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
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를 근절하기 위해 대마도를 정벌한 일이다.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였는데, 대마도는 그들의 근거지였다. 이에 고려, 조선 정부는 1389년(창왕 1년), 1396년(태조 5년)과 1419년(세종 1년) 등 세 차례에 걸쳐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특히 세 번째 정벌에서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대규모 전투가 이루어졌다. 정벌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통교하고자 하는 일본 측 세력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왜구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 제2차 대마도 정벌
두 번째 대마도 정벌은 1396년(태조 5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이루어졌다. 이에 태조는 12월 3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5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에 임명하고, 남재(南在)를 도병마사(都兵馬使), 신극공(辛克恭)을 병마사, 이무(李茂)를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은 후 5도의 병선을 모아 이키도〔壹岐島〕와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김사형이 이끈 군대는 이듬해 1월 30일에 서울로 귀환하였다.
이때 동원된 병선의 수와 군대의 규모, 정벌의 결과 등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김사형이 귀환할 때 태조가 친히 흥인문 밖까지 나가 노고를 치하했고, 서대(犀帶)를 하사했다는 기록을 보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 - 제3차 경로<나무위키>
박위의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조선 건국 후에도 왜구가 침략하여 조선 태조 2년(1393년)부터 태조 6년(1397년)까지 4년간 53회에 달했다. 특히 태조 5년(1396년) 8월 9일 왜선 120척이 경상도에 침입해 동래, 기장, 동평현을 함락하고 전선 16척을 탈취했으며 수군 만호를 살해했다. 이에 진노한 태조 이성계는 12월 3일 우정승 김사형을 5도 병마도통 처치사로 임명하고, 남재를 도병마사, 신극공을 병마사, 이무를 도체찰사로 삼아 5도의 병선을 모아 대마도와 일기도를 정벌하게 했다. 김사형 등이 길을 떠날 때 태조가 남대문 밖까지 나가서 전송했고, 김사형에게 부월과 교서를 주고 안장 갖춘 말, 모관, 갑옷, 궁시, 약상자를 내려줬으며, 남재, 이무, 신극공에게는 각각 모관, 갑옷, 궁시를 내려줬다.
김사형의 조선 수군이 어느 정도의 전력이며 언제 대마도로 떠났으며 구체적인 전과와 피해는 어느 정도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전혀 알 수 없다. 일각에서는 대마도 정벌 첩보를 접한 나가온 왜구의 투항과 조선 육지에서의 왜구 토벌 등의 성과로 인해 이미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고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던 한겨울이었으므로 대마도, 이키섬으로의 정벌이 실제로는 실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1419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 주원방포를 출발해 거제도로 귀환할 때까지 14일이 걸린 것을 감안해 볼 때 상대적으로 2개월간의 긴 원정 기간이 있었고 또 1397년 1월 30일 김사형이 두 달 만에 돌아오자, 태조는 홍인문 밖까지 거동하여 그를 맞이해 위로했고 의안백 이화, 좌정승 조준, 봉화백 정도전에게 명해 김사형에게 잔치를 베풀게 했으며 그에게 서대(犀帶)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전과를 거둔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이므로 대마도 정벌이 실행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조선왕조실록엔 원정을 단행한 지 18일이 지나 12월 21일에 왜인 구육(㡱六)이 3인을 인솔하고 와서 장검 하나와 환도 하나를 바치면서 "전하께서 항복하는 자를 어루만져 안정시켜 주시고 지난날의 악한 것을 생각지 않으신다기에, 토지를 청해서 백성이 되려고 하옵니다."라고 밝혔다는 기록이 있고, 이듬해 4월엔 왜구 나가온(羅可溫)이 병선 24척을 이끌고 조선에 항복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있었다. 나가온은 당초 1월에 조선에 항복할 뜻을 밝히고 아들 도시로(都時老)와 반당(伴黨) 곤시라(昆時羅)를 볼모로 삼아 계림 부윤 유양에게 보냈다. 그러나 유양이 병을 칭하며 나가서 보지 않자, 왜구들은 진의를 의심하다가 지울주사 이은을 납치해 도망갔다. 이때 경상도 도절제사 최운해, 충청도 도절제사 이귀철, 전라도 도절제사 김빈길, 경기우도 절제사 김영렬은 이들을 잡지 못했고, 5도 통제사 김사형은 이 네 장수들을 경산부에 잡아 가두고 이 사실을 태조에게 보고해 죄를 물으라 요청했다.
이에 태조 6년(1397년) 2월에 태조 이성계는 최운해, 이귀철, 김빈길, 김영렬을 순군부에 가두고 대간과 형조로 하여금 국문하게 했다가 김사형과 의성군 남은이 죄를 감해 주기를 청하자 최운해를 안변 진명포에, 김영렬을 옹진에, 김빈길을 청해에, 이귀철을 평양에 유배하고 모두 수군에 편입시켰다. 그러다가 4개월 후에 다시 최운해에게 곤장 100대를 치게 한 뒤 청해도 수군에 복무하게 했고, 김빈길을 장 90대 후 흑림 수군으로 옮겼으며, 이귀철을 장 90대에 안주 수군으로 옮겼고, 김영렬을 장 90대에 옹진 수군으로 옮기게 했다.
이런 불미스런 일이 있었지만, 태조는 다시 항복해온 나가온 등을 너그러히 용서하고 나가온을 선략 장군(宣略將軍)에 임명하고 부하 도시라(都時羅) 등 8인은 각각 영사정(領司正)·부사정(副司正)의 직책을 줬다. 또한 나가온의 아들 도시로가 사망하자, 태조는 사람을 보내 장례를 정중하게 치러주게 했고 나가온은 감격하여 울었다. 이후 나가온은 임온(林溫)으로 개명했고 그의 부하들 역시 조선 이름으로 개명해 조선의 관직을 역임했다.
근본적으로 왜구는 일본 측의 정세 불안과 경제적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 · 조선 측의 외교적 교섭만으로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결과 세 차례에 걸친 직접적인 무력 동원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1419년의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더 이상 대규모의 왜구는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대마도는 일본 측에서 조선과 통교하고자 하는 세력들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조선 초기의 조선과 일본 사이 통교 체제의 근본적인 구조를 이루며, 이후 양측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 가는 바탕이 되었다.
▲ 2차 대마도 정벌에 관련된 의령남씨 선조
- 남재(南在) : 충경공 5세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마도 정벌
나무위키-대마도 정벌, 이미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