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방네 노을길
신대2리 - 경양포 등대 - 노양1리 - 계성초교 - 홍학사 비각 - 본정1리 - 신대3, 1, 2리
약 7km, 2시간
장서방네 노을 (정태춘)
당신의 고단한 삶에 바람조차 설운 날 먼 산에는 단풍지고 바닷물도 차더이다
서편 가득 타오르는 노을빛에 겨운 님의 가슴 내가 안고 육자배기나 할까요
비바람에 거친 세월도 님의 품에 묻고 여러 십년을 한결같이 늘 바라고 기다리오
기다리다 맺힌 한은 무엇으로 풀으요 저문 언덕에 해도 지면 밤 벌레나 될까요
어찌하리 어찌하리 버람받은 그 긴 세월 동구아래 저녁 마을엔
연기만 피어나는데 아 모두 떠나가 버리고 해지는 고향으로 돌아올 줄 모르네
솔밭길로 야산넘어 갯바람은 불고 님의 얼굴 노을빛에 취한듯이 붉은데
굽은 허리 곧추세우고 뒷짐지고 서면 바람에 부푼 황포돛대 오늘 다시 보오리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되돌리기 비나이다 가슴치고 통곡해도 속절없는 그 세월을
아 모두 떠나가 버리고 기다리는 님에게로 돌아올줄 모르네
당신의 고단한 삶에 노을빛이 들고 꼬부라진 동구길엔 풀벌레만 우는데
국제대교에서 본 평택호
장서방네 노을길과 비단길의 출발지
출발전 체조는 기본, 오늘따라 남대장님의 구령소리가 우렁차다
국제대교의 교각
공사중 붕괴사고로 우여곡절 끝의 준공된 국제대교
평택호가 다 얼어버렸네
노양리는 팽성읍에서도 가장 서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경양포가 있었고 조창이 설치됐던 곳이다,
노양 이라는 지명은 노산의 "노"와 경양의 "양"에서 한글자씩 빌려와 만들었다고 한다
계양은 경양의 별칭이다
원두막 치고는 뷰티나게 지어진것 같다
노양1리
계성초교
홍학사 비각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5호)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운뒤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을때
임진왜란때 도와준 명의 파병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광해군은 강홍립을 시켜 지원군을 파견
하지만 명을 도와 주는척 하다가 후금에 투항하게 한다
명나라에게는 의리를 지켰고 후금(청)에게는 반감을 사지 않는 정책으로 전란을 막을수 있었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때에는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가 계속되자 청나라를 공격
하자는 척화론이 나왔고, 청나라는 병자호란을 일으킨다
국력 격차가 많지 않았는데도 속전속결로 남하하는 청군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은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 삼전도에서 3배 9고두의 수모를 겪게 된다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되었고 엄청난 배상금과 함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
척화파 신하들과 20만명의 백성을 청에 인질로 보내게 된다
나중에 고국으로 돌아온 부녀자들을 환향녀라고 하며 많은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조선 인조때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중 한분인 홍익한(1586 - 1637)
선생이 모셔져 있는 홍학사 비각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를 공격 하자던 척화론을 주장하다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청나라로 끌려가 청의 신하가 되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회유를
끝내 거절하고 처형 당한다
선생의 시신은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혼을 불러 치르는 장례인 초혼장을 치뤘다
홍학사 비각을 포의각 이라고도 불리는데 의를 기리고 칭찬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정태춘 노래비
1954년 팽성읍 도두리에서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5학년때
미군부대에 다니던 큰 매형이 가지고 온 기타 때문에 음악과 인연을 맺는다
시인의 마을, 떠나가는 배, 아 대한민국, 나살던 고향, 날자 오리배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고, 예전의 뭇 가수들과는 달리 한국적인 멋이 듬뿍 들어간노래와 서정적인 가사가
일품인 노래를 통해서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었다
노래 가사 때문에 공윤과의 힘겨운 싸움, 당시 제도권 대중음악에서는 시도할 수 없었던 것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들의 정서와 맞아 떨어져 정태춘의 공연은 입소문을 타고 온
대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 소위 대추리 사태에 적극 참여 하였으며
기성 가요계에 신인 이었다가 노래하는 투사로의 방향전환은 정태춘이 유일하다
시적인 가사를 읊조리듯이 푸념 하듯이 소화하는 그의 가창력은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