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수 사관 (一水 四觀)
*물 하나를 넷으로 본다,
일수사관(一水四觀)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고도 한다. 관(觀)과 견(見)은 본다는 뜻이다. 그런데 보는 견해가 넷(四見) 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물(水)이라고 한다(人見水). 고기는 집(堂)이라고 한다(魚見堂). 아귀는 피(膿血)라고 한다(餓鬼見膿血). 천상에서는 유리(琉璃)라고 한다(天上見琉璃). 이렇게 똑같은 물을 보는 주체에 따라서 다르게 본다는 말이다. 왜 그렇습니까? 업(業)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도 직업(職業)이 다르면 똑같은 사물(事物)을 보아도 다른 인식(認識)을 하게 된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천차만별(千差萬別)로 달라진다. 똑같은 업(業)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끼리도 보는 세상(世上)이 다르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세상(世上)을 조물주(造物主)가 창조(創造)했다고 한다(有神論). 어떤 사람은 세상은 창조(創造)된 것이 아니라 물질요소(物質要素)가 모여서 된 것이라고 한다(唯物論). 그런데 어떤 사람은 창조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고, 인과법칙(因果法則)으로 되었다고 한다(因果論). 이렇게 보고 인식(認識)하는 세계(世界)가 다릅니다. 물 하나를 보고 네 가지 견해가 있는 것과 같다. 사람이 보는 꽃과, 나비가 보는 꽃과, 벌이 보는 꽃은, 다르게 인식된다. 다르게 본다는 것은 업(業)이 다르기 때문이다. 업(業)이 다르다는 것은 생물학적(生物學的) 용어(用語)로는 종(種)이 다른 것을 말한다. 그것을 불교(佛敎)에서는 업견(業見)이라고 한다. 같은 업의 종(種)이어도 생각이 다르면 보는 세계도 다르게 본다. 창조론이 그렇고, 유물론이 그렇고, 인과론이 그런 것 같이 말이다. 이렇게 인식의 세계는 천차만별로 나누어지게 되어서 서로 옳다고 주장을 한다. 그래서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인식의 세계를 가지고 정견(正見)과 사견(邪見)을 가려 보자는 것이 불교(佛敎)의 인식론(認識論)이다. 어떻게 보아야 참다운 인식(認識)이냐를 논리적(論理的)으로 따지고 분석(分析)해 보자는 것이 일수사견(一水四見)이다.
일수사견(一水四見)은 인식(認識)의 세계(世界)를 말한 것이다. 사람의 인식 세계와 다른 종(種)의 인식 세계도 말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의 잘못된 고집(固執)과 편견(偏見)과 집착(執着)을 깨부수기 위해 서다. 부처님 당시 인도(印度)에는 많은 종교(宗敎) 사상(思想)이 있었다. 전통(傳統) 바라문(婆羅門) 사상(思想)과, 사문(沙門) 사문(思想)으로 나누어져서 서로 옳다고 싸웠다. 전통 바라문 사상은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상이다. 사문사상은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認定)하는 인식론적(認識論的) 입장(立場)만 취(取)하는 사상(思想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물질요소(物質要素)뿐 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물질요소(物質要素)가 모였다, 흩어지는 세계이지 누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사상이다. 과학자(科學者)들이 원소(元素)가 모여서 이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한 것과 같다. 인도철학 사상은 유신(有神)에서 유물(唯物) 사상으로 발전(發展)을 하게 된다. 창조론(創造論)도 유물론(唯物論)도 인식론적(認識論的) 논리(論理)가 적용(適用)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논쟁(論諍)을 바로 잡는데, 석가모니(釋迦牟尼) 붓다가 쓴 것이 논제(論題)가 일수사견(一水四見)이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하루는 어떤 바라문(婆羅門)이 부처님을 찾아와서 질문(質問)을 한다. 고타마 시어! 일체(一切)라고 할 때 당신은 무엇이 일체라고 합니까? 붓다가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일체(一切)는 십이입처(十二入處)이니라. 여기서 일체(一切)는 인간(人間)과 세계(世界)의 근본적(根本的) 본질(本質)을 말한 것이다. 바라문교(婆羅門敎)에서는 일체(一切)를 브라흐만(梵天) 신(創造神)이 변(變)해서 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세계(一切)를 무엇으로 보느냐? 고 질문(質問)을 한 것이다. 붓다의 우주관(宇宙觀)을 물었다. 그런데 붓다는 십이입처(十二入處)라고 대답을 했다. 십이입처(十二入處)는 우리 마음의 인식기관(認識器官)을 말한 것이다. 눈, 귀, 코, 혀, 몸, 의식(眼,耳,鼻,舌,身,意)이 몸에 있는 인식기관(認識器官)이다. 빛, 소리, 냄새, 맛, 촉감, 대상 법(色聲香味觸法)이 인식(認識)의 대상(對象)이다. 눈으로는 빛을 봅니다. 귀로는 소리를 듣는다. 코로는 냄새를 맡는다. 혀로는 맛을 본다. 몸으로는 촉감을 느낀다. 마음으로는 모든 법(法)을 종합(綜合)해서 인식(認識)한다. 부처님은 일체(一切) 세계(世界)가 다 마음에서 나왔다는 말씀이다.
인식(認識)하는 마음을 떠나서 존재(存在)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일체가 유심조라고 한다(一切唯心造).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씀이다. 물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 마음의 인식(認識)이다. 집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 마음에서 만들어낸 인식이다. 마음을 떠나서 인식(認識)의 세계(世界)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일체(一切)를 묻는 바라문(婆羅門)에게 일체(一切)는 십이입처(十二入處) 마음이라고 대답(對答)을 하신 것이다. 부처님 말씀은 결론적(結論的)으로 모든 것은 마음의 인식(認識)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씀이다. 그렇게 본다고 하면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기 때문에 있는 것이 된다. 일체는 존재(存在)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신(神)도 물질(物質)도 우리 인식(認識)에서 나왔다는 말씀이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인식(認識)의 세계(世界)가 나타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눈으로 빛을 본다고 말 한다. 그런데 보는 것은, 얼굴에 있는 눈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눈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본다. 우리는 밖에 있는 빛(色)을 본다고 한다. 빛(光)은 에너지 파장(波長)이다. 빛은 파장의 길고 짧은 차이만 있지, 색깔의 차이는 없다. 시신경(視神經)이 빛의 파장(波長)에 자극(刺戟)을 받으면 자극 정도에 따라 색깔을 느끼게 된다. 사람은 가시광선(可視光線)만 본다. 자외선(紫外線)은 보지 못한다. 이와같이 우리가 보는 색(色)은 우리의 마음에서 생긴 감각(感覺)을 말한다. 동물(動物)들은 사람과 다른 세상(世上)을 보고 산다고 한다. 눈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개의 눈은 사람과 눈이 비슷하다. 그러나 개는 근시(近視)이기 때문에 멀리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시각(視覺)에 비(比)해서 후각(嗅覺)이 발달한 것이 개다. 개는 색맹(色盲)이 아니고, 파란색 노란색 회색(灰色)은 구별(區別)한다. 그러나 빨간색과 녹색은 구별을 못한다고 한다. 고양이는 보라 파랑 초록 노란색은 볼 수가 있으나 빨강 오렌지 갈색은 구별을 못한다고 한다. 시력(視力)이 멀리는 흐려서 보지 못하고 가까이 있는 물체는 본다고 한다. 맹금류(猛禽類) 중에 독수리는 시력이 2km 밖의 토끼도 2m 앞에 있는 것 같이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종(種)에 따라 보는 세계도 다르게 본다는 것이 일수사견(一水四見)이다. 소리도 냄새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는 마음에 의해서 보여지는 마음이 이 사상(世上) 세계(世界)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보는 것은 안에 있는 나(我라)고 하고. 보이는 것은 밖에 있는 나와 다른 세계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면 나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존재(存在)라고 생각한다. 또 세계(世界)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면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인식되는 것들이다. 부처님은 일체(一切)는 십이입처(十二入處)라고 하셨다. 십이입처는 우리 마음을 말한 것이다. 마음에서 모든 것이 나타났다는 말씀이다. 옛날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중국(中國)으로 유학(留學) 길에 올랐다. 날이 저물어서 동굴 속에서 자게 된다. 자다 보니 캄캄한 밤중에 목이 말라 옆에 있는 바가지 물을 마시게 된다. 목이 말라서 마시는 물이라 정말 꿀맛이었다.
그런데 아침이 날이 밝아서 밤에 마시던 물을 또 먹으려고 보니 해골바가지 물이었다. 해골 물속에는 구더기가 득실대고 있었다. 원효 대사는 해골물 속에 구더기를 보자, 심한 구토(嘔吐)와 함께 똥물까지 다 토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깨달은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나타난다는 것을 확실(確實)하게 깨달은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제밤에는 그렇게 달고 꿀맛이던 물이 아침에 보니, 사람 해골바가지에 구더기가 꿈틀대는 더러운 물이었다. 원효 대사가 마신 물이 원래 두 가지 물이였습니까? 밤에는 맛있는 꿀물이고, 아침에는 더럽고 썩은 물이었습니까? 아니다. 마음에서 두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사람이 더럽다고 하지만, 해골 물속에 사는 구더기는 더러울까요? 이렇게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라고 한다.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고 의식하는 모든 인식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밖에서 온 것입니까? 마음에서 일어난 것입니까? 그것은 탐욕에서 일어난다. 탐욕(貪慾)은 우리 인간의 욕망(慾望) 아닙니까? 우리 마음속에 탐욕이 모든 것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마음이 탐욕(貪慾)에 묶여있으면 나와 세계를 나눈다. 책상(冊床)의 예(例)를 들어 봅시다. 책상은 책을 놓고 보려는 욕구가 만든 물건이다. 욕구(慾求) 이전(以前)에는 책상(冊床)이 없었다. 책상(冊床)이라는 실체(實體)는 원래(元來)가 없었다. 사람의 욕구(慾求)가 만든 개념(槪念)의 세계(世界)이다. 책상(冊床)은 나무로 만들면 나무 책상이 된다. 밥을 먹으려는 욕구가 나면 책상이 밥상이 된다. 밥상이라는 것이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니다. 책상이라는 것도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욕구(慾求)에 따라 책상도 밥상도 있게 된다. 이렇게 모든 존재(存在)는 우리 마음이 만든 것이다. 몇 년 전에 부시 맨 이란 영화를 보았다. 부시맨은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부족 아닙니까? 헬리콥터를 타고 가던 사람이 빈 콜라병을 밀림에 던졌다. 부시 맨 이 땅에 떨어진 콜라병을 주어서 보고 신기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 줄을 모르니까 이리보고, 저리 보고 야단이 났다. 이 영화 속에 부시맨을 보던 많은 사람들은 박장대소 웃었다. 왜? 웃었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콜라병을 절구로 사용하는 부시 맨 들이 미개하게 보여서 웃었다. 이게 어찌 웃을 일입니까? 웃을 일이 아니다. 부시 맨 이 우리를 보았다면 그들도 웃었을 것이다. 부시맨이 보기에 감자 찧는 절구를 콜라병으로 쓰고 있으니, 웃을게 아닙니까? 똑 같은 사물을 놓고도 이렇게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욕구(慾求)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콜라병에 참기름을 넣으면 참기름병이 된다. 들기름을 넣으면 들기름병이다. 이렇게 마음의 욕구에 따라서 세상은 달라진다. 썬그라스를 쓰는 것과 똑같다. 파란색을 쓰면 파랗게 보인다. 노란색을 쓰면 노랗다. 붉은색을 쓰면 붉게 보인다. 색깔 따라 다르게 보인다. 일수사견(一水四見)은 보여지는 세계가 다른 것을 말한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이란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