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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문어발 삶 대신 일편단심>의 줄거리:
해바라기의 꽃말이 ‘일편단심’이랍니다. 봉오리를 피우기 위해 해바라기는 온종일 해를 따라 방향을 옮긴다고 해서 그렇게 붙여졌나 봅니다. 영적인 일편단심이란 하나님 해바라기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단지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할 뿐입니다. 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일편단심이 삶 전체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만만치 않습니다. 참 좋습니다.
문어발 삶 대신 일편단심
(누가복음 1:67~80)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문어발 삶 대신 일편단심>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문어발 삶 대신 일편단심’
휴무기간 동안에 만난 어느 집사님과의 대화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집사님께서 호소하시기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탄력이 붙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생활화에 열심인 분이셨기 때문에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화하게 되었고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직장에 다니시면서 요리를 좋아하시고 골프를 좋아하시고 성화(聖畫)를 모사하시는 것도 좋아하십니다. 요리를 많이 만들어서 나누시니 주변 사람들이 포동포동 살이 찔 지경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재미있어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탄력을 받을 수 없는 원인이었습니다. 이 집사님에게 “나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관심이 문어발식으로 뻗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대화를 어떤 목사님과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능력이 너무너무 많으십니다. 이 목사님에게도 절대로 문어발식으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없고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연결과 교통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일편단심으로 하나님께 몰입하고 나면 내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골프를 치게 하시든 요리를 하게 하시든 모사를 하게 하시든 하나님의 기운으로 발이 뻗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관심대로 문어발식으로 뻗어나가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고 보람차고 결실이 있는 인생을 소원합니다. 이러한 인생을 원한다면 일편단심의 인생전략을 채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로미오와 줄리엣 전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죽을 때까지 서로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로미오에게는 줄리엣이었고 줄리엣에게는 로미오뿐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한 일편단심의 전략을 쓸 수 없다면 인생은 문어발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자면 관심거리가 생길 때마다 마음이 문어발식으로 뻗어나가서 붙잡게 되는 상태는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 78~79절을 보면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이 무척 중요합니다.
본문은 입이 열린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세례 요한에 대해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77절을 보면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내용이 78~79절에서 언급됩니다. 요약하자면 구원이란 돋는 해가 비쳐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사람들에게 비추고 평강의 발걸음을 걷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원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합니다. 먼저 77절을 보면 죄 사함이 언급됩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서 지적되는 죄의 내용이란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일편단심이 아닌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소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이 로미오 외의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피조물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이외의 대상에게 관심을 두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관심거리가 있습니다. 자녀에게는 부모가 관심의 대상이며, 부모에게는 자녀가 관심의 대상이고 각종 취미가 관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하나님께 일편단심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관심한다는 것은 줄리엣이 로미오를 놔두고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설령 내 속으로 낳은 자녀라고 해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셰익스피어는 소설 속에서 줄리엣과 로미오가 죽음까지 불사하는 사랑의 주인공을 구상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대상에게 관심을 둘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인간을 향해 구상하신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하나님에 대해 일편단심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이외에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세상에 관심 두는 것을 아름답고 바람직한 일로 둔갑시켜서 우리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놔두고 요리를 즐겁게 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놔두고 아내나 남편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놔두고 자녀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놔두고 돈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있을 수 없는 일이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인간이라면 해야 될 마땅할 일로 여기고, 인간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예언에서 71절이나 74절을 보면 원수가 언급됩니다. 이렇게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이 바로 원수입니다. 원수는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는 자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바로 이 원수를 처단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사가랴는 원수에 대한 언급 이후에 72~73절에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메시야에 대한 약속은 창세기 22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독자 이삭을 제단에 올려놓고 칼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결심을 했던 아브라함의 마음에서는 이미 독자 이삭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독자 이삭 중에 하나님께 마음 드리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백세에 얻은 독자라고 해서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을 받은 아브라함은 어느덧 이삭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어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끝내 마음에서 이삭을 죽이고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지켜냅니다. 이러한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서 메시아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일편단심을 지켰던 것같이 메시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이 지켜지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원수 즉 사탄은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좋아하게 하고 관심하게 합니다. 그 결과 인간은 행복과 기쁨과 만족의 근거이신 하나님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예수님이라는 메시아를 보내심으로써 관계를 회복시키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예수님께서 오셔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자였습니다.
이제 다시 본문 78~79절로 돌아가 봅니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상태가 바로 구원의 상태입니다.
이 구원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풀이해봅니다. 돋는 해는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돋는 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을 보면 ‘동이 튼다, 새벽이 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는 늘 솟아서 세상을 밝게 비추지만 해에 등을 돌린 채 어둠 즉 죽음의 그늘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살다 보면 걸음을 뗄 떼마다 부딪히고 자빠지고 넘어지느라 평강의 길을 걷지 못합니다.
이 예언에서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비록 솟아오른 해를 등졌다고 해도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 대상들에게는 햇빛이 비추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을 때에 한 사람이 해를 등지면 다른 한 사람은 해를 마주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해를 등진다고해서 어둠 속에 거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해를 등졌을 뿐입니다.
다만 이러한 표현에는 독특하고 깊은 인간 이해가 깔려있음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예수님께서도 동일하게 가지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2~23절을 보면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비유적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인간의 육체는 외부세계로부터 육체라는 껍데기를 통하여 차단되고 밀폐되어 있습니다. 차단과 밀폐라는 어휘의 의미를 살리자면 인간의 몸속은 어두움이 가득 차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몸에서 눈은 빛을 받아들이는 기관입니다. 빛이 눈을 통하여 몸 안으로 들어가서 오장육부를 밝히 비추는 광경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관념을 통하여 인간의 이해를 드러내셨고, 이러한 경향은 본문의 사가랴의 예언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사가랴의 예언을 이해해보자면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삶을 몸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몸 안에 오장육부가 들어있음을 통해 온전한 육체를 이루듯이, 삶은 관계를 통해서 온전해지게 됩니다.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있고, 바깥에서는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나 부하직원이나 상사들과의 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들이 삶이라는 몸의 내용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관계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건, 취미, 돈과 같은 대상에 대한 관심이 관계로 나타나게 됩니다. 의식을 가지고 파악하는 모든 대상에 대한 관계가 삶을 채워가는 내용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수많은 사람과 사물과 사건과 상황들에 대한 관계들로 채워져 있는 삶이라는 몸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계의 핵심인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일편단심일 때에 하나님으로부터의 빛이 삶이라는 몸 안으로 들어와서 맺고 있는 모든 관계마다 임하게 됩니다.
빛이 임한다는 말의 의미는 68절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라는 구절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돌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돕기 위하여 보살피다’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78절의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라는 부분에서도 똑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하나님의 빛이 임하는 것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이 나의 마음을 통해서 들어오면 의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대상들에게 하나님의 보살핌은 임하게 됩니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 자체를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일편단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인 사탄은 하나님을 향하여 일편단심을 가질 수 없게 했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세상의 수많은 대상들에게 관심을 갖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빼앗아감과 동시에 모든 관계에 임하게 될 평강 또한 빼앗아 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메시아로써 예수님을 보내시기로 약속하셨고, 메시아를 예비하기 위한 자로써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을 향하여 일편단심이 아닌 것이 죄라는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대신에 자녀를 좋아할 수 있느냐? 어떻게 하나님 대신에 남편과 아내를 좋아할 수 있느냐? 어떻게 하나님 대신에 돈을 좋아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돈 좋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부모가 자녀를 좋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의 대상들을 당연하게 여기는 동안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삶 자체를 물에 빠뜨려 죽게 하는 것이 바로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일편단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내가 죽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으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십자가 복음 사건도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께 일편단심이 유지되지 못하는 나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에 대해 문어발식으로 관계하고 있는 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의식하고 좋아하는 모든 대상들과의 관계에 대한 평강 또한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일편단심일 때에만 하나님의 보살핌의 빛은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모든 대상들에 대해 하나님의 보살핌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전략은 일편단심이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수인 사탄에게 속아서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을 잃어버린 사업가가 가지는 소원은 이익을 남겨서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문어발식의 관심이 시작된 것입니다. 반대로 영적인 일편단심이 유지되는 사업가라면 사업장에 나가서도 하나님만을 좋아하겠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사업을 하는 모든 사람이 이익을 좋아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을 좋아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소설에서 줄리엣이 로미오 외에 다른 남자를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살피고 계신 사업장에서 하나님이 아닌 이익을 더 좋아할 수는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일편단심으로 하나님을 밀고나가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원수에게 마음이 빼앗긴 채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을 잊어버리고 자녀의 형통에 관심을 두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자녀 앞에서도 하나님의 좋으심에 대한 일편단심을 유지해 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보살핌을 등지고 자녀에게 관심을 쏟는 것은 부모로써 할 수 있는 일중에 최악의 미친 짓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원들이 승진을 좋아하고 월급인상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회사를 살피시는 빛이신 하나님 앞에 있음을 알고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좋아하는 일편단심의 마음을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살핌의 빛이 비치고 있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빛을 등지고 다른 사람들처럼 승진이나 월급인상을 좋아한다는 것은 회사원으로써 할 수 있는 최악의 미친 짓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삶은 관계로 채워진 몸입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등진 채로 이 세상을 좋아한다면 삶의 모든 관계는 어둠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 있으니 회사에서 아무리 승진을 향해 질주하더라도 그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판단은 오류이고 착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행여 한 두 단계 뜻대로 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세 단계도 가지 못해서 멸망의 길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은 사라지고 원수에게 속아서 이끌려지고 말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일편단심이 유지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종교로써의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이 만들어낸 신의 이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름을 열 번 불러도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없다면 그 부름은 무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을 유지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단 한 번만 부를지라도 마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은 유지되어 갈 것입니다.
일편단심은 내 인생의 단 하나의 전략입니다. 일편단심을 유지하면 나와 관계된 사람과 사물과 상황들에 하나님의 보살핌의 빛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빛은 나의 삶의 관계들을 평강의 길로 인도해 나가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너무 많은 것에 관심하는 동안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인생을 허비했습니다. 이렇게 정신 나간 상황에 마음이 묶여 있는 것이 언제까지 유지되어야할지 저희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관심거리에 대해 마음이 죽게 하셔서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유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삶 속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들에 하나님의 보살핌의 빛이 임하게 하시고, 오늘 하루도 평강으로 인도되는 구원을 만끽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