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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광기의 끝이 믿음의 시작>의 줄거리:
미친 듯한 기미를 뜻하는 '광기'(狂氣)라 하면, 백제의 의자왕이나 조선의 광해군, 로마의 네로나 독일의 히틀러 정도가 얼른 연상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미쳤음을 아는 미친 사람이 없다는 시쳇말처럼, 70억 인류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서 지금 활성화 되고 있는 광기를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근거된 바른 믿음이 없다면 모조리 광기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겁니다. 믿음은 광기가 끝나는 곳에서만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기의 끝이 믿음의 시작
(다니엘 4:1~37)
19.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한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하는지라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으로 말미암아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
20. 왕께서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21.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에 살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었나이다
22.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23.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24.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26.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27.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광기의 끝이 믿음의 시작>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광기의 끝이 믿음의 시작’
본문은 느부갓네살 왕이 두 번째로 꿈을 꾸고 이에 대해 다니엘이 해석과 권고를 해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왕은 다니엘의 권고를 듣지 않았고 꿈의 불행한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후에 불행으로부터 회복된 뒤 왕이 조서를 발표하여 자신이 정복한 온 나라와 민족들에게 유대 나라의 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전하게 되는데 그 내용이 마치 간증과도 같습니다.
제목에서 광기(狂氣)라고 했습니다. ‘광기’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백제의 의자왕, 조선의 광해군, 로마의 네로 황제, 독일의 히틀러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광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은 광기에서 배제되어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미치지 않은 사람의 영역에 속해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친 사람은 자신이 미친 줄을 모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비추어보면 이 말이 참 진리 같습니다.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치고 미치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미쳤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정신병원에 갇혀있는 사람만 미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신앙적 기준에서 본다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쳐서 살아가는 곳이 세상입니다.
인터넷에서 한 유머를 보았습니다. 미친 사람이 태종대와 낙성대를 대학이라고 우깁니다. 또 고인이 되신 배우 허장강 씨를 강 이름이라고 우깁니다. 몽고반점을 중국집 이름이라고 우기고, 안중근 의사를 내과의사라고 우기기도 합니다. 탑골공원은 파고다공원이 아니라고 우깁니다. LA가 로스엔젤레스보다 더 멀다고 우깁니다. 구제역이 양재역 다음이라고 우깁니다. 비자카드 받아놓고 미국 비자 받았다고 우깁니다.
오늘 본문에 입각해서 미친 사람을 정의해보자면 이렇게 우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우기는 것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질 뿐입니다. 결혼했다고 자신의 자아의식을 남편이나 아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미친 사람입니다. 또 자녀를 낳아 기른다고 해서 자신의 자아의식을 엄마나 아빠로 여기는 사람 또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미친 사람입니다. 회사 사람들이 과장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자신의 자아의식이 과장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자아의식이 그렇다고 우기는 사람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미친 사람입니다. 다들 광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상인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요? 정상인 사람은 마음에 영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인간은 바로 영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담는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영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으면 비정상의 상태가 됩니다. 이 상태가 비정상임을 자각할 수 있다면 “나는 제로”라고 말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감히 어떠한 자아의식조차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를 자각하지 못하기에 우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안 계신 상태라면 결혼했다고 해서 정상적인 남편이나 아내의 자아의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또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어도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부모의 자아의식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마음에 담고 계신 예수님의 자아의식이 잘 드러납니다. 또 8장 28절을 보면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라고도 말씀하셨고, 14장 11절에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일은 아버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뺀다면 인격적으로 제로가 되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사셨고, 그리스도로써 행하셔야 될 모든 일을 아버지께서 행하시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음으로써 미친 자가 되어 우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미쳤음의 핵심은 자아의식에서 비롯됩니다. 잘못된 자아의식을 가진 것이 곧 미친것입니다. 미친 사람이 “내가 천사다”라고 해서 정말로 천사인 것은 아닙니다. 또 그 옆에 다른 미친 사람이 “내가 너를 보낸 하나님이다”라고 해서 그가 하나님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서는 “내가 남편이다! 내가 아내다! 내가 부모다!”라는 식으로 광기의 자아의식이 발견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 본문은 느부갓네살 왕의 두 번째 꿈을 다니엘이 해석합니다.
이 꿈이 불행한 내용이었기에 그러한 일이 실제로 왕에게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던 다니엘은 왕에게 권고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혹시 공의를 베풀면 불행을 피해 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러한 다니엘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고 1년이 지난 뒤에 실제로 꿈이 실현되어 느부갓네살은 광인(狂人)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꿈의 내용이 20~23절에 나타나는데 요약해 보면 한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이 먹을 것이 될 만하고 그 아래에서 들짐승이 살고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한 천사가 내려와 이 나무를 베어 없애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쇠와 놋줄로 동이고 들풀 가운데 두고 그것이 하늘 이술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칠 년을 지내리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이 꿈을 해석하는데 핵심적 내용이 25절에 나타납니다.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일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일어나게 될 것을 염려하여 공의를 행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런데 왕은 다니엘의 이러한 권고를 금세 잊어버렸고 1년이 지나자 꿈에서 보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 시작이 29~30절에서 나타나는데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새 /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학자들은 이때를 바벨론이 애굽과의 3차 전쟁을 승리하고 정복전쟁이 대부분 마무리되던 BC.568년경이었으리라 추측합니다. 이때에 대규모 건축 사업이 실시되어서 웅장하고 화려한 거대한 왕궁과 도시를 건축하게 됩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로부터 동쪽으로 인도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는 676구역으로 나누어져서 통치가 이루어졌으며 왕은 고대 7대 불가사의로 손꼽히는 공중정원을 거닐며 자화자찬에 빠져있었습니다.
31절을 보면 왕이 바로 이러한 자아의식에 도취되어 있을 때에 하늘에서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라는 음성이 들려오며 1년 전에 꾸었던 꿈이 실현되며 광인이 되어버립니다. 16절에서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는 다니엘의 해몽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학자들은 느부갓네살 왕의 정신병을 ‘인사니아 조안 트로피카(insania zoan thropica)’라고 명명하였는데 스스로를 짐승처럼 여기게 되는 질환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질병의 발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복전쟁에서의 승리, 광대한 영토 확장, 무수한 재물의 획득, 대규모 건축사업의 화려한 성공을 통해 느부갓네살은 스스로를 위대하게 여기는 팽창된 자아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세상 사람들은 모두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를 전혀 대단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미친 자들 중에서도 극적으로 미친 자로 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의 팽창된 자아의식을 보시며 느끼셨던 감정을 모든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시고자 그를 짐승처럼 미치게 만드십니다.
여러분의 친척 중의 한 명이 미쳐서 사람을 보면 짐승처럼 짖고 물어 뜯으려하고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미쳐도 어떻게 이렇게 미칠 수 있느냐며 경악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의 느부갓네살의 모습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그에 비해 다니엘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앞선 말씀들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다니엘은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왕이 주는 값진 음식들을 거부하였습니다. 깨끗함을 유지하고자 한 이유는 거룩하고 깨끗하신 하나님과의 연합과 연결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다니엘에 대해서는 느부갓네살 왕조차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고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말 그대로 다니엘에게는 하나님이 들어와 계셨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신 자의 삶은 영사기의 삶이 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대상들을 향해 하나님의 뜻의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지정의와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다니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에 다니엘의 자아의식이 팽창 될 수는 없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삶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이루어지는 장소였기 때문에 어떤 업적이 이루어졌더라도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반대로 느부갓네살 왕은 아름다운 공중정원을 거닐면서 676구역이나 되는 광대하고도 강대한 바벨론 제국을 생각하며 자신을 위대한 자로 여기며 자아의식을 팽창시키고 있었습니다. 만약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처럼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팽창이 아닌 하나님으로 충만함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업적과 성취로 인해 자아의식을 팽창시키던 느부갓네살은 하나님 보시기에 미친 사람 중에서도 짐승의 수준까지 떨어진 최악의 광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의 자아의식의 팽창은 어느 날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이 마음 안으로 하나님만을 모셔 들이고자 할 때에, 느부갓네살 왕은 마음 안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세상 것을 들여놓았습니다. 정복전쟁과 영토와 재화로 마음을 채우는 광기의 여정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느부갓네살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의식의 팽창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결혼한 사람이 스스로를 남편이나 아내로 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을 담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렇게 사소한 일로부터 광기는 시작됩니다. 나는 배우자의 남편이고 아내이기 이전에 하나님과 하나 된 자여야만 합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이 들어오셔야만 하는 성전이라는 자아의식으로 충만해지면 배우자에 대해 하나님의 은밀하신 생각과 뜻이 나타나게 됩니다. 배우자를 스크린 삼아 하나님의 뜻이 영사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안 계신 상태에서는 나를 제로로 여기는 것이 정상입니다. 배우자를 보아도 나는 제로이고 남편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하나님의 은밀한 것이 가족들에 대한 생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계셔야만 올바른 자아의식을 가지고 가족도 대하고 회사도 다니며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 왕 때에 모압과 암몬과 마온의 연합군이 남 왕국 유다를 침공하였습니다. 모래알 같이 많은 적들이 연합군을 이루어서 예루살렘이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이 되었을 때에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역대하 20장 12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라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광기가 중단된 사람의 고백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깨달은 여호사밧은 이러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광기가 끝나야 하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러자 하나님으로 충만한 자아의식을 갖게 되었고 21절을 보면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한 적군들로 인해 번민하던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왕으로써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에 여호사밧 왕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래알 같이 많은 적들에 비해 유다의 군대는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음에 계시지 않음을 깨달았고 자신의 자아의식이 잘못되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자 적군이 전혀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찬송하고 감사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은밀함 속에서 결정되었던 승리가 나타나게 됩니다. 여호사밧 왕과 유다 군대가 한 일은 없었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오시고 나면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일이 되고 하나님의 업적과 성취가 됩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기에 나의 자아의식이 팽창될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염두에 두고 광기를 끝내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배우자를 볼 때에도 여호사밧 왕의 고백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떠한 수단도 없기에 오직 주만 바라본다고 고백한 것처럼, 배우자의 문제에 대처할 능력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주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미치지 않은 정상적인 사람의 자아의식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느부갓네살 왕과 같은 자아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배우자에 대해 나의 생각과 뜻을 강요합니다. 부모로써 자녀에게 뜻을 강요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짐승처럼 미친 삶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미치게 된 시작점은 눈으로 보고 귀에 들리는 것들에 대해서 스스로 대처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사람들은 부모로써 자녀에게 얼마든지 훈계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권리가 있다고 우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친 사람이 안중근 의사가 내과의사라고 우기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계시지 않는 나는 어떠한 대처할 능력도 없는 사람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주만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신 상태에서만 정상적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자녀를 볼 때에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마귀에게 속아서 세상과의 관계에서 자아의식을 확립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있습니다.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까 부모다, 내가 회사의 과장이고 사장이다, 선거에서 당선 되었으니까 국회의원이라는 생각을 체질적으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어떤 직위에 있든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먼저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광기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를 바라볼 때에 내가 남편이고 아내라고 우기기 전에 십자가에서 못 박힌 자라는 것을 기억하기시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힌 자는 배우자 앞에서 어떠한 대처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몸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달려죽은 것만 우리의 자아의식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을 잊는다면 느부갓네살의 자아의식이 극점에 팽창했을 때에 짐승처럼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극단적인 광기를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나의 자아의식이 남편이고 아내라고 여기든 학생이나 과장이나 사장으로 여기든 광기의 여정은 시작된 것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느부갓네살의 마지막이 나의 마지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광인의 과정을 끊기 위해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임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정상인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광기의 여정에서 빠져나오게 된다면 주님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까지 참여하여 하나님 아버지로 충만한 자아의식의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과 뜻이 표현될 것이고, 아무리 대단한 업적과 성취가 이루어져도 자아의식을 팽창시키는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는 온전히 평강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아이의 부모이기 이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는 부모로써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부모노릇은 내 속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께서 해나가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일 뿐입니다. 내 몸을 통해 하나님이 아버지로써 살아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짐승과 같은 광인으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자아의식은 다 광인의 우기는 소리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정상적인 자아의식은 오직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달려 죽은 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운 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아들이라는 자아의식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세상을 향해서는 끝까지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느끼고 접촉하는 모든 세상의 대상들을 향해 당신의 뜻을 쏘시면서 성취해나가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느부갓네살 왕이 회복된 이유는 바로 이러한 간증을 온 천하에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도 이제 광기의 삶을 끝내고 정상인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 세상 모든 대상들 앞에서 십자가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달려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삶을 간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불쌍히 여겨주셔서 십자가를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광기어린 여정에서 발을 빼게 하시고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기가 막히는 복지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