되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의 시대는 바로 이러한 로마의 식민지 상황에 있었다.
약삭빠른 헤롯 안티파터 2세
BC 67년에 아리스토불루스 2세(Aristobulus II)가 무력으로 형인 히르카누스 2세를 축출하고 왕권을 빼앗아 왕위에 오르자 헤롯 안티파터 2세 (Herod Antipater Ⅱ)는 이를 두려워한다. 헤롯 안티파터 2세(Antipater II)는 요한 히르카누스 2세의 아버지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통치 초기 시리아 해안도시들을 재정복하고, 계속해서 요단 동쪽으로 진격하여 옛 에돔 왕국인 이두매 지역을 징벌할 때 학살당할지, 아니면 유대교로 개종할 지를 선택하게 했을 때 유대교로 개종한 인물이다. 헤롯 안티파터 2세(Antipater II)는 약삭빠른 인물이었다.
그래서 형인 히르카누스 2세(John Hyrcanus II)가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유대 침공을 부탁했을 때, 안티파터 2세(Antipater II)는 히르카누스 2세에게 기생하며 이두매의 총독으로 임명받았었다.
헤롯 안티파터 2세(Antipater II)는 평민파와 원로원 간의 싸움으로 로마의 공화정이 불안정한 틈을 타, 팔레스틴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닦아 나갔다. 그는 로마의 신임을 얻어 BC 55년에 폼페이우스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비공식적이지만 유다의 통치자가 된 것이다.
당시 로마는 ‘제1차 삼두정치’(參頭政治, Triumvirate)가 시행되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크라수스가 죽었기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만 제거하면 자신이 모든 권력을 쥘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을 부추겨 갈리아에 머물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두고 혼자 로마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도록 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명령을 듣지 않기로 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적이 되어 칼을 겨눈다. 폼페이우스는 겁에 질려 도망갔다. 카이사르는 전투도 하지 않고 로마를 장악했다. BC 48년 원로원파의 폼페이우스가 암살당한다. 이로서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이 된다.
헤롯 안티파터 2세는 즉각 평민파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교분을 맺는다. 그는 군대를 이집트에 파견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원하고, 많은 전공(戰功)을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안티파터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부터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고 각종 세금을 면제받았으며, 유다의 행정관으로 임명받았다.
이처럼 안티파터는 유다의 정치 상황에 따라 로마 제국에 붙어, 한때는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고 폼페이우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다스리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카이사르가 더 강해지자 카이사르와 손을 잡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공화정으로는 로마를 다스리기 어렵다 생각하고, 황제 체제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로원(senate)과 시민의 협의체인 공화정을 유지해온 세력들은 황제가 다스리는 제도를 받아들이기 싫었다. 원로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를 암살한다. 암살단에는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브루투스도 끼어있었다. BC 44년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갔는데, 갑자기 수십 명의 암살자들이 달려들어 카이사르를 칼로 찔렀다. 암살단 중에 브루투스를 발견한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 일당을 타도한다. 기원전 43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공동 통치를 시작했다. ‘제2차 삼두정치’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통치 영역을 나눴다. 안토니우스는 동방 지역, 옥타비아누스는 서방 지역, 레피두스는 아프리카 지역을 나눠 가졌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BC 31년 이들 사이에 내전이 터졌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 BC. 31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면서 내전이 끝났다. 그리스 서해안에 있는 아카르나니아 북쪽 갑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군대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로마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사망 후 BC 31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전쟁을 벌이고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한다. 이에 헤롯은 재빨리 승리자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한다. 그러자 옥타비아누스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땅과 재산을 헤롯에게 귀속시킨다. 그렇게 해서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이 파르티아(바대, Parthia)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왕국을 지켜주리라 믿었다. 또한 그는 팔레스타인에 비 유대적 요소를 주입하여 히브리인들의 민족주의를 희석시키고 희랍식으로 통치되는 종속국가 건설을 희망했다. 헤롯은 유대인의 민족주의 정신을 억압하며 로마와의 관계를 증진시키고자 하였다.
헤롯 안티파터 2세는 안토니우스의 총애를 받던 중에 BC 39년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를 받는다. 그는 이어 갈릴리를 장악하고 유대 예루살렘에 진격하여 BC 37년에 왕이 된다.
헤롯 안티파터 2세는 안토니우스를 설득하여 아리스토불루스 2세(Aristobulus II)의 아들이면서 하스모니아 왕조의 마지막 왕 안티고누스(Antigonus)를 살해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하스모니아(Hasmonean) 왕조가 종식되고 헤롯 왕가가 출범하였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하스모니아(하스몬) 왕조를 몰락시키고 BC 37년에 그들이 신임했던 ‘헤롯’(헤롯 안티파터 2세 Herod Antipater Ⅱ의 아들)을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했다. 이 헤롯을 다른 헤롯과 구분하기 위해서 ‘헤롯 대왕’이라고 부른다.
헤롯 대왕
헤롯 1세(Herod Ⅰ, BC 37년 ~ BC 4년)가 유대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헤롯 왕조(BC 37~70년)가 성립되었다. 헤롯 1세는 로마에 충성하며 유대의 왕으로 인정을 받았고, 로마는 그를 통해 이 지역을 통제하였다.
헤롯 1세는 아버지 못지않게 교묘하게 유대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이고, 로마 사람들에게 종을 바침으로 유다 사람들에게는 악명 높았으나, 로마 사람들에게는 충직했다.
로마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된 헤롯은 유대의 기존 정치세력들, 종교세력들과 대립각을 세워야 했다. 그러면서도 이두매 출신인 자신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취하는데, 먼저 첫번째 부인 도리스(Doris)와 이혼하고 유대의 하스모니아 왕가의 공주이면서 히르카누스 2세(John Hyrcanus II)의 손녀인 ‘마리암네 1세’(Miriamne Ⅰ)와 재혼을 한다.
헤롯 1세는 10명의 아내에게서 많은 자녀를 얻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의 첫번째 부인 도리스(Doris)와 이혼하고 하스모니아왕가 히르카누스 2세(John Hyrcanus II)의 손녀 마리암네(Mariamne)와 혼인하였습니다. 두번째 부인 마리암네는 세번째 부인 마리암네와 구별하기 위하여 마리암네 1세(Mariamne Ⅰ)로 부른다. 세번째 부인 마리암네는 대제사장 시몬의 딸로, 마리암네 2세(Mariamne Ⅱ)로 부른다.
‘헤롯’은 스스로 유대인 행세를 했으나 사실 그의 부계와 모계 모두 이두매(에돔) 혈통이었다.
무엇보다 토목건축사업에 열을 올린다. 이를 통해 로마와 유대 모두로부터 만족을 얻는다. 유대를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확장 증축하고, 로마제국을 위해서는 가이사랴 신도시를 개발했다.
헤롯은 거대한 왕궁, 원형 경기장, 목욕탕, 도로, 광장과 요새들을 지속적으로 지어 위대한 건축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이름난 건축물들을 많이 세웠는데, 사해 근처 동쪽 해변에 마카이루스(Makaerus) 요새가 대표적인데, 이곳은 세례 요한이 갇혀 있다가 처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지중해 연안에 스트라토의 망대(Strato’s Tower)라고 부르던 곳을 요새화하여 가이사랴(Caesarea)라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를 건설했다. ‘가이사랴’란 ‘카이사르의 도시’라는 뜻이다. 원래 이곳은 항구를 만들기 힘든 곳이었지만 헤롯의 지혜와 의지로 유명한 항구가 만들어졌다. 이후 이곳은 로마 총독이 거주했을 정도로 잘 지었다. 가이사랴 신도시 건설은 총 12년이 걸렸다.
헤롯은 가이사랴, 여리고, 예루살렘 등에 수도시설 공사도 했다. 헤롯은 사마리아에 예루살렘의 안토니아 성채와 같은 요새를 건설하여 ‘세바스테’(Sebaste)라고 불렀다. 세바스테는 아우구스투스의 도시 라는 뜻이다. 헤롯은 이런 식으로 로마에 아부했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카이사르의 초상만은 단 한 장도 예루살렘에 수입하지 못하게 했고, 카이사르의 형상이 박힌 동전의 주조도 예루살렘에서는 하지 못하게 했다.
이 모든 건축 중에 가장 위대한 업적은 무엇보다 ‘성전산을 확장한 것’이다. 헤롯은 자신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당시에 상당히 훼손되어 있던 ‘스룹바벨 성전’을 부수지 않고 새로운 성전을 지었다. 그게 바로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성전이다.
BC 22년 경에 ‘헤롯’에 의해 시작된 건축은 외형은 9년 만에 완성되지만, 세부공사는 AD 63년 경에 완성된다. 이 성전을 이전에 있었던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과 구분하기 위해서 ‘헤롯 성전’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에 있었던 성전은 ‘헤롯에 의해 건축된 성전’이었다. 요한복음 2장 20절에 보면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그 당시까지 헤롯에 의해 지어진 기간을 말한다. 당시에는 아직 완공이 안 되었기 때문에 46년이라고 말한 것이다. 실제 완공은 약 83년이 걸렸다.
헤롯은 성격이 대단히 포악하였다. 그는 자신의 왕권이 침해받을까 봐 극도로 불안해 하였다.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은 물론, 그러한 소문에 이름이 거명된 자들까지도 모조리 살해했다. 더욱이 그는 통치 말기에 자기의 부인 ‘마리암네 1세’(Miriamne Ⅰ)를 죽였고, 세 아들 안티파테르(Antipater)와 알렉산더(Alexander)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를 모반죄로 처형했다. 이로 인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눅 2:1)는 “헤롯의 아들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그의 돼지가 되겠다”라고 빈정거렸다.
그런데 헤롯의 통치 말기 어느 날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이 나신 곳을 물었다(마 2:1-2). 이에 헤롯은 광기(狂氣)가 발동하였다. 자신의 정치적 위협이 생겼다고 본 것이다. 자기가 겨우 왕으로 버티고 있는데, 유대인의 왕이 났다고 하니 걱정이 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위협을 미리 차단하려고 잔혹한 명령을 내린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2장 16절에 나오는 ‘영아 살해 명령’이다. 자신의 왕위를 넘볼까 봐 아내와 자식도 죽인 헤롯에게 있어서 이러한 명령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헤롯은 30년 간 통치 후 BC 4년 3월에 사망했다. 그의 사망 시기는 매우 정확하다. 요세푸스는 “헤롯은 로마 원로원에서 왕으로 임명 받은지(BC 40년) 37년 후에 죽었다. 헤롯이 죽던 해에 월식이 있었다”라고 기록한다.그리고 천문학자들이 조사해 본 결과 요세푸스가 말한 BC 4년 3월 12일에 실제로 월식이 있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은 열병, 가려움증, 궤양, 창자 부음, 피부 썩음 등의 여러 가지 중한 질병에 의해 사망하였다.요세푸스의 이러한 기록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탄생도 BC 4년으로 본다.
이 헤롯을 다른 헤롯과 구분하기 위해서 ‘헤롯 대왕’이라고 부른다.
마태복음 2: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여기에 나오는 ‘헤롯’은 ‘헤롯 대왕’을 말한다.
※로마의 유대 통치
로마의 유대 통치는 다른 나라에 대한 통치에 비해 다소 독특한 방식을 취했다. 유대에 분봉왕을 임명하고 동시에 총독을 보내서 정치와 군사를 맡기고, 종교는 유대의 대제사장에게 맡겨, 그 역할을 분담하게 한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고대 근동의 대부분은 다신교 국가였으나 유대는 독특하게 유일신을 믿었기에 그들의 특성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는 헬라 제국의 헬레니즘에 대해서도 끝까지 저항했던 민족이었다.
로마가 유대에 이두매 사람 헤롯을 왕으로 임명한 것은 껄끄러운 유대를 통치하는데 매우 좋은 방법이었다.
로마는 유대를 통치함에 있어서 종교만은 유대의 독특성을 존중해 주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다른 사람의 통치를 받았기에 그부분에 있어서는 익숙하지만, 종교를 건드릴 경우 저항했기 때문이다.
다른 헤롯들
헤롯은 10명의 아내로부터 11남 5녀의 자녀를 낳았다. 이로 인해 그는 약 10년 동안 많은 고통을 당했다. 그는 권력에 집착한 나머지, 자기의 부인 ‘마리암네 1세’(Miriamne Ⅰ)를 죽였고, 세 아들 안티파테르(Antipater)와 알렉산더(Alexander)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를 모반죄로 처형했다. 그리고 유언장을 여러 번 고쳐 쓴 후, 결국 남은 세 아들 아켈라오, 안티파스, 빌립에게 영토를 분할했다.
헤롯이 죽자 그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 3명이 왕권을 다투었다. 그들은 서로 로마의 인준을 얻으려고 로마로 달려가서 자신이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때 유대의 사절단도 로마로 가서 헤롯의 세 아들 중에서 그 누구도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간청하였다. 이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의 세 아들이 팔레스타인을 세 부분으로 분할하여 통치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들을 가리켜 ‘분봉왕’(分封王, tetrarch) 이라고 부른다(눅 3:1).
누가복음 3: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마태복음 2: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1) 헤롯 아켈라우스(Herod Archelaus, BC 4-AD 6)- BC 22년에 헤롯 대왕과 그의 4번째 부인 말타케(Malthace, 사마리아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BC 4년-AD 6년에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미아’를 다스렸다.
그는 아버지 헤롯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였다. 그래서 마태복음 2장 22절에 보면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라고 해서, 요셉이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가려고 하다가 아켈라오가 헤롯을 이어서 유대의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헤롯 아켈라우스(마 2:22에는 ‘아켈라오’)를 싫어하였다. 그들은 그의 잔인함과 독재에 항거하여 그와 자주 충돌하였고 때로는 극렬히 저항하였다. 그들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분봉왕을 파면시켜 달라고 탄원을 하였고, 그의 형제들인 헤롯 안티파스와 헤롯 필립도 로마 황제에게 가서 그를 면직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결과 주후 6년에 황제는 그를 파면하여 고울(Gaul) 지방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이후에는 총독을 보내 그 지역을 직접 다스렸다. 1대 총독으로는 코포니우스(Coponius, AD 6~9년)가 파송되었으며, 총독들 중에는 제5대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AD 26-36년)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2)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BC 4-AD 39)- BC 20년에 헤롯 대왕과 그의 4번째 부인 말타케(Malthace, 사마리아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헤롯 아켈라오스의 친동생이다. 그는 17세에 분봉왕이 되었다. 그리고 BC 4년-AD 39년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지역인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다. 그는 성격이 온순하였고 비교적 유능한 통치자로서 오랜 기간 재임하였다. 그는 아버지 헤롯 대왕을 따라 건축에 관심을 가져 갈릴리 해변의 디베랴를 건설하였다.
그는 로마로 여행하던 중에 이복동생인 헤롯 필립 1세의 집에 들렀다가 필립의 아내인 헤로디아(Herodias)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래 아내였던 나바테아(Nabataea) 왕국의 아레타스 왕(Aretas IV)의 딸을 버리고 헤로디아를 새로운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14장 1-12절; 마가복음 6장 14-29절; 누가복음 3장 19-20절에 기록된 내용과 연관된다.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이 결혼을 강하게 비난하였고 결국 이 일로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 살로메의 계략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후 헤롯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의 지나친 권력욕으로 인해 로마 황제 칼리굴라(Caligula)에 의해 쫓겨났고, 이후 그의 영토는 헤롯 아그립바 1세(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인물)에게 넘어갔다.
정리하면, 예수님은 헤롯 대왕이 죽기 직전에 태어났고, 그의 영아살해명령을 피해 이집트에 잠시 계시다가 다시 귀국할 때 유대 분봉왕이 된 헤롯 아켈라오스의 잔인함을 피하여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BC 4년-AD 39)가 다스리던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에서 자라셨다.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오래 전부터 그분을 만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헤롯 안티파스를 피하셨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눅 13:31). 예수님은 그를 ‘여우’라고 하셨다(눅 13:32).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님을 전혀 만나지 못하다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신 후에야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다(눅 23:6-12).
누가복음 13:31-32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누가복음 23:6-12
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3) 헤롯 필립 2세 (Herod Philip II, BC4-AD34)- 그는 이투리아(이두래)와 트라코니티스(드라고닛) 지역을 다스렸다(눅 3:1).
누가복음 3: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헤롯 필립 2세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했다. 그는 헤롯의 아들 중에서 가장 온순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지역에서 비교적 안정되게 활동하실 수 있었다. 빌립 2세는 로마 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파이네온 이라는 지역을 재건립한 후, 황제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렀다. 그는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이 세운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해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영토는 잠시 시리아에 넘어갔다가 주후 37년에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 넘어갔다.
(4) 헤롯 아그립바 1세 (Herod Agrippa I, AD 37-44년) - 헤롯 대왕의 2번째 부인인 마리암네 1세의 소생인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다. 헤로디아와는 친남매 간이고,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로마로 보내져서 로마 황실에서 자랐기 때문에 로마의 3대 황제가 된 칼리굴라(Caligula)와 친분이 있었는데, 그의 배려로 헤롯 안티파스와 헤롯 필립 2세가 다스리던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는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였다. 사도 야고보를 죽였고(행 12:1-2),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다(행 12:4-5). 그는 백성이 열렬히 환호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행 12:23).
사도행전 12:1-6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사도행전 12:20-23
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5) 헤롯 아그립바 2세 (Herod Agrippa II, AD 50-70년) -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다. 성경에는 이 왕만 ‘헤롯’이라는 표현 대신 ‘아그립바’로 불린다. 그가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이다. 그는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는데, 이는 그가 누나인 버니게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버니게와 함께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에게 인사하러 가이사랴에 왔다가 바울의 증언을 들었다(행 25-26장). 그는 바울이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라고 질문할 때에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 로마로 갔으며 거기서 오랫동안 살다가 주후 100년경에 사망했다.
사도행전 25:13-24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3) 로마 황제가 유대에 파견한 총독들
누가복음 3:1-2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헤롯 대왕이 죽은 이후 헤롯의 3명의 자녀들이 땅을 나눠 다스린다.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의 경우 헤롯 아켈라우스(마 2:22에는 ‘아켈라오’)가 다스린다. 그러나 헤롯 아켈라우스는 난폭했다. 결국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헤롯 아켈라우스를 싫어했다. 그들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분봉왕을 파면시켜 달라고 탄원을 하였고, 그의 형제들인 헤롯 안티파스와 헤롯 필립도 로마 황제에게 가서 그를 면직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결과 AD 6년에 황제는 그를 파면하여 고울(Gaul) 지방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이후에는 총독을 보내 그 지역을 직접 다스렸다. 1대 총독으로는 코포니우스(Coponius, AD 6~9년)가 파송되었다.
로마 제국이 총독(행정 장관)을 파견하여 유대를 직접 지배한 제1차 총독 시대는 AD 6년에서 AD 41년까지 35년간 지속되었다. 로마의 총독(행정 장관)은 행정 수도인 가이사랴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에 머무르며 유대(유대-사마리아-이두매) 지역을 통치했다.
로마는 식민지 백성에게 관용을 베푸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 점령지에 총독을 보내면서 예루살렘이 아닌 가이사랴에 머무르게 했고, 소수의 병력만을 배치했다. 사도행전의 고넬료도 가이사랴에 있는 군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10: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러나 식민지 반란이 일어날 경우 로마 전역에 깔린 그들의 도로를 통해 언제든지 대규모의 군인을 보낼 수 있었다.
로마 총독은 군인을 로마 시민 가운데서 징집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자체에서, 즉 사마리아 지역과 가이사랴 지역에서 징집했다. 유대인은 군사로 모집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안식일을 준수하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에는 약간의 수비대만을 두었으니, 1000명 정도의 병력이었다. 그 수비대는 예루살렘 성전 북서쪽 구속에 있는 안토니아 성채에 주둔해 있었다. 그곳은 예루살렘 성전 지역을 관망하기 쉽고 지휘 감독이 용이한 곳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집행한 것도 이들 수비대였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폭도들에게 잡혀 죽게되었을 때 천부장 루시아(Lysias)가 안토니아 성채로부터 이 수비대를 이끌고 즉각 출동했다.
헤롯 아켈라우스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추방된 뒤, 그가 통치하던 유대와 사마리아는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로마 총독은 법률과 치안, 그리고 세금 징수 문제만 관장했으며, 나머지는 유대 자치 행정 기구인 산헤드린에 맡겼다. 로마 총독은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총독은 세금 징수를 위해 많은 세리를 고용했으며, 납세를 위한 대규모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유대인들의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행 5:37).
성경에 나오는 총독은 다음과 같다.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재임 AD 26-36년) - 벨릭스(행 23-25장) - 베스도(행 24-26장)
폰티우스 필라투스(라틴어: Pontius Pilatus, 재임: 26년 ~ 36년) 또는 본티오 빌라도는 다섯번째 총독이다.
벨릭스(행 23-25장)는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파견한 총독으로서 11대 총독 안토니우스 펠릭스(Antonius Felix, AD 52년 ~ AD 60년)이다.
베스도(행 24-26장)는 5대 황제 네로가 파견한 총독으로서 12대 총독 포르기오 페스투스(Porcius Festus, AD 60~62년)이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행정 장관)으로 부임하던 때는 로마 제국의 2대 황제 디베료가 카프리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를 대신하여 근위병 세야누스가 전횡을 일삼던 시기였다.
AD 37년 로마 제국 3대 황제 가이우스(Gaius : 칼리굴라)는 갈릴리 북동부 지역(분봉왕 헤롯 빌립 2세의 영역)을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 넘겨주었다. AD 39년에는 갈릴리-베레아 지역(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의 영역)도 넘겨주었다. 그리고 AD 41년 로마 제국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립바 1세에게 유대-사마리아-이두매 지역(총독 통치 지역)에 대한 지배권도 넘겨주어 팔레스타인 전역의 왕으로 임명했다.
AD 41년 로마 제국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는 35년 만에 유대인 왕에게 통치를 다시 맡긴다. 헤롯 아그립바 1세(Herod Agrippa Ⅰ, AD 37년 ~ AD 44년)를 팔레스타인 전역의 왕으로 임명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어린시절 로마 황실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유대 왕이 된 지 3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뜨자, 로마는 유대에 다시 행정 장관(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된다. 이 시기를 제2차 총독 시대(AD 44년 ~ AD 66년)라고 부른다.
1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파견한 총독
1대 총독 - 코포니우스(Coponius, AD 6~9년)
2대 총독 - 마르쿠스 암비불루스(Marcus Ambibulus, AD 9~12년)
3대 총독 - 안니우스 루푸스(Annius Rufus, AD 12~15년)
아우구스투스는 총독의 임기를 3년으로 한정하였으나, 티베리우스는 총독의 임기를 10여 년에 걸쳐 장기간 복무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속주 통치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파견한 총독
4대 총독 -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Valerius Gratus, AD 15-26년)
5대 총독 - 폰티우스 필라테 (Pontius Pilate: 주후 26-36년)
6대 총독 - 마르켈리우스 (36~37년)
7대 총독 - 마룰루스 (37~41년) 아그립바 1세 (37~44년)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파견한 총독
8대 총독 - 쿠스피우스 파두스(Cuspius Fadus, AD 44~46년)
9대 총독 - 티베리우스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 AD 46~48년)
10대 총독 - 벤티디우스 쿠마누스(Ventidius Cumanus, AD 48~52년)
11대 총독 - 안토니우스 펠릭스(Antonius Felix, AD 52년 ~ AD 60년) = 벨릭스
5대 황제 네로
12대 총독 - 포르기오 페스투스(Porcius Festus, AD 60~62년) = 베스도
13대 총독 - 루세이우스 알비누스(Lucceius Albinus, AD 62~64년)
14대 총독 -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 AD 64~66년)
유대인의 반란 (66~73년)
11대 총독 - 안토니우스 펠릭스(Antonius Felix, AD 52년 ~ AD 60년) = 벨릭스
벨릭스(행 23-25장)는 AD 52년부터 AD 60년까지 가이사랴 마리티마를 중심으로 유대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했다. 가이사랴는 카이사르의 도시라는 의미로 BC 9년 헤롯 1세(헤롯 대왕)가 로마 제국 제1대 황제 아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한 도시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벨릭스를 돈과 색을 밝히는 탐욕스러움과 잔혹함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밝힌다. AD 60년 로마 제국 5대 황제 네로는 포르기오 페스투스를 유대 지역 12대 총독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포르기오 페스투스를 베스도(Festus)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 가이사랴의 유대인들은 벨릭스를 네로에게 고소하였고, 그는 로마로 압송되었다.
벨릭스는 로마 제국 황실 노예 출신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이자 헤롯 아그립바 2세의 누이 동생인 드루실라(Drusilla)와 결혼했다. 드루실라는 본래 에메사(Emesa)의 왕 아시수스와 결혼하였으나, 이혼 후에 벨릭스와 다시 결혼하였다. <사도행전> 24장 24절에서는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벨릭스는 사도 바울의 무죄함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울을 2년간 감옥에 감금했다. <사도행전> 24장 26절에서는 그가 돈(뇌물)을 얻을 심산으로 바울을 자주 불러 이야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2대 총독 - 포르기오 페스투스(Porcius Festus, AD 60~62년) = 베스도
베스도는 AD 60년부터 AD 62년까지 가이사랴 마리티마를 중심으로 유대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AD 60년 베스도는 부임하자마자 바울을 소환하여 재판을 진행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매복하여 그를 살해하고자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5장의 내용을 보면 이러한 내용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스도는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Ⅱ, AD 53년 ~ AD 100년) 앞에서 바울이 복음을 변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아그립바 2세는 그의 누이 동생이자 불륜 관계였던 베니게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무죄를 확신하며 로마 제국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26장과 27장의 내용을 보면 이러한 내용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