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화창한 4월이다.
늘...답사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는데....모처럼 창덕궁에 답사를 갔다.
답사에는 여러가지의 테마가 있는데, 이번의 테마는 음양사상과 건축학이다.
지식의 충만으로 기쁨 만배인 날이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의 특징은 정면5칸이라는데 있다.
궁을 지을때 대문의 칸수는 중국이 5칸 조선은 3칸으로 지어야 됐는데 지금 사진에서 보듯이 5칸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칸은 기둥과 기둥의 사이를 말한다.)
어렇게 지었을때 중국에서 보면 황제의 나라를 범한것이라 하여 침략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으나,
슬기롭게도 좌우 끝의 문은 여닫을 수 없게 만들어 문이 아니라 벽이라고 했다 한다.
또한 돈화문의 특징은 겹처마이고 우진각지붕이다.
여기서 겹처마란 석가래와 긴 서까래 위에 짧고 네모진 며느리서까래를 다시 잇대어 달아낸 처마를 말한다.
여기서 네모진 며느리서까래를 부연이라고도 한다.
*참고: 지붕의 종류(백과사전 참고함)
1. 맞배지붕:
일자형 홑집 평면에 알맞는 지붕으로 이러한 지붕의 집을 뱃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집의 앞뒤로 평면에 따라 길쭉하게 지붕 물매가 구성되어 가늘고 긴 지붕이 된다.
좌우 마구리는 ㅅ자형의 구성인 채로 두는데, 박공을 달아 장식한다. 박공의 합장부분 아래에 현어(懸魚 : 박공판이 용마루에서 마주치는 하부에 다는 장식 철물)를 장식하기도 한다. 후대에는 박공 아래로 빗물이 들이치지 못하도록 방풍판을 달기도 하였는데 이는 구조상 여러 가지 약점을 야기시킨다.
상대(上代)의 목재가 넉넉하던 시절에는 좌우 기둥으로부터 뺄목을 넉넉히 내어 지붕 구성이 아름다웠으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뺄목이 짧아지면서 움츠러든 맛을 풍기게 하였다. 맞배지붕은 초가나 너와로 구성되기도 하나 기와가 보편적이다. 기와지붕으로는 가장 간결한 구성이며, 고급집에서는 주로 주심포 계통의 집에 보편적으로 채택된다.
맞배지붕으로 가장 아름다운 구성은 창녕의 관룡사 약사전을 들 수 있다. 다포계 양식의 집에는 맞배지붕이 채택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나 조선 초기의 건물 중에는 맞배지붕인 것이 있다. 예천 용문사의 대장전이나 개심사 대웅전이 그러한 예를 보인다.
2. 우진각지붕:
일자형 평면의 지붕형태로 초가지붕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추녀가 네 귀에 구성된 처마에 의하여 구조되며, 지붕 좌우에 합각이 없는 형태이다.
이 지붕의 구성을 위해서는 앞뒤에 장·단연(長短椽) 설치와 함께 측면에서도 종도리까지의 높이로 서까래를 치받아 설치한다. 거기에 쓰이는 서까래는 통서까래와 구분되는 마족연(馬足椽)이나 선자연(扇子椽) 등이 있다. 마족연이란 말의 다리처럼 서까래의 긴몸을 지붕 각도에 따라 휘어 깎아 쓰는 데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팔작지붕이 중국 중원지방의 한식(漢式)이라고 한다면, 우진각지붕은 북방성의 요식(遼式)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청나라가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에 세워진 한양 도성의 남대문을 비롯하여 창덕궁 돈화문 등의 지붕이 우진각지붕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남대문의 원래 지붕이 팔작지붕이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는 획기적인 변모라고 할 수 있는데, 시류에 따른 변형으로 해석되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로 지붕형태가 어떤 형태로 구성되고 어떤 유형이 주류를 이루었던가의 학설은 분분하나, 고구려 지붕은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이 보편적이었고, 당나라와의 교류 이후로 팔작지붕이 크게 보급되었다고 추측된다.
3. 팔작지붕:
一자형 평면에 구성되는 지붕의 형태로서 가장 완비된 구조물이다. 팔작지붕은 초가지붕에서 그 편린을 찾을 수는 있으나 기와지붕의 구성에 가장 적절하다.
처마는 추녀가 설치된 형태이며, 좌우 마구리에는 큼직한 삼각상(三角狀)의 합각이 구성된다. 합각의 구성으로 지붕 용마루의 길이가 길어졌고 좌우 끝이 들려질 수 있는 반전곡면(返轉曲面)이 생겨서 그 선을 연장하면 허공에 원을 그리는 선조(線條)가 이루어질 듯이 보이게 된다. 그 끝에 치미나 취두를 설치하고 용마루 중앙등에 수두(獸頭)를 얹는다.
용마루 좌우로부터 흘러 내리는 합각마루로 인하여 귀면(鬼面)과 용두(龍頭)가 장치될 수 있게 되며, 합각마루로부터 다시 추녀등을 타고 추녀마루가 생긴다. 원통형 기와, 바라지 기와, 귀면와, 왕지 기와 등의 기와로 아름답게 장엄(壯嚴)된다.
추녀마루는 중간쯤에서 한 단 낮게 알마루로 구성되기도 한다. 이것은 처마 끝에 하중(荷重)을 덜 실리게 하기 위한 수단인데, 이 부분에 잡상(雜像)을 늘어 놓기도 한다. 기왓골 끝에 백자로 만든 연봉오리를 꽂아 방초(防草)막이 구실을 하도록 설치하기도 한다.
궁실의 법전(法殿)이나 절의 금당(金堂 : 大雄殿) 등 중요건물의 지붕은 대체로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지붕 중에서는 최고의 구조인 셈이다.
진선문 앞에있는 다리는 금천교이다.
이렇듯 궁에 들어가기전 다리가 있는데, 이는 백성의 구역과 신성시되는 왕의 구역을 나눔이며, 풍수지리적으로 뒤로는
우청룡, 좌백호의 산줄기가 궁을 둘러싸고 앞으로는 물이 있어 궁에 흐르는 기를 가두어 두는것이다.
왕비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왕비가 금천교에서 올리던 예를 망곡례라고 하는데 왕비가 궁에서 최대 나올 수 있는곳이
금천교까지이기 때문이다.
진선문에는 신문고가 있었다.
우리는 흔히 신문고 하면 억울한 사연이 있는 백성이 북을 울리면 임금이 들어주었다라고 알고 있으나
사진에서 보듯이 진선문은 금천교안에 있기 때문에 절대 백성이 이곳에 들어올 수가 없다.
그렇다면 누가 북을 울렸을까?
이것은 궁을 드나들 수 있는 관료들이 울렸고 그 용도는 내부단속용...즉 왕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실에
대하여 고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위의 사진 한 여성이 걸어가고 있는 저 길을 우리는 삼도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역사해설서의 대부분이 삼도라고 지칭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말하면 저 길은 삼도가 아니라 삼로라고 해야된다.
왜냐하면 로(路)는 중국에서 도(道)는 일본에서 쓰이는 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로로 표기해야되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정로(正路)라는 말은 있어도 道라는 표기는 없다.
이렇듯 삼로에서 삼도로 변경된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가 일제의 표현으로 바꾼것이라고 한다.
숙장문 행각에는 내병조, 전설사, 상서원 등이 있었고...내의원은 금천교 옆으로 있는 관청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등이 즉위식을 올린곳은 바로 인정문이다.
인정전은 왕이 되어 정치를 하던곳이였기 때문에 즉위식을 올리기전인 상태에서는 인정전으로 바로 갈 수 없다.
물로 예외는 있으나 원칙은 문에서 즉위식을 해야되는것이다.
이때 죽은왕이나 새로 왕이 될 사람을 부르는 호칭
죽은왕은 대행왕이라 불렀고 새로 왕이 될 사람은 사왕이라고 불렀다.
음양론에서 인정전의 양(+)에 해당하는 쪽은 동쪽이다.
위 사진에서 보면 인정전 왼쪽(인정전을 마주보고)은 건물이 없고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오른쪽은 건물이 있으며 건물이 뚫려 있다.
따라서 왼쪽은 음이고 오른쪽은 양이 되는것이다.
창덕궁에서 정치하는 건물이 아닌것은 대조전이다.
대조전은 왕의 침전으로 용마루가 없고 왕비의 침전은 대조전 뒤에 있는 집상전이다.
대조전은 왕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대조전이 왕의 침전임을 확인할수 있는것은 월대가 있다는것이다.
왕비의 침전에는 월대가 없다.
희정당 지붕의 합각면에 새겨진 글자는 강.녕이다.
희정당은 경복궁의 강녕전을 뜯어다 만든것이어서 합각면에 강.녕이라는 글자가 있다.
성정각은 세자가 공부를 하던곳으로 이곳에는 망춘문, 보춘정, 영현문이 있다.
궁에있는 현판에서 춘자가 있으면 이는 세자와 관계가 있는것이라고 보면 된다.
망춘문은 봄을 바라본다라는 뜻이고 보춘정은 봄을 알린다는 뜻이며 영현문은 공부방의 문이다.
장락문은 낙선재에 들어가기 위한 문이며 장락이라는 현판이 쓰이면 주로 오래살라는 뜻이 있으므로 주로 대비나 어른들이
거처하는곳에 쓰인다.
낙선재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년)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졌다.
이 곳은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등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더불어 줄리아멀룩도 이곳에서 살았다.
아름다운 화계(꽃계단)와 꽃담, 다채로운 창살들이 돋보인다.
낙선재
낙선재 누마루 밑의 빙렬문 문양과 같은 역할을 하는것은 드므이다.
왼쪽에는 위 사진과 같이 빙렬문 모양이 있고 오른쪽 담은 육각형 모양의 담이 있는데 이것 역시 음양론과 관계있는것이
왼쪽은 음이고 오른쪽은 양을 표현한것이다.
석복헌
두시간여에 걸쳐서 창덕궁을 답사하면서 새로운것을 많이 배운것에 지식의 배고픔이 조금 채워진 느낌이었다.
내려쬐인 태양과 맞서 싸우며...걸었던 두시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것 같다.
열공한 시험지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