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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05
갈라디아서 3장 10절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모든 인간이 죄와 비참함 가운데 있다고 할 때 사람이 처음 창조될 때부터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만들어졌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난 뒤 창조한 모든 만물에 대하여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말은 거기에 죄나 악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관련해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요리문답의 내용처럼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지식도 주셔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셨고, 때문에 하나님만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하셨습니다. 비록 만물의 으뜸으로 창조되어 모든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지만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앎으로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만을 찬송하는 것임도 알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죄와 비참함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창조될 때부터가 아니라 선하게 창조된 사람이 타락한데서부터 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에덴이라는 동산에 두시면서 모든 것을 임의로 먹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었는데,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으로 넘어가면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과 자신의 의지의 자유를 방치하게 됨으로, 특히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마음으로 먹지 말라고 한 열매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순종한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전 인류의 타락이 있습니다.
어떻게 아담의 타락이 모든 인류의 타락인가? 아담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인류는 한 혈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행17:26). 그래서 아담은 모든 인류의 조상입니다. 이런 아담을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세우셨습니다. 즉 그의 순종은 모든 인류의 순종이 되도록 정하셨고, 반면 그의 불순종은 모든 인류의 불순종이 되도록 정하셨습니다. 문제는 그가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12절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죄를 범했고, 그래서 모든 인류는 죄인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런 대표성에 대하여 사람들은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자신이 동의한 적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것 자체도 불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난주 살핀 본문으로 하자면 토기장이를 진흙으로 여기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사29:16). 창조주 하나님은 총명이 없고 마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것처럼 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어떻게 창조주이신 하나님보다 더 총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감히 인간이 도달할 수 없을 만큼 깊고도 넓고도 길다고 하겠습니다.
더불어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임을 부정한다면 그리스도가 모든 택자의 대표임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대표성을 부정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당연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도 인정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역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표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에 앞서 아담이 우리의 대표로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의 모든 죄와 비참함이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부터 왔다고 할 때, 그래서 우리 모두가 죄 가운데 잉태되고 출생한다고 할 때 결국 모든 사람은 죄의 종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문은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8문.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선은 조금도 행할 능력이 없고 모든 악에게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지녔을 만큼 부패해 있습니까?
답. 예, 정말 그렇습니다(창8:21, 요3:6, 창6:5, 욥14:4, 15:14,16,35, 사53:6).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요3:3,5, 고전12:3, 고후3:5).
간단히 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그래서 선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 교회 역사는 끊임없이 부정하고 또 부정합니다. 대표적인 부류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원죄를 부정합니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지만 나쁜 영향을 받아서 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자유 의지로 타락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라는 말처럼 자신의 의지로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원죄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정합니다. 또한 자유 의지로 믿음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지난주 마지막에 언급했지만 로마서 3장 10절에서 12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런 정신 아래서 우리가 과연 선은 조금도 행할 능력이 없고 모든 악에게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지녔을 만큼 부패했다고 설명합니다.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이고, 전적으로 무능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는가? 일반적으로는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유의지에 대하여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달리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일단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diatribe sive collatio, 1524)에 대한 답변으로 루터가「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 1525)을 썼을 때 거기에는 인간의 의지의 참된 성격이 무엇인지 상호간에 신중히 논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루터는 타락의 개념에서 노예의지를 말하지 않고 타락과 상관없이 인간의 피조성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전제로 하면서 노예의지를 주장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자유라는 말은 하나님 외에는 돌릴 수 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주의의 선두 주자로 알려진 멜랑히톤 역시 루터보다 앞서 「신학의 보편 명제들」(Loci Communes Rerum Theologicarum seu Hypotyposes Theologicae, 1521)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의 자유는 없다”고 예정론에 근거하여 노예의지론적 입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칼빈도 자유의지라는 말 자체는 썩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 2권 2장 7항에 있는 부분을 조금 읽어드리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묻고자 한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이 바로 자기의 마음과 의지의 주인공이며 자기의 힘으로 선악간 어느 쪽으로든지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혹자는 일반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열심히 경고하기만 하면 이런 위험성은 제거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기꺼이 허위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사람의 성향이며, 긴 강화에서 진리를 깨닫기보다는 한 마디 말에서 오류를 얻는 편이 더 빠른 것이다. 우리는 자유 의지라는 이 말에서 너무도 확실하게 이런 경험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는 자유의지라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9장이 자유의지에 대한 부분인데, 1항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에 본성적 자유를 부여하셨습니다. 그것은 선악에 대해 강제적으로나 [인간] 본성의 어떤 절대적 필연성으로 말미암지 않도록 작정되었습니다.” 그러면서 2항에서는 무죄의 상태에서의 자유의지, 3항에서는 죄의 상태로 있을 때의 자유의지, 4항에서는 은혜의 상태로 있을 때의 자유의지, 마지막으로 5항에서는 영화의 상태에서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일단 무죄의 상태에서의 자유의지에 대한 고백은 2항에서 설명합니다. “무죄의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선이 되며 그가 매우 기뻐하실 일을 의지하고 행할 자유와 권세를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상태로부터 타락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 상태로부터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3항 죄의 상태로 있을 때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고백할 수밖에 없는데, 그 내용이 무엇이냐?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 인간은 구원을 수반하는 어떤 영적 선에 이르는(혹은 이르고자 하는)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잃었습니다. 따라서 본성적인 사람(혹은 자연인)은 모두 영적 선을 싫어하고, 죄 가운데 죽고, 그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회심시키거나 그와 관련해 자신을 예비시킬 수 없습니다.”
앞에서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는가에 대하여 질문하면서 루터의 노예의지, 그리고 그런 입장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지만,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타락 이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는 구원을 수반하는 어떤 영적 선에 이르는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구원과 관련된 선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부패했다, 전적으로 무능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적 부패와 무능력으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시면 여전히 하나님 탓을 하려는 인간의 성향에 대한 질문을 다시금 하게 되는데, 9문입니다.
9문.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의 율법에서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부당한 것이 아닙니까?
답.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엡4:24, 전7:29).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행할 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셨으나(창1:27, 2:16-17), 사람이 마귀의 꾀임에 빠져(창3:4-6,13, 요8:44, 고후11:3, 딤전2:13-14) 고의적으로 불순종함으로써(창3:6,13, 롬5:12, 딤전2:13-14) 그 스스로 이 은사들을 빼앗겼으며, 또한 그로 인하여 그 모든 후손도 이 은사들을 빼앗긴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창세기 2장과 3장의 내용을 살피면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지으셨지만 인간이 마귀의 꾀임에 빠져 고의적으로 불순종하였다는 것을 말씀드렸는데, 전도서 7장 29절은 이 모든 내용을 간단히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선과 악을 대입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악을 낸 것이라. 그런데도 죄성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 탓을 하려고 합니다. 중생하기 전 선한 일을 전혀 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부패한 상태에 있다면 부패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통하여 온전한 순종,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답변은 반복될 뿐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거나 명령하는 것 자체는 부당하다고 할 수 있지만,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거나 명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자신의 과오와 자유 의지로 자신이 부여받은 이 능력을 저버렸고, 또한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순종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 빠져버렸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런 순종을 요구할 권리를 상실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요구하신다고 해서 부당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어떤 내용까지 말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 있는 일로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우리에게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은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순종할 수 없음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한, 다시 말해 자신의 전적인 무능력과 자신의 전적인 부패성을 인정하고 탄식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있다는 것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이런 모습으로 나아오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작정 안에는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하여 선택과 유기라는 예정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지금 말한 내용은 택자에게만 해당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에게 여전히 율법의 요구를 하시는 것은 자기들의 연약함과 무능력을 시인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이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에는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인간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 때문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좀 더 나아가면 우리 스스로 행할 수 없는 율법을 우리 대신하여 행하시는 분이 있다고 할 때 그런 내용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유기자에게는 다른 목적으로 율법이 있는데, 택자에게는 긍휼과 자비를 위한 목적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유기자에게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실행되도록 할 목적으로 율법의 요구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혹은 정치적 목적도 있는데, 적어도 외적으로는 선한 모습과 질서가 보존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율법의 요구를 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한 것도 부당한 일이 아닙니다. 아담의 첫 범죄 이후 모든 인류가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하게 되었는데, 이런 상태에서 율법의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고 해서 그것을 부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선악과 명령이나 율법의 모든 명령을 통해 아무리 인간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래서 모든 만물의 으뜸이라고 말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는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명령조차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 위에 두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려고 하는 것이요, 피조물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정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벌하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부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부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면서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불순종에 대해서는, 죄에 대해서는 벌하시고 심판하신다고 했기 때문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실행될 뿐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문을 보시면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0문. 하나님께서는 그런 불순종과 배도를 벌하지 않은 채로 그냥 두시겠습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에 대해 심히 진노하시며(창2:17, 롬5:12), 그리하여 그가 친히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선언하신 대로(신27:26, 갈3:10), 이 땅에서 그리고 영원토록 의로운 심판으로 그들을 벌하실 것입니다(시5:5, 50:21, 나1:2, 출20:5, 34:7, 롬1:18, 엡5:6, 히9:27).
하나님은 모든 죄에 대하여 반드시 의로운 심판을 행하십니다. 자범죄, 즉 모든 실제적인 범죄로 내가 내 의지에 따라 죄를 지을 때만 의로운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원죄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게 죄가 전가되었다 할 때 그 죄만으로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범죄를 지어본 적도 없는 사람, 예를 들어 어머니 배 속에 있는 아기조차 죄인이라고 하며,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문에서도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3장 10절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지만, 성경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 다시 말해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거나 율법의 행위로 구원의 가능성을 두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되기를(신27:26 참조)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주신 삶의 규범이요 규칙입니다.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것이 율법으로 있었습니다. 이때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에는 먹지 않으면 생명이 보장된다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고 한 그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순종한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불순종했기 때문에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장 죽음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 죽음을 경험했고 나아가 결국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죽음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 이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으시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숨게 됩니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이후 그들의 눈이 밝아지면서 죄에 대하여 인식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해 숨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그리고 여자와 남자에게 벌을 내리시는데, 우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3:16)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그러니까 땅에 사는 동안 수고와 고통과 어려움이 있을 것인데,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형벌의 삶을 살다가 결국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죽음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한다면, 모든 악인이 항상 수고와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보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악인이라면 더욱 분명하게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하는데,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금생에서 번영을 누리기도 하고 형벌과 상관없이 많은 일들을 행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하박국 선지자나 시편 73편의 기록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하는데, 외적으로 형벌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금생에서 아무런 형벌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것도 형벌의 일종이라고 말씀합니다(롬1:28).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있는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엡4:18), 어떤 유혹이 있을 때 거짓 것을 믿게 하는 것(살후2:11) 역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의 강퍅해짐, 그래서 회개하지 않음(롬2:5), 양심이 공포에 사로잡혀 두려워 떨게 되는 것(창4:13, 사33:14), 수치스러운 정욕에 끌려가도록 하는 것(롬1:26) 등 이런 모든 것들이 사실은 금생에서의 형벌로 있습니다. 이것이 내적인 것이라면 앞에서 말한 수고와 고통, 어려움 등은 금생에서의 형벌로 외적인 것들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적으로, 외적으로 형벌을 받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해서 끝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의로운 심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내생에서도 영원토록 의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영과 육이 영원한 지옥 불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 것(살후1:9, 막9:43,48, 눅16:24)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영과 육이 영원한 지옥 불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 것은 유기자에게만 해당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의 경우 이 땅에 살면서 일시적인 어려움, 환난 등을 당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과 그로 말미암아 짓게 되는 자범죄로 인하여 그런 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환난이 환난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한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으로 있게 하신다는 겁니다.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일시적인 환난을 받을 수 있지만 영원한 환난 가운데는 결코 있지 아니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문에서는 하나의 반론으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고 풍성하다는 것(시103:8, 145:8)을 가지고 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지나치게 공의와 정의를 요구하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1문.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 아니십니까?
답. 물론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지만(출34:6-7, 20:6), 그는 또한 공의로우신 분입니다(출20:5, 23:7, 34:7, 시5:5-6, 7:9-11, 히10:30-31).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위엄을 거슬러 범하는 죄를 극형으로, 즉 몸과 영혼을 영원히 벌하는 것으로 다스릴 것을 그의 공의가 요구하는 것입니다(나1:2-3, 마25:45-46, 살후1:8-9).
예정론에 있어서도 우리는 선택과 유기, 즉 이중예정을 말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해서 유기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하실 뿐만 아니라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결코 사랑하실 수 없으십니다. 오히려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바를 실행하지 않는 분이 아니십니다. 반드시 실행하십니다. 죄에 대한 결과로 죽음을 말씀하셨다면 반드시 죽음으로 갚으십니다.
여러분, 계속해서 살필 것이지만 우리의 구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고 말할 때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라고 말하기 때문에 공의가 없는 은혜가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 보자면 은혜입니다. 거저 받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쪽에서는 그런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시행하십니다. 우리 죄로 말미암아 본래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우리 대신하여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죽이셨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진 것입니다. 은혜라고 해서 공의 없는 은혜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은혜, 긍휼, 인자와 같은 속성이 있다고 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는 데 있어 좀 완화해서 시행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공의롭고 정의로우시기 때문에 공의에 합당하게 또 정의에 합당하게 시행하십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규범과 기준에 따라 모든 죄에 대하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문에서 표현한 것처럼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에 대하여 심히 진노하실 수밖에 없으시고, 이것은 지극히 높으신 위엄을 거슬러 범하는 죄이기에 극형으로, 즉 몸과 영혼을 영원히 벌하는 것으로 다스린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몸과 영혼을 영원히 벌한다고 할 때 죽음은 몸과 영혼의 분리이고, 이때 몸은 썩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영혼은 믿는 자의 경우 천국에 가지만 믿지 않는 자의 경우 지옥에 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자막이 아닙니다. 몸과 영혼이 천국에서 복을 누리거나 지옥에서 영원한 저주를 받을 때가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최후 심판에 앞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죽었던 모든 몸이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두가 부활한다고 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택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해서 부활하지만 유기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상관없이 그의 능력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 말씀처럼 택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고 유기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으로써 자비와 공의를 말한다고 할 때 공의 없는 자비를 말해서도 안 되고, 자비 없는 공의를 말해서도 안 됩니다. 택자를 향한 자비를 말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공의하심이 전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유기자를 향한 공의를 말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전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9장 22절을 보시면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란 말씀을 하십니다.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기에 공의로 판단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십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영원한 환난의 내용인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건져주시는 그런 관용까지는 베풀지 않으십니다. 반대로 택자를 향해서는 일시적인 환난을 주실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주실 수 있고 죄와 상관없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 주시는가? 영원한 환난으로써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의를 시행하시고 우리를 은혜와 자비로 대하시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첫 번째 내용인 우리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우선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3문).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명하면서 순종하라고 하시지만(4문), 우리는 본성적으로 율법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5문).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라(6문),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때문입니다(7문). 그 결과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를 함께 죄인이 되었고, 죄로 말미암아 선을 전혀 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악에게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지녔을 만큼 부패해졌습니다(8문).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가 된 것입니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요구에 대하여 완전히, 온전히 지켜야 한다고 할 때 하나님이 너무하시는 것 아닌가, 혹은 할 수도 없는 것을 하라고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당함이 있는 것 아닌가란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명령에 대하여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순종하여 그 모든 능력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부패했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있는 게 아닙니다(9문). 하나님은 이렇게 죄인 된 자들에 대하여 죄에 대한 벌을 내리십니다(10문). 자범죄만이 아니라 원죄에 대해서도 벌을 내리십니다.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벌을 내리시는데,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몸과 영혼을 영원히 벌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를 시행하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기다리고 있으며, 이런 내용을 배우는 우리는 구원 받은 가운데 있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것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