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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거제도민의 생활상과 해세액(海稅額), 조세부담>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1) 17세기 전기 거제현민의 재정과 생활상
홍무적(홍면숙)이 1615년~1623년까지 고현동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임진왜란 직후의 거제의 풍토(風土)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해 서울로 보내왔다.
“거제(巨濟)는 영남(嶺南)의 대해(大海) 가운데에 있다. 섬 전체에 장독(瘴毒)의 기운이 가득 차 있는데 황량한 땅에 인적(人跡)도 드물다. 하늘을 뒤덮는 수풀과 늪지대가 광대하게 펼쳐진 가운데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울창하게 우거진 황묘(黃茆)와 백초(白草)뿐 몇 십 리를 걸어가도 사람 사는 곳을 볼 수가 없다. 그런가 하면 겨울에도 눈이 쌓이지 않고 여름에는 오랜 기간 장마비가 내리기 때문에 각종 독사(毒蛇)와 독충(毒蟲)이 우굴거리는데 대책을 세워 조금 완화시켜 보려 해도 할 수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토지가 척박해서 먹고 살기가 어려운 판에 올해는 또 흉년까지 겹쳤다. 그런데 내다 팔 재물도 없을 뿐더러 꾸어 줄 만한 곳도 없어서 죽을 끓여 먹어도 몇 사람 입을 대기가 어려운 형편이므로 늘 굶주린 기색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公)은 이런 것을 한 번도 근심하는 일이 없이 날마다 문을 닫고 글을 읽으면서 유유자적하고 있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이외에는 오직 서울 친구들에 대한 정을 못내 잊지 못하여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문사(文詞)를 얻어 보려 하고 있다.”
2) 1644년 7월 거제면으로 읍치 옮긴 이유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진 거제도는, 피난 간 거제민이 속속 들어오고 각 수군진영도 제자리를 찾아, 서서히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1660년대에 영남해안 지방은 흉년과 질병으로 인해 죽는 자가 속출했다. 경상감사 이상진이 거제현의 백성을 구제하고자 지형이나 이해(利害)가 어떠한지를 살펴, 넓은 평야와 왜적으로부터 좀 더 안전한 명진촌(거제면)으로 1664년 7월에 옮기게 됨은 대단한 변통(變通)에 속하는 일이었다. 남쪽 변방을 방어하는 주현영보(州縣營堡)를 옮겨 설치하는 일을 검토한 것은 이상진의 소견이었고 그 결정은 왕명이었다. 예전과 달리 이전한 읍에는 성을 쌓지 않았다. 읍성이 없는 대신에 넓은 지역에 각종 관청관련 건물과 문묘, 향교, 서원 등을 갖추게 되었다.
거제도는 해안 방위의 절대적인 필요성에 의해 숙종30년 1704년 2월19일~ 1705년 12월까지 거제현령을 역임한 변진영 부사를 승차시켜, 1711년 5월25일부터 거제 초대 부사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거제도호부로 승격된 일은 관찰사의 장계 이전, "거제현(巨濟縣)은 동래(東萊)와 한산(閑山) 사이에 있고 내양(內洋)으로 들어오는 길목이므로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방어사(防禦使)를 두어 8진(八鎭)을 통괄하게 해야 한다는 1707년 거제 유학 "신수오(辛受五)"의 상소에 의해, 조정에서 오랜 검토 후에 내린 결정이며, 당시 거제현의 규모로는 도호부 승격이 불가능 했으나 우리 거제민의 희망이 이루어진 역사적 결과였다. 임진왜란 후, 거제의 해안 방위의 중요성이 계속 대두 되었고, 거제현령과 각 진영의 만호가 각기 독립된 재정과 운영을 하고 있어, 거제도 전체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거제의 현령은 관직일 뿐, 섬 하나를 빙 둘러 배치된 8진(거제읍치죽림포, 지세포, 옥포, 영등포, 조라포, 장목포, 율포, 가배량(소비포))에 한가한 벼슬(만호, 권관 등)이 많아 권력이 나누어져 있었다. 거제부로 승격시켜 "거제부사가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본 읍과 여러 진영을 모두 통솔하여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고, 또한 통제영과 전라도 왜적의 진출을 막기 위한 최고의 요해처임을 깨달은 조정의 결정이었다.
3) 조선후기 거제부의 해세액(海稅額)
거제도는 농지보다 어선과 선세(船稅)에 있어 다른 군(郡과 비교된다. 당시 18세 말 거제도는 해읍(海邑)으로 분류되어 행상선 157척(선세 242냥), 어(염)상선 100척(200냥), 어선 3척(2냥), 어업보조선 119척(1008냥), 삼선(杉船, 792척 762냥), 광선(廣 船, 15척, 18냥), 노선(櫓船, 71척, 71냥), 통선(桶船, 69척, 76냥) 총 1,326척(2,379냥)을 보유하고 있었다. 같은 해읍인 울산, 동래, 양산, 김해보다 높은 수치였다. 고성은 거제와 조금 많은 1,397척(1,906)이나 통선 비율만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거제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고성보다 높았다.
1894년 거제군의 해세액(海稅額)을 살펴보면, 경남의 다른 지역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어세 3,582냥, 곽세 328냥, 염세(염부수) 46(13좌), 선세 1,027냥, 어상선세 200냥, 행상선세 243냥 총 5,426냥으로 해읍과 낙동강연안, 도서지역 등을 포함하여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거제는 전세(田稅)보다 해세가 3%나 높았다. 따라서 해세문제로 세금을 조정해 달라고 정부에 끊임없이 요청하였다. 1895년 1월 10일 거제의 한 백성이 2천냥이 넘는 세금(해세)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일부 지주들만 살찌운다고 호소하고 있다. 특히 갑오년 재해로 민중들이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896년 7월 극심한 흉년으로 인하여 거제의 백성들은 세금을 줄여주고 구휼미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또한 1897년부터 1900년까지 대홍수로 인하여 흉작이 들고 궁핍해자 거제군에서 조세감면과 구제방안을 요청하는 공문을 내각에 보냈다. 그러나 내각에서는 거제의 어·염·선세 2천80냥, 1894∼96년 결호전(結戶錢) 중 미납된 6만 2100냥 등을 납부하라고 압박하였다. 결국 1899년 5월 진상하는 물고기를 중간에서 착복하는 일까지 일어나 내각에서 진상조사를 실시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
18세기 거제부의 시기결(새로 경작하는 전답에 매기던 결세)을 기준으로 하여 볼 때, 논이 700결 미만(거제도 기준 420만평), 밭이 1천 2백여 결(720만평)인데 비하여 19세기에는 밭은 엇비슷하나 논은 7백 수십여 결로 적지만 증가하고 있다. 아마도 몽리답(蒙利沓,수리시설 경작)의 확대와도 연관이 될 성싶다. (거제인구 2~3만명, 전답은 관청에 등록된 자료 기준)
19세기 중엽의 영남 71읍 가운데 이른바 겨우 1천 결 내외의 토지를 보유한 잔읍(殘邑) 28읍 중 하나로 거제의 농업적 기반이 취약한 형편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삶의 터전을 바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거제민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세와 대동미의 분담에서 볼 수 있듯이 거제에 남긴 유치미(적치해 둔 쌀)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균세의 대종을 이룬 어염선세(어민에게 부과한 세금)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18∼19세 기간에 영남의 해세 분담읍은 대략 32∼35읍인데, 거제 1읍의 분담율은 15%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때는 최다액을 부담하기도 했다. 물론 균역청과 통영에 납부하는 것이 주종을 이뤘지만, 그 외에도 궁방(宮房)인 명례궁(明禮宮)이나 감영에 획부된 액수나, 이서와 군교의 탐학을 고려하면 거제부민의 고역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외에 군역과 진공(進貢) 상납, 조선역(造船役)을 비롯한 각종 잡역의 부담은 수치로 표현할 수 없지만, 읍민들의 궁핍을 더욱 초래하는 요인들이었다.
조선말기 거제부의 재정 현황을 살펴보면, 총 세입액은 환가가 가능한 곡물이 쌀 1,713석, 콩 136석, 벼 253석과 보리와 합곡이 398석으로 모두 2,500여 석에 이른다. 돈이 9,879냥으로 이 무렵의 상정가(詳定價) 석당 3냥으로 환산하면 3,300석에 가까우므로 줄잡아 6천여 석 내외가 총 세입액이 된다. 이것은 물론 수납시의 공식적인 부대비용인 선가태가잡비(船價태價雜費)의 쌀 401석과 돈 945냥을 합산하면 훨씬 불어나게 된다. 어업 생산고가 다액을 차지했던 거제도의 현실적 여건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보다시피 가격 산정이 어려운 다종다양한 상납물이 즐비하였고, 부세화한 환곡의 분담이 빠져있는 점과 관하 7진보에 따로 배당된 각종 부담과 잡역의 동원을 가늠하면, 엄청난 부담을 거제부민들에게 지우고 있었다. 중앙 재정 주무부서인 호조와 3청에 납부된 액수만 하더라도 엄청났다. 한편 병조와 중앙 4군영 및 2개 부서에 올린 각종 가포전(價布錢)은 다음에서 살필 군역 부담의 실제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1790년대 '지승지도 거제편'에는 원전답(元田畓)이 총 3007결(結) 82복(卜) 1속(束)이고, 쌀과 각종 잡곡을 합한 총 합작곡(合雜穀)이 17409석(石) 9말(두斗) 8도(刀) 5홉(합合) 9석(夕)으로 기록되어 있다.
거제의 실제 수용비(需用費)를 다룬 항목인에서는 관수미(官需米)와 사객지공미(使客支供米), 아녹위미태(衙祿位米太) 등은 19세기 말엽까지도 거의 고정된 액수였다. 이를 제외하고 가변성을 띤 세목 가운데 비중이 높은 것이 해세전의 십일조(十一條)와 각종 군보전(軍保田)이었다. 그 외에 둔세와 화전세가 일부 충당되었다. 19세기 말엽의 '거제부사례(巨濟府事例)'에 따르면 수용비는 쌀 196석 10두로 같은 액수인데, 해세십일조(海稅十一租)가 378냥 1전 6푼, 화전세가 쌀 80석 12두 2도 5홉으로 해세(海稅)가 가장 많았다.
한편 조선후기는 1744년(영조 20) 8월 황충의 재앙, 1770년(영조 35) 1월 익사나 불에 타서 죽는 사건, 거제봉산(封山)의 여러 번 화재, 정조 대의 기근 피해, 전국적인 현상인 지방수령의 부패와 농민들의 수난 등이 이어져 전통 신분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3) 조선후기 거제민의 생활상과 각종 조세부담
지금부터는 조선말기 거제민의 실제 생활상을 기술하고자 한다. 거제민은 신분상, 일부 노비를 제외하곤 주로 중인 내지 양민의 지위였다. 그러므로 현실에서는 군역과 잡역 부담이 지대했다. 또한 어촌 지역의 특성상 천재지변이나 어로 작업, 상업 활동 중에서도 예상치 못할 사태가 종종 벌어지곤 했다. 선인(船人)을 태운 채 큰 바람을 만나 모두 물에 빠져 죽는다거나 마을에 태풍이나 불이 나서 마을 전체가 타 버린 일도 있었다. 19세기로 들어오면서 재정이 넉넉한 집안에서부터 신분 상승이 일반적 현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 찾아보기 힘들던 충의나 공생, 유학(幼學)의 빈번한 등장과 부자간의 직역 회귀는 반상(班·常)의 중간 존재이거나 신분 상승이 천천히 시작되었음을 증명한다.
거제 8진영 주변 마을은 부방자(赴防者 수자리)가 집중되고 있다. 이것은 생업과 군역 수행을 긴밀히 연계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거제부(府)의 군액 분석에서 언급되었듯이 19세기 후반으로 내려오면서 중앙 군액의 허실화와 지방군의 증액이 두드러졌고, 각 읍과 영진 단위에서의 직정(直定)과 사모속(私募屬)의 투속이 일반화된 경향을 상정하면 인근 리동의 군역 부담 정도는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방군이나 부노군(府櫓軍)의 결원을 충원할 때 자연스레 정전(情錢)이나 번전(番錢)이 납부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 군역에 있어서도 총액제의 운영 아래 금납화가 일반화된 저간의 사정을 감안하면, 면리 단위의 군포전(軍布錢)의 증식을 통하여 그 부담의 완화를 꾀하고자 한 것은 자연스런 추세였다.
어업 기반이 양호했던 점은 이미 살폈던 대로 통영의 진상 어물이 주로 거제 일원의 해역(海域)에서 조달되었던 사실과 수많은 지토선과 어조(漁條)와 방렴(防簾), 염부(鹽盆)과 곽전(藿田)의 존재를 통하여 널리 알려진 바 있다. 한말 일제의 침략의도가 노골화되면서 이러한 양호한 여건은 日人들에게 가장 좋은 어업 진출 기지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장승포, 지세포, 구조라가 그들의 이주 어촌의 적지(適地)였다. 실제로 이 무렵의 거제군의 사정을 보면 10개 면의 총호수 8,152호, 총인구 41,713명(남/여; 22,232/19,481) 중, 일운면은 각기 1,064호와 5,536명(2,899/2,637)의 인구수를 지녀 가장 큰 면이었다. 그 가운데 직업별 분포를 보면 農業(일운/군; 901/7,531), 商業(48/332), 日稼일가(53/90), 漁業(39/131)의 순이었다. 아울러 1915년경 일본인 일운면 거주 호수는 57호, 인구는 184인으로 학교조합, 소학교, 헌병출장소 등이 있었다. 1914년 愛媛縣(에이메현, 일본 시코쿠) 이주 어업 근거지로 설정된 이래 반농반어적인 경영자가 현저하게 불어나서 400명에 이르고, 다양한 직업군이 형성됨으로써 거제 동남안(東南岸)의 양항(良港)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바는 일찍이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서부터 기록되고 있었듯이 대마도와 가깝고, 일본으로 출항하기 좋았던 지리적 이점이 그네들에 의해 십분 활용된 것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조선 시기에는 빈번한 왜의 표류민들로 인하여 거제민에게 심각한 폐해를 낳고 있었다. 옥포에 상주한 倭語譯官(왜어역관)은 1706년부터 활약을 하였고, 이들 표왜민(漂倭民)의 체류와 송환을 위한 부대경비는 고스란히 읍민에게 넘겨졌다. 왜공고(倭供庫)가 옥포와 지세포에 각기 한 곳이 있었고, 왜공미를 운반하여 나눠두고 표박(漂迫) 형편에 따라 지급했다.
실제로 전 거제부사 권환(權煥)의 원정(原情)에 따르면 읍의 대동미(大同米)를 순영으로부터 해마다 400석을 획급받아 표왜(漂倭)의 공급지수(供給之需)로 삼았고 묵은 쌀은 개색(改色)할 때 환무(還貿)하여 시가 차익을 도모하기도 하였고, 경상우도 암행어사 조기겸(趙基謙)의 별단에 의하면 거제와 웅천(熊川) 양읍의 표왜지공(漂倭支供)의 부족수가 천여 석에 이르러 수조(收租)하여 획급함이 2·3할 밖에 감당되지 않았다. 과외로 백성에게 거두게 되니 유망이 잇따르게 되었으므로 나중 도신(道臣)에게 加分耗(가분모) 1천 석을 해마다 양읍에 분배하여 왜량의 부족수를 보충하도록 조치하고 있었다. 이미 19세기 초두에 각종 공용(公用)과 왜공의 民막을 해결하기 위하여 ‘무열고(懋悅庫)'란 일종의 민고를 운영하게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이와 더불어 조선 후기 경상도 연안 주민의 일본 표착(漂着)의 경우에도 동남 연읍(흥해∼부산포)을 제외하고는 거제의 사례가 가장 많다. 주로 어업 중이거나 상매, 유통 중에 빚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19세기 후반의 거제 주민들은 상당수가 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정확한 배의 제원(諸元)은 알 길이 없지만, 어떤 경우는 1인 또는 한 가구가 2척을 보유하기도 하였고, 협선(俠船)이란 소형선도 있었다. 또한 마을 단위의 선안(船案)이 작성되고 배의 관리가 이루어졌던 사실은 생업의 주된 방편이 바다였던 거제주민에게는 결코 소흘히 다룰 수 없는 문제였다.
거제의 표고버섯은 예로부터 임금님의 진상품이자, 각종 고을에서 인기있는 상품이었다. 표고버섯의 조달 때문에 고역이 극에 달하자 백성이 흩어지고 마을이 황폐하여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표고본전 미납분을 탕감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말엽까지도 진상전복해삼표고색감가(進上全鰒海蔘표古色監價)가 책정되어 거둔 것을 보면 이 같은 현물납은 거제 해민들의 원성을 여전히 낳고 있었다. 거제 유자도 이와 유사한 사례였다. 거제민들이 아예 나무를 잘라 버려 유자산출이 격감하기도 했다.
한편, 표왜인의 지공(支供)과 더불어 거제민에게 가장 큰 폐해를 안긴 것이 바로 조막지역(造幕之役)이었다. 즉 도해선(渡海船), 훈국선(訓局船), 통영문(統營門)의 8전선과 해읍(該邑)의 1·2전선의 신조때 耳匠(이장=목수)과 사격(沙格,사공과 격군)을 중심으로 한 인력 동원과 가용목(加龍木) 등의 선재(船材)의 운반은 그 몫이 지대한 것이었다. 거제에는 아예 보역창(補役倉)이 설치되어 이를 전담하고 있었다. 이미 18세기 말엽의 3진(옥포, 가배량, 장목)의 훈국선과 도해선의 신조고가전(新造雇價錢)을 상당액 진졸(鎭卒)로부터 걷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과다한 읍민의 각종 조세부담을 줄이면서 생존의 활로로서 연계된 것이 당시에 일반화되고 있던 계방촌(契房村)의 존재였다.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 관행화되었던 계방(契房)은 일종의 제역촌(除役村)의 하나였고 민의 입장에서는 피역(避役)과 담세(擔稅)의 경감을 꾀했다면, 지방 관부(官府)에 서는 열악한 재정 보전(補塡)의 방안이자 주로 각 부서와 이서층이 이에 편승하여 취리(取利)를 도모하였다.
거제 어자원의 풍성함과 대일창구(對日窓口)로서의 지리적 이점 등은 일찍부터 거제민에게는 고폐(痼弊)를 낳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와 같은 사정은 일제초기 일인(日人)들의 이주 어촌이 재빨리 건설되고, 그들이 어업 전진 기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빈번한 표왜인(漂倭人)의 출몰과 체류에 따른 부대비용을 거제민이 고스란히 떠맡고 있었다. 더구나 통영과 옥포진 등에 수시로 드나드는 연락 선박의 제공도 이들이 번갈아 가며 맡았다. 이와 함께 진상 품목인 전복, 홍합, 표고 등의 물납을 위한 재원 조달을 위하여 동전(洞錢)의 증식을 꾀하였고, '무열고'나 '민고'의 운영은 그 대안의 일환이었다. 선재감을 안은 다수의 봉산(封山)과 양호한 선소(船所)의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으므로, 거제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조선역(造船役)은 또다른 과중한 부담을 낳고 있었다. 선재 운반의 효율성을 살리기 위해 18세기 초엽에 '보역창'이 설치되어 예운역가(曳運役價)가 지급되었지만, 19세기 후반에도 그 고역(苦役)은 여전하였다. 이 외에도 훈국선이나 도해선의 신조고가전을 상당액 진졸(鎭卒)로부터 거두어 왔고, 이장(耳匠 배만드는 목수)이나 야장(冶匠 대장장이)이 별도로 동원이 되었다. 이상과 같은 처지에서 거제민이 자구책으로 생존의 활로를 찾게 한 것이 당시 일반적 현황이었던 계방(契房)의 운영이었다. 형방(刑房)이나 이웃 마을과의 상호의존적인 관계 설정은 피역(避役)과 담세(擔稅)의 경감, 읍 재정의 보전(補塡)과 취리 도모를 위한 상호간의 탈출구였다. 선안(船案)의 작성과 관리, 선세의 확보를 위한 보감(浦監)의 임무가 지속됨으로써 어업활동 외에도 원거리의 선상 활동도 활발하였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요컨대 거제민의 생존 방식은 열악한 환경 속에 부대끼면서 끊임없이 대응책을 강구해 온 삶의 의지가 온전히 묻어 나온 결과인지라, 지혜로운 삶에 큰 찬사를 보낸다.
4) 거제여인의 베 짜는 소리
다음은 늦은 밤 거제도에서 옷 짜는 베틀소리를 들으면서 거제부민의 생활을 김진규 선생께서 적은 글이다.
"찰카닥 찰각" "찰각 찰카닥" 이웃집 베 짜는 소리 누워 듣는데, 옷 짜는 여인은 어느 성씨인지 알지 못하나 귀 기울어 상상하니 참으로 고된 일이로다. 거제 땅은 메말라 목면이 귀하여 거제주민의 의복이 얇아 포개 입는데 남편은 웃옷이 없고 아이는 바지가 없다. 며느리는 비록 몸이 차가워도 오히려 가벼이 여기나 지난겨울 길쌈한 실은 이미 쌓여있구나. 진종일 베틀 북 소리 재촉하는데, 밤이 깊어 사람소리 조용하니 더욱 급히 울리는구나. 관솔불로 벽을 비추며 당연히 등불로 삼는데, 손은 느려지고 발도 피곤하여 눈썹을 얼마나 찡그릴까? 10일 동안 아직 한 필도 만들지 못했는데 도리어 바뀐 절서에 놀라 돌아보니 누에치는 3월 달이라 어린 뽕잎 점점 짙어지고 꾀꼬리 울구나. 해마다 길쌈하는 여인, 늘 이러한데도 상자 속에 가득 찬 의복, 보지 못했다. 아~ 슬프다 백성의 생활이여, 각기 직분이 있어, 여인은 고치 켜서 옷을 짜고 남자는 김매고 밭을 갈구나. 원컨대, 이런 소리 사람 귀에 두루 퍼져서 거문고에는 물러나 버리고 우생(관악기 일종)엔 머무른다. 쓸쓸한 연기 끊어 질 듯 북풍이 몰아치니 어린 계집 옷이 없고 어미는 배고픔을 참는구나. 손을 내쫓는 가난한 처지에 나의 집엔 빈 네 벽 뿐인데, 상자 속엔 오직 새로 지은 시(詩)만 절로 쌓인다.“
당시 거제여인들은 고된 옷 짜는 베틀 작업에 밤까지 고달파, 베틀과 비슷하게 생긴, 현악기 거문고는 보기만 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나 생황악기의 일종인 우생에는 그 화음이 아름다워 좋아했다고 김진규 선생이 시구를 통해 비유하고 있다.
5) 조선후기의 거제
조선 중기를 거쳐 후기로 갈수록 안정을 되찾은 거제현은 네 번째의 읍을 이전하게 되었다. 1664년(헌종 5) 거제현은 고정리에서 서부면 명진촌(西部面 明珍村, 옛 명진현의 치소지. 이후 읍내면으로 명칭 변경)으로 이동하였다. 그 이유는 물과 토질이 매우 나빠 병으로 죽는 관리가 많았다고 한다. 예전과 달리 이전한 읍에는 성을 쌓지 않았다. 읍성이 없는 이유는 거제현의 현민들의 고된 부역을 없애고, 또 하나는 왜적의 침략도 없기 때문이다.
1711년(숙종 37) 3월 거제현은 읍을 이전후 47년만에 거제부(초대 부사 변진영)로 승격되었다. 거제부 시대는 1895년 고종의 지방제도 개정 이전까지 약 184년 동안 지속되었다.
임진전쟁 이후 1801년 이전 거제부는 읍내면의 동·서부 외에 하청·연초·일운·이운·사등·둔덕면의 6개면으로 분화되었다. 다음은 1750년∼1899년 거제부(군)의 행정구역 변천이다.
거제는 농지보다 어선과 선세(船稅)에 있어 다른 군과 비교되었다. 당시 18세 말 거제는 해읍(海邑)으로 분류되어 행상선 157척(선세 242냥), 어(염)상선 100척(200냥), 어선 3척(2냥), 어업보조선 119척(1008냥), 삼선(杉船, 792척 762냥), 광선(廣 船, 15척, 18냥), 노선(櫓船, 71척, 71냥), 통선(桶船, 69척, 76냥) 총 1,326척(2,379냥)을 보유하고 있었다. 같은 해읍인 울산, 동래, 양산, 김해보다 높은 수치였다. 고성은 거제와 조금 많은 1,397척(1,906)이나 통선 비율만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거제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고성보다 높다고 하겠다.
1894년 거제군의 해세액(海稅額)을 살펴보면, 경남의 다른 지역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어세 3,582냥, 곽세 328냥, 염세(염부수) 46(13좌), 선세 1,027냥, 어상선세 200냥, 행상선세 243냥 총 5,426냥으로 해읍과 낙동강연안, 도서지역 등을 포함하여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거제는 전세(田稅)보다 해세가 3%나 높았다. 따라서 해세문제로 세금을 조정해 달라고 정부에 끊임없이 요청하였다. 1895년 1월 10일 거제의 한 백성이 2천냥이 넘는 세금(해세)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일부 지주들만 살찌운다고 호소하고 있다. 특히 갑오년 재해로 민중들이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896년 7월 극심한 흉년으로 인하여 거제의 백성들은 세금을 줄여주고 구휼미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또한 1897년부터 1900년까지 대홍수로 인하여 흉작이 들고 궁핍해자 거제군에서 조세감면과 구제방안을 요청하는 공문을 내각에 보냈다. 그러나 내각에서는 거제의 어·염·선세 2천80냥, 1894∼96년 결호전(結戶錢) 중 미납된 6만 2100냥 등을 납부하라고 압박하였다. 결국 1899년 5월 진상하는 물고기를 중간에서 착복하는 일까지 일어나 내각에서 진상조사를 실시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세기 거제의 군액은 소수의 중앙 군액만 배정되고 있을 뿐 사실상 통영 수군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수군 편제상 거제는 거제부사가 중영(中營)의 中司把摠(중사파총)을 맡고, 그 예하의 전(前)·좌(左)·우(右)·후촌관(後哨官)을 옥포·지세포·조라포 만호와 거제 2선장이 담당하게 된다. 아울러 율포 권관(權管)과 가배량 만호, 장목포 別將(별장)과 영등 만호도 각기 일령(一領) 중 후령(後領), 이령(二領) 중 전령(前領)과 후령(後領) 그리고 좌선봉겸 척후병(左先鋒兼 斥候將)을 맡아서 경상우수영의 일익을 이끌게 된다.
거제부사와 거제의 2선장이 이끄는 각 선단(船團, 1전선·1병선·2사후선)의 승선원은 각 239명이며, 합하여 500명 내외의 군교와 수군으로 구성되고 있다. 또한 위의 표에서 보듯이 7진보의 군액은 각 진마다 1귀(전)선, 1병선, 2사후선의 1개 선단에 배정된 군액이 220명 내외로 7진의 수사교졸(水師校卒)만도 1,552명에 이른다. 여기에다 5곳의 봉수대 및 요망처(瞭望處)에 배치된 별봉수와 봉수군, 나아가서 군포를 부담하는 방군(防軍)과 무학(武學) 및 첨격 무학(添格武學), 모군의 각색 군교가 9,715명에 이르므로 관계군이 줄잡아 1만 1천여 명에 달했다.
한편 조선후기는 1744년(영조 20) 8월 황충의 재앙, 1770년(영조 35) 1월 익사나 불에 타서 죽는 사건, 거제봉산(封山)의 여러 번 화재, 정조 대의 기근 피해, 지방수령의 부패와 농민들의 수난 등으로 봉건사회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조선후기의 농민항쟁은 양반지배사회에 대한 반감과 토지 소유권 등으로 촉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