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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엘 2장 15-20절
성회를 소집하고 긍휼을 구하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크고 심히 두려워 할 만 한 날로 여호와의 날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 원인이 저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을 말씀하심으로 결과로 나타나게 하고자 하는 바는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날을 말씀하시면서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되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 요구하십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다는 것이요, 늦은 것처럼 보이는 상황일지라도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십니다.
특히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요구하십니다. 외식적으로만, 겉으로만 회개하는 척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마음에서부터 참된 회개와 돌아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마음을 다하라는 것은 마음의 일부만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전체를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고 온전하신 분으로서 완전하고 온전한 것이 아니고서는 받을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점과 흠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함으로 받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그렇기 때문에 부족해도 된다, 점과 흠이 있어도 된다가 아니라, 완전함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너희 복을 위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예배의 회복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점에서 단순히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의 내용임을 말씀합니다. 구약 안에서는 지상적이요, 세상적인 것으로 말씀하시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통해 소망하게 하시는 바가 하늘에 속한 것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마침내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살피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회개 자체가 용서의 원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회개하면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원인이 회개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용서의 근거가 우리의 회개라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회개가 마치 공로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신칭의,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칭해진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수요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살피면서 말씀을 드렸지만 믿음은 의롭다 함을 얻는 데 있어 원인이 아닙니다. 믿음은 의롭다 함을 얻는 데 있어 공로가 아닙니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수단입니다. 믿음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 받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원인과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면 용서를 하시지만 우리가 용서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행위일 뿐입니다. 본래 죄 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무엇이 죄인지조차 모릅니다. 로마서 3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전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유효적으로 부르실 때 죄를 알게 하십니다. 또한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회개하게 하십니다. 즉 죄에 대한 회개는 우리의 깨닫는 바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생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끊임없이 죄를 향해 갑니다. 그런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때문에 회개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앞선 역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가 원인이 되고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회개가 원인이 되고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라면 마땅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친히 기도의 틀이라 할 수 있는 주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그 안에 회개할 것을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한번만 하도록 하기 위해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이런 내용으로 늘, 매일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회개가 용서의 원인이나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할 때 회개하여 돌이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회개하지 아니하면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망하게 될 것까지 말씀하기도 하시는데(눅13:3,5), 그만큼 참된 회개가 없으면 구원까지 보장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시되 구원의 과정 가운데 회개하는 삶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구약 선지자를 사용하여 저들의 죄를 들춰내시며 회개하도록 요청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그의 말씀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뒤 조금 더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모든 백성이 성회로 모여 금식하면서 긍휼을 구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내용은 이미 요엘 1장 14절을 통해서도 말씀하신 바가 있는데, 거기 보면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고 말씀합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15절에서 17절이고, 특별히 부르짖으라고 할 때 부르짖는 내용까지 1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리고 18절 이하 20절이 부르짖는 내용의 응답으로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15절을 보시면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가장 먼저 시온에 나팔을 불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어떤 절기들이 있을 때 나팔을 불어 백성들을 모았습니다. 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어났을 때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요엘 2장 1절에서 나팔을 불라, 그리고 그것이 경고의 소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떤 특별한 일, 다시 말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동일하게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시지만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백성들을 불러 모으기 위하여 나팔을 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이 이스라엘 절기 가운데 한 날이기 때문에 모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있다는 소식과 함께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에 모여서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는 것은 이 날이 어떤 특별한 날임을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우선 거룩한 금식을 정하라고 말씀합니다. 왜 거룩한 금식입니까? 목적이 거룩이요, 구별이기 때문입니다. 남유다의 경우 북이스라엘과는 달리 하나님이 명하시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가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종교 혼합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남유다 안에 혼합주의가 들어오게 되었고, 다음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제사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사야 1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바가 그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1-12)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유다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제사가 있었다면 금식 또한 없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따라 1년에 많은 절기들이 있었지만 금식일로 정하여 지키던 때는 단 하루 속죄일뿐이었습니다. 그 날만큼은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금식이 구별된 금식으로 있었는가? 거룩이 목적이 되어 행하는 것으로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비롯하여 많은 절기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날이 형식적으로만 드릴 뿐인데, 어떻게 속죄일 금식한다고 해서 마음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금식을 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금식이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음식을 먹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면 기도와 함께 금식하는 일이 많이 나타나는데, 고통 가운데서 회개하도록 할 때,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를 위해 금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슬픔의 표시로 금식하기도 합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면 금식은 그런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식과 기도가 병행이 될 때 이 두 가지 행위는 하나님께 간청하는 자로서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귀신 들린 아이를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예수님께서 고치신 사건이 있는데, 이때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란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말씀하시는데(20절), 이어지는 21절 말씀에 보면 “(없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주에 보면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씀이 다른 사본에는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쉽게 말해 믿음이 작기 때문에 쫓아 내지 못한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고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내용을 통해 기도가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도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도하는 자의 능력으로 이해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지, 기도하는 자의 능력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자의 능력이라면 굳이 기도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라면 금식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자 행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게 힘이 없다는 것을 외적으로 알리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 실제로 힘이 없어집니다. 힘이 없다는 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은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식하면서 기도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하는,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한다는 것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라는 것은 참된 회개와 함께 형식적인 금식이 아니라 구별되고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서 금식하는 날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해 금식함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죄와 관련해서는 금식함으로 자신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요, 그런 자신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구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금식의 예를 보면 종종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고 행하는 바들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재판장 앞에 나아가는 죄수와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불쌍히 여겨 주시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선지자는 성회를 소집하라고 말하는데, 16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백성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고 장로들을 모으며 어린이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신방에서 나오게 하고” 그러니까 성회를 소집하라는 것은 백성을 모으라는 것입니다. 이때 백성은 장로들로부터 시작해서 어린이와 젖 먹는 자 모두를 의미합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백성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백성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15절에서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라, 그리고 성회로 모이라고 할 때는 금식일과 모임이 거룩한 목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는 의미라면, 이 일을 위하여 백성들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은 율법에 따라 정결의식을 먼저 가지라는 것입니다(칼빈).
이런 모든 것, 다시 말해 성회로 모일 것을 말씀하는 것이나 또 성회로 모일 때 율법에 따라 정결의식을 행하라는 이 내용은 앞선 본문에서 회개하되 마음을 다하라는 말씀과 함께 외적인 형식까지도 요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앞서 이사야의 말씀을 읽어드렸지만 마음이 없는 예배는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주 외식에 대하여 비판하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에 대하여 비판하였는데,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15:7-9) 즉 외식은 종교적 형태는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참되게 경배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고 권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중요하다고 해서 마음만 있으면 되는가? 모든 외적인 형식은 폐해도 괜찮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다하도록 하는 데 있어 어떤 형식을 정하여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지향한다고 할 때 근원적인 면에 대한 강조, 내적인 것에 대한 강조가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개혁주의 신앙이 가까운 원인으로서의 인간의 어떤 열심이나 외적인 형식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것처럼 여긴다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형식과 관련해서 우리는 율법 안에 도덕법과 의식법, 재판법이 있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식법, 재판법은 폐지되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의식법에 대한 폐지는 구약의 많은 절기들, 그리고 제사장과 관련된 복장, 나아가 다윗의 규례라고 할 수 있는 모든 내용들을 거절하는 것으로 있는데, 만약 이것들을 행한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갈2:21 참조) 철저히 폐지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의식법과 재판법이 폐지되었다고 해서 도덕법이 폐지된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어떤 말씀도 있습니까? 안식일에 대한 말씀도 있습니다. 의식법으로서의 안식일, 즉 토요일 안식은 폐지되었지만, 신약에서 사도들은 안식 후 첫날 모임을 가졌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을 기점으로 의식법으로서의 안식일이 아니라 도덕법으로서의 안식일을 계속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덕법으로서 안식일을 명하셨다고 할 때 의식법이 아닌 주의 날로서 안식일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성회로 모이게 됩니다. 거룩한 모임을 가지되 마음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가지고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런 형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취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저희는 시편 100편의 말씀을 읽음으로 예배로 부르는데, 이런 부름에 응답한다는 의미에서 성도를 대표하여 목회자가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신데 반해 우리는 너무나도 비천하기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도록 은혜를 구하면서 기도합니다. 이어 성경봉독을 하는데, 설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들려지도록 하는 시간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전체 말씀, 다시 말해 구약과 신약을 읽게 됩니다. 모든 내용을 다 읽을 수 없기에 구약의 일부분, 그리고 신약의 일부분을 차례대로 읽게 되는데, 목회자가 읽지만 하나님의 입을 대신하여 읽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읽혀질 때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되 그의 말씀으로 찬송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보다 더 좋은 찬송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교 전 공중기도를 하게 되는데,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 하나님 나라와 세상 권세자들, 그리고 주의 몸 된 교회와 성도 등 전반적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중 한 부분을 정하여 설교를 하고, 설교에 근거하여 기도하고, 찬송하는 등 축도로 예배를 마치게 됩니다.
여러분, 주일이 있다는 것, 주일에 성도가 어떤 장소에 모이는 것, 그리고 시간을 정해서 모이는 것, 모여서 예배를 드리되 형식을 갖추어 예배드리는 모든 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 목사가 있는 것도, 그리고 어느 정고 규모가 되면 장로를 세우고 집사를 세우는 것도 다 외적인 형식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교회를 조직체로서의 교회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마음이 중요하지만, 마음이 중요하다고 해서 형식을 무시해도 좋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마음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형식을 따라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전통, 다시 말해 사람이 만들어서 전통으로 삼는 것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명하지 않은 것을 내 정성, 내 열심이라는 이름으로 더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성회로 모이라, 그리고 그 모임을 거룩하도록 하기 위해 정결의식을 행하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라면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되 형식만 남아 있어서는 안 되고 거기에 마음을 다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질서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 외에 것이 더해지는 것을 우리는 조심해야 하는데, 말씀을 통해 명한 것이 오늘 우리 시대에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은 결코 참되게 순종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 16절로 오시면 백성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장로들, 그리고 어린이, 심지어 젖 먹는 자를 모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덧붙여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신방에서 나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로들을 부르신 것은 마땅히 모범을 보여야 하는 자들이 모범이 아니라 죄악 가운데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장로라고 한다면 나이가 많다는 측면과 함께 그들이 각 가정을 다스리는 자들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죄악에 빠짐으로 지금 현재 남유다는 온갖 죄악 가운데 빠져 있는 것입니다. 가장 정신을 차려야 할 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빠져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죄의 무게가 무겁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장로들을 가장 먼저 언급하면서 너희가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참된 회개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어 어린이와 젖 먹는 자도 모으라고 말씀하는데, 이들도 회개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질적인 범죄에 있어서는 장로들에 비해 적을 수 있습니다. 젖을 먹는 자라고 할 때 죄를 짓는다면 얼마나 짓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죄에 대해서는 장로보다 못할 지라도 그들 안에도 부패한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패한 본성은 어린이, 젖 먹는 자라고 해서 덜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날로 말씀하시면서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히 이런 부패성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실질적인 죄악에 대한 것입니다. 때문에 어린이와 젖 먹는 자도 모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고 그들도 함께 거룩한 금식일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은 그들의 부모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자신의 자녀들이, 심지어 어린이에 불과하고 젖 먹는 자에 불과한데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금식하면서 애통해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범죄로 말미암아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결국에는 죽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비춰보자면 아이의 죽음이 결코 억울한 죽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도 역시 죄책과 부패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면에서는 부모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치신 형태로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병들었을 때 다윗은 금식하면서 아이를 살려주십사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지금 요엘서에서 어린이, 젖 먹는 자 모두를 모으라고 하시면서 회개하라, 금식하라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이런 면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덧붙여 신랑과 신부에 대하여도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신방에서 나오라고 하시는 것은 결혼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함이 마땅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나아와 금식하며 애통함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17절 앞부분을 보시면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지금 선지자는 금식일로 성회로 모든 백성이 모였을 때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 너희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낭실은 성전의 성소 앞 뜰을 말합니다. ‘주랑’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성전의 성소 앞 뜰과 제단 사이에 있다는 것은 지금 제사장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요 중재자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로 약속들, 예언들, 제사들, 할례와 유월절 양, 그리고 다른 모형들과 규례들로 나타나 보이셨다고 할 때 제사장들 역시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에 여기서 제사장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있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든 것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 선지자는 모든 백성을 불러 모으되 제사장으로 하여금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기도하라고 요청합니다. 백성의 입으로써 모든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때 백성의 입으로써 모든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울며 기도한다는 것은 백성들 역시 여기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단지 제사장의 기도가 아니라 내가 기도해야 할 내용으로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함께 참여하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예배로 모여 설교 전에 공중기도를 한다고 할 때 보통 목회기도라고 해서 목회자가 성도의 입이 되어 기도하는 부분입니다. 이 시간에 내가 직접 기도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목회자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또한 마음으로 모아야 합니다.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또 함께 찬송하는 것만 우리의 마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목회자의 입을 통해 낭독이 된다면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한 것이고, 또한 성도의 입으로서 목회자가 기도할 때는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두고 함께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울며 기도하라고 할 때 17절 나머지 부분이 기도 내용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 여기서 선지자는 제사장으로 하여금 세 가지를 기도하도록 요청합니다. 첫 번째는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방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지 말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기도 내용은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와 같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18:13) 그러니까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비춰볼 때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한 자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다른 신들에게로 향한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선지자는 제사장을 비롯하여 모든 백성에게 이 기도를 하라고 요청합니다.
두 번째 기도 내용은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기도가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으로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기도는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이방 나라가 쳐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남유다 땅이 황폐해져 있고 회개하지 않으면 더욱 황폐할 수밖에 없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유다 땅은 어떤 땅이냐?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그리고 출애굽 역사를 통하여 결국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여 그들에게 주신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런데 지금 이 땅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황폐해 졌다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이방 나라로 인하여 황폐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주의 약속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주의 선민임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비록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의 대상인 주의 택한 백성을 기억하여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도 내용은 이방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지 말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가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의 대상인 선민에 대한 것이라면, 그런 선민이 이방인으로 인하여 멸망당한다면 그들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도 구원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방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무런 능력도 없는 분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제는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데, 18절 이하 20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가 나라들 가운데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 내가 북쪽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앞의 부대는 동해로, 그 뒤의 부대는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 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리라”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조금 더 살펴보겠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지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여 돌이키도록 하기 위하여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로 모이되 모든 백성이 나아와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까지 알려주십니다. 주께서 명하시고 명하신 바를 친히 이루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앞선 내용과 함께 이해하자면 지금 너희에게 임한 재앙과 그것보다 더 심각한 재앙으로서 여호와의 날은 너희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회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가 회개하느냐? 회개하지 않습니다. 재앙 가운데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회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로 모여야 한다. 모이되 모든 백성이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심지어 기도해야 할 내용까지 다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기만 하면 내가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친히 다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신 바를 친히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에스겔 36장 37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37절 앞에 있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몇 부분만 읽어드리면 8절과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 이스라엘 산들아 너희는 가지를 내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열매를 맺으리니 그들이 올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이라 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 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26절과 27절은 익히 잘 아는 말씀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런데도 37절에서는 어떻게 말하느냐?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되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표현 자체가 틀렸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일하신다고 할 때 앞서도 말한 것처럼 기도가 마치 우리의 능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가지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신인협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가 있든, 기도가 없든 자신이 뜻하시는 바는 반드시 이루십니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협력이 있어야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루신다고 할 때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방편들 없이, 방편들 너머, 방편들을 거슬러서 자유롭게 일하시지만, 주로 방편들을 사용하여 일하신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해야 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의 열심, 기도하는 자의 노력, 기도하는 자의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어 하나님께서 무엇까지도 사용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것이고,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회개라는 방편을 사용하시고, 기도라는 방편을 사용하시되 회개할 마음도 없고 기도할 마음도 없는 우리 안에 그의 말씀으로, 그의 성령으로 역사하여 회개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심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명하시고 명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했기 때문에,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기도할 수 있도록 지도하시기 때문에 회개와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마지막 기도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일이기에 중도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에 한해서 반드시 회개하도록 이끄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바가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순종하고자 하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모든 것은 자신이 영광과 함께 마침내 복을 주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의 유익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께 우리는 항복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