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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서재는 잠수함입니다. 그것은 저를 태워서 물 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게 하죠. 그곳은 수면 바깥에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세계이고요. 오직 저에게만 허락된 그런 진귀한 경험들을 제공해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제 서재는 잠수함입니다.
나는 부산에 산다
부산의 기가 좋아요. 제 사주가 나무래요. 그래서 물이 있으면 좋다는데, 옛날부터 물이 좋았어요. 지난 몇 년간 해외로 떠돌아다녔어요. 밴쿠버에서 1년, 뉴욕에서 2년 반정도 있다가 이번에 부산으로 왔죠. 모두 다 바닷가였죠. 바다가 주는 어떤 기운이랄까? 그런 게 저와 잘 맞는 것 같아요. 태어나기는 산골에서 태어났는데 바다에 가면 좋았어요. 또 하나 좋은 점은 부산에 살면 서울하고 멀어요. 서울하고 멀다는 게 부산의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사실 작가로 살다 보면 작품에 집중해야 되는데, 서울은 아무래도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일에 많이 휘말리거든요. 부산은 기차로는 서울에서 2시간 반정도 거리인데, 적당한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일을 거절할 때 좋은 핑계가 되고, 또 제가 중요하거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또 금방 올라올 수도 있어요. 부산에 1년 정도 살았는데 밤에 술 먹자고 전화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고요하게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환경입니다.
예술을 하자
저는 모든 사람들이 예술가적인 자아를 내면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태어날 때부터 예술가로 태어나고 또 그러한 면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죠. 아이들을 보면 모두 그림 그리고, 노래 부르고, 연기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가 이런 것들을 못하게 되었을까요? 사회화가 되면서 못하게 된 거죠. 어른이 되고 또 자라나면서 억제되죠. 예술가의 자아라는 건 조금 위험한 면도 있거든요. 자기를 막 표출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걸 억누르게 되는데, 저는 이제는 다시 좀 사람들이 자기 내면에 있는 예술가적인 면을 밖으로 표출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해요. 인터넷이라는 환경은 양면성이 있지만 그런 표출을 위해서 좋은 환경이죠. 유튜브 같은 것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자기 혼자 갖고 있던 재능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표현할 수 있죠. 저는 맥북을 쓰는데, 거기에 보면 음악을 만드는 프로그램 같은 것이 있어요. 예전에는 감히 접근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일반인들도 쉽게 간단하게 음악을 만들게 해주잖아요. 반면에 좋지 않은 면도 있지요. 예술이라는 것은 혼자 고요히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 수많은 SNS 서비스라든가, 인터넷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우리들의 시간을 빼앗아 가요. 처음 예술을 시작할 때는 특히 몰입이 필요한데, 그 몰입의 순간들이 자꾸 저해된다는 것이죠. 몰입하다가 흐름이 끊기고, 친구한테 메시지 오면 답장해야 되고 이러잖아요. 그래서 저는 처음에 예술에 집중하는 단 30분, 단 한 시간 정도라도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현재와 단절된 다른 세계와 접속하는 공간
저는 일을 하는 공간이 따로 있습니다. 거기는 책조차도 없는 공간이에요. 책도 소설을 쓸 때는 방해가 돼요. 소설을 쓰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 책을 잘 읽지 않는 편입니다. 특히 소설 같은 경우에는 잘 읽지 않아요. 저는 작업을 할 때면 집에 장치를 해요. 인터넷 공유기 같은 것에 시간 제한을 설정하거나 또는 특정한 곳에서는 인터넷이 안 되도록 한다거나, 아니면 아예 끊는다거나 하는 식의 장치들을 하는데 그런 것이 가장 필요한 곳이 서재예요. 서재는 일을 하지 않는 공간이에요. 서재에 들어가면 책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책이라는 것은 지금 것이 아니잖아요? 책은 제 아무리 빠른 것이라도 적어도 몇 달 전에 쓰여진 것이거든요. 더 오래된 것은 몇백 년, 몇 천 년 전에 쓰여진 것이고요. 그래서 서재에 들어간다는 것은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은 목소리들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적어도 호메로스 같은 경우에는 2000년 이상을 살아서 우리에게 와있는 거잖아요. 그런 목소리들을 듣는 시간이라서 거기에 집중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서재 안에서는 음악도 거의 듣지 않아요. SNS라든가, 메신저 같은 다른 성질의 목소리들이 틈입해 들어오지 않는 공간으로 만드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제 서재에는 편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의자가 하나 있어요. 그 의자에 앉아서 삼면으로 둘러싸인 서가에서 책을 뽑아 읽죠. 쉽지는 않지만 읽고 있는 동안은 가능하면 책에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반면에 서재 밖으로 나오면 우리는 당장 친구들하고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도 있고, 전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순식간에 알 수 있어요. 세상과 접속하는 거죠. 그런 면에서는 서재도 역시 접속의 공간이지만 다른 성격의 접속이라고 생각해요.
자아가 확장되는 공간
서재는 옛날 오래된 목소리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접속을 하면서 동시에 쉽게 만나기 힘든 타자를 대면하는 공간입니다. 사실 우리가 낯선 것을 가장 안전하게 만나는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실제로 책에 등장하는 그런 목소리들을 현실에서 만난다면 정말 피곤할 거예요. 거기에는 무시무시한 인간들도 있고, 독특한 캐릭터도 있고, 그리고 위험한 음성들도 많이 있거든요. 책은 하나하나가 다 타자이죠. 다 낯설어요. 그런데 책을 읽을 때는 가장 편안하고 정말 준비된 상태에서 낯선 목소리들을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그럼으로써 서재라는 공간은 자아가 확장해가는 공간인데, 그 확장은 자기와는 생각이 다른, 자기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또는 자기는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욕망들을 실현하는, 그런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책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통해서 자아가 확대되는 거죠. 작은 공간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거대해질 수 있는 확장성을 가진 공간인 것 같아요.
좋은 책만 보관한다
저의 서재에는 책이 많지는 않아요. 책을 수집하는 수집벽도 없어서 책을 늘 솎아내는 편이죠. 저는 책을 지나치게 수집하거나 집에 쌓아놓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과하면 건강하지 않다는 생각이죠. 어떤 사람들은 조금 어려운 말로 책을 ‘물신화’하는데, 이것은 좋지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신성하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대단한 책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요. 인간 사회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좋은 것은 드물어요, 그런데 그냥 쌓아놓기만 하면 좋은 것을 가려내는 감식안을 기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서재를 둘러보면서 가끔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거나 아니면 크게 실망했거나 한 책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 놓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처분할 때도 있어요. 서재에서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자기의 변화도 살펴볼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서가 사진을 가끔 찍어놓아요. 그런 사진을 보면 10년 전, 5년 전, 4년 전에 있었던 책들 중에 없어지는 책들도 있고 새로 들어오게 되는 저자도 있고, 나가게 되는 저자, 또 저술들이 달라지는 것을 알게 돼요.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변했구나.’ 하고 느끼죠. 취향이 변했을 수도 있고, 감식안이 달라졌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좋은 자리에는 제가 좋아하고 경외하거나 아니면 정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책들로 채워지죠. 반면에 그렇지 않은 책들은 조금씩 멀어지는데 그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 이걸 반복함으로써 서재는 단출해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가’ 하면 생각하는 그런 서재의 이미지하고는 제 서재는 상당히 많이 다른 편입니다.
소설가는 책을 가리지 않는다
닥치는 대로 읽죠. 사실 소설가는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많이 읽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소설은 기본적으로 읽고, 현실적인 책들을 많이 읽습니다. 소설가는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아야 되거든요. 그래서 그게 역사서일 수도 있고, 무슨 도구들의 매뉴얼일 때도 있어요. 자동차 정비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을 때도 있어요. 범죄 수사 매뉴얼을 읽을 때도 있고요. 제가 사실 제일 좋아하는 류의 책은 고전이에요. 왜냐하면 거듭하여 읽을 수 있거든요. 보통의 책들은 한 번 읽고 다시 읽지 않지만, 옛날 책들은 계속해서 거듭하여 읽게 되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최근에 그리스 시대의 비극, 그 시대의 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오디세이아> 같은 책을 새로 읽었어요. 읽다 보면 어렸을 때 읽었던 것, 그리고 작가가 되자마자 읽었던 것과 다른 것들을 많이 느낄 수 있죠. 그래서 거듭하여 다시 펼쳐보게 돼요.
책이 작가를 만든다
작가가 되는 데 책은 거의 100%의 역할을 하죠. 오직 책만이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듭니다. 경험도 아니고, 주변 사람도 아니고 정말 책만이 온전하게 작가를 만든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래서 모든 작가는 독자였죠. 작가에서 출발해서 독자가 되는 사람은 없어요. 제가 우리나라의 동료 작가들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작가들에게도 물어봤는데 비슷한 과정을 거쳐요. 처음에는 특정한 소설, 특정한 작가의 열렬한 독자가 되죠. 그것을 읽다가 그보다 더 나은 책들을 읽게 됩니다. 어느 정도 읽다가 보면, ‘나도 이런 것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그런 때가 있어요. 그래서 자기 안에 쓰고 싶어 하는 내용과 자기가 읽어 온 책들이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하는 거죠. 그게 대부분 작가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작가들이 쓰는 소설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에요. 어떤 의미에서 작가들은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해서 그것을 다시 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가 읽었으나 100% 동의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응답을 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어떤 책들은 질문을 던지잖아요. 예를 들어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죄란 무엇이고, 벌이란 무엇인가, 죄에 대해서 합당한 벌은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면 지금 그런 문제에 대해서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는 도스토옙스키가 제기한 그 질문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새로운 답변을 내놓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예전에 자기가 읽었던 것에 대해서 응답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전의 목소리들, 그 작가라든가 그 소설에 대해서 자기 방식으로 말을 하거나 주석을 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작가가 된다는 것은 책의 전적인 영향이라고 봐야죠.
어릴 때 재미있었던 책을 다시 읽어 보세요
제가 몇 년 동안 뉴욕에 있다가 돌아왔는데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뉴욕을 가기 전에는 지하철에서 최소한 사람들이 ‘메트로’ 같은 무가지(無價紙)라도 읽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몇 년 만에 돌아와 보니까 그런 무가지(無價紙)가 사라졌어요. 이제는 전부 스마트폰을 보고 있더라고요. 뉴욕에서는 아직도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전자 책이든 종이 책이든 책을 많이 봐요. 휴대폰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물론 뉴욕커들이 잘나서가 아니고요, 지하에서는 아무것도 안 터지기 때문이죠. 3G 네트워크 신호는 고사하고 전화도 안 돼요. 뉴욕커들도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오면 모두 다 전화하고 문자 보내고 이러거든요. 그래서 뉴욕도 ‘한국처럼 될 날이 멀지는 않았구나. 사람들이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고, 다른 것에 더 시간을 뺏길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책이 줄 수 있는 독특한 경험들 때문이에요. 그걸 다른 것들이 대체하지 못하는 한, 그것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계속 갈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권해 드릴 수 있는 방법은 있어요. 간단해요. 자기가 어렸을 때 읽었던 재미있는 책 베스트 10을 한번 적어보는 거예요. 다섯 개만 적어도 좋아요. 그럼 동화책부터 여러 가지 책들이 있을 거예요. 아무튼 재미있게 읽었던 책 다섯 권 정도를 적어보는 거죠. 그리고 그 책을 다시 읽는 겁니다. 다시 읽어보면 대부분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책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 다르네. 서두가 이랬었나?’ 그게 새로운 책을 읽는 것보다 놀랍도록 큰 어떤 발견의 기쁨을 줘요. 저도 가끔 벽에 부딪힐 때면 어렸을 때 읽었던 책, 또는 10년 전에 읽었던 책, 또는 지금까지 읽었던 책 베스트 10 같은 것을 한 번 적어 봐요.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한 번 들춰 보죠. 그러면 ‘내 기억이 상당히 왜곡돼 있었구나.’하고 전혀 색다른 의미에서 재미를 다시 느끼게 돼요. 그게 독서에 대해서 잃어버렸던 즐거움, 흥분, 이런 것을 되살려줍니다. 그런데 이걸 왜 권하는가 하면, 새 책은 실패할 확률이 큽니다. 서점에 가서 요즘 잘 나가는 책이라고 사서 봤는데 재미없으면 어떻게 해요. 그런데 어렸을 때 우리가 재미있게 봤던 책 다섯 권이나 열 권, 이 책들은 분명히 우리를 건드렸던 그 무엇인가 있어요. 그리고 다시 읽어도 분명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서 ‘뭐야, 내가 생각한 것 그대로잖아. 지루해.’라고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제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해봤는데, 다들 새삼스럽게 ‘깜짝 놀랐다’, ‘이 책이 이런 책이었다니’하는 반응이었어요. 그래서 나이가 든 자신의 변화 같은 것을 확인하고 싶거나 여러 가지 면에서 독서에 흥분이나 재미를 잃어버린 분들에게 제가 권하는 방법입니다.
소설가는 내 운명
저는 “왜 소설가가 되었나?”하는 질문을 많이 받기 때문에 매년 생각합니다. 매년 ‘나는 왜 작가가 되었을까, 어떻게 하다가 작가가 되었을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제 작가가 된 지 15년을 넘기다 보니, 이제는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제가 어렸을 때 다른 아이들보다 발육이 늦었어요. 왜냐하면 초등학교를 일찍 들어갔거든요. 제가 1년 먼저 들어간데다가 11월생이니까 어떤 또래 아이들보다는 1년 반에서 2년 정도 발육이 늦었어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과 같이 하는 운동이나 놀이에 잘 끼어들지 못하고, 주로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으면서 보냈어요. 그런데 힘으로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이 재미있게 들었어요. 그런 게 무척 좋았어요. 제가 어떤 이야기를 꾸며서 하든, 아니면 최근에 본 소설에 더 살을 붙여서 이야기를 하든,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면서 재미있게 듣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럴 능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기에서 제가 기쁨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죠. 지금 소설가가 되어서 하는 일도 본질적으로는 어렸을 때 아이들한테 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죠.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고, 이상해하는 사람도 있고, 신기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제가 쓴 것을 사람들이 읽으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잖아요. 그 책이 아니라면 느끼지 않았을 어떤 감정을 느끼죠. 저는 독자로서 그런 경험들을 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또 작가로서 사람들에게 그런 경험을 제공해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의 소명이라고 생각해요.
독자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
작가는 마르코 폴로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마르코 폴로는 당시에 아무도 가지 않던 중동이나 중국 같은 곳을 다녀와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죠.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었는데 어쨌든 마르코 폴로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고 책으로 썼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시간적인 이유든, 아니면 성향의 문제든 간에 대개 정해진 굴레 안에서 살아가요. 아침에 일어나면 똑같은 절차를 거쳐서 아파트 밖으로 나와서 회사를 가고, 거기에서 정해진 일들을 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작가는 보통 사람들이 꿈꾸지 않는 것, 또는 감히 생각하지 않는 것, 생각도 못 할 것들을 대신해서 겪습니다. 사실 생각도 함부로 하면 안 되잖아요? 생각 잘못하면 무섭잖아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생각도 범위를 제한하면서 살고 있는데, 작가들은 보통 사람들을 대신해서 생각하고, 이상한 세계를 탐험하죠. 여기서 말씀 드린 이상한 세계는 물리적인 세계가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예요. 제가 최근에 쓴 <살인자의 기억법> 같은 소설도 연쇄 살인범의 내면이잖아요.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기도 싫어해요. 그런데 작가는 이를 대신해서 생각합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자는 어떤 존재인가를 상상하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거죠. 그래서 저는 작가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요. 보통 사람들이 자기 상상력 안에 갇혀 있을 때 작가들은 더 멀리 가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감히 꿈꾸지 않는 것, 감히 경험하지 않는 것들, 또는 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 경험하고 그 경험을 사회로 가져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해서 그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진실한 글이 잘 쓴 글
저는 제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직도 모국어를 다 마스터하지 못해서 열심히 수련 중입니다. 그런데 작가니까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까?’ 하는 질문을 많이 받죠. 어쨌든 프로페셔널이고, 열 권이 넘는 소설을 썼으니까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글을 많이 쓴 것은 분명하겠죠. 글을 잘 쓰는 법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물어보시는데, 저는 다른 사람의 글을 볼 때는 단순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요.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 이야기가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에요. 어떤 글은 미사여구로 잘 꾸며져 있고, 완벽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요. 제가 군대 생활을 헌병대 수사과에서 했는데, 영창에 수감자들의 일기를 매일 받아서 책으로 편집하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어떤 수감자들이 글을 잘 쓰는가 하면 중형을 받은 중범죄자들이었어요. 군대에 와서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중형에 처해진 두 명이 있었는데, 그 수감자들이 글을 제일 잘 썼어요.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의무적으로 쓰라고 하니까, 반성문처럼 썼는데 그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은 각기 무기와 25년형을 구형 받았거든요. 나중에 15년, 5년으로 감형되긴 했지만 적어도 구형은 그렇게 받았어요. 그들이 그런 구형을 받고 돌아와서 쓴 글들이 있었어요. 지금 스물 두 살인데 빨라도 마흔 살이나 돼야 감옥을 나갈 수도 있다는 자기 운명을 생각하고 쓴 거죠. 자기 인생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직면하고 쓴 것이거든요. 이런 글들에는 힘이 있고, 진실해요. 그래서 저는 글을 잘 쓰는 것은 어떤 기술의 문제도 아니고, 기법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순간 인간이 고요하게 자기 서재에 아무도 침입해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정직하게 쓴 글에는 늘 힘이 있고 매력이 있어요.
나의 작품 세계는 경계를 넘어 확장하는 것
제 작품 세계를 제가 말하기는 조금 그런데요. 저는 늘 경계를 넘어가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문학 또는 문학은 이래야 한다.’라는 경계들이 있잖아요? 암묵적으로 합의된 경계, 교과서에서 보는 문학 작품들 같은 어떤 풍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정해진 경계 안에서 글을 쓰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늘 그 바깥에, ‘이런 것 써도 되나? 쓰면 안 될 텐데’하는 생각을 했고 그때마다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 것을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쓴 소설들을 보면 잘 쓴 것도 있고 못 쓴 것도 있고 천차만별이겠지만, 한국문학에서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것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벼락을 맞으러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볼까?” 했더니 그 이야기를 들은 제 아내가 웃었어요. 못 쓸 거라고 생각을 한 거죠. 왜냐하면 그건 만화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진지한 문학이 다루는 것이라고는 생각을 안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걸 꼭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기에 무엇인가 있는 거죠. <너의 목소리가 들려> 같은 소설은 가출한 청소년들의 세계이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자살 안내인의 세계죠. 이런 것도 한국문학에서는 쉽게 다루지 않았던 주제거든요. 이런 것들을 쓰는 게 저의 몫인 것 같아요. 저의 작품 세계가 있다면 끝없이 어떤 경계들을 넘어서 경계를 확장하는 그런 역할, 그렇게 해가는 문학, 굳이 말할 수 있다면 이런 것이 저의 작품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장래 희망이 소설가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인데 제 장래희망이 소설가예요. 장래에도 계속 소설을 써야죠. 지금도 소설가이지만, 장래희망도 소설가입니다. 20년 후에도 소설가이기를 바라고요. 특별한 계획은 그것밖에는 없어요. 소설을 계속 쓴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소설이라는 것은 쓰기 직전까지도 무엇을 쓰게 될지 모르는 것 같아요. 영화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소설이라는 것은 쓰기 직전까지도 어떤 안개에 싸여있는 이상한 숲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있어요. 뭔지는 알겠고, 어떤 방향인지도 알겠는데 그 안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지는 모르는 상태이죠. 숲을 들어가서 보면, 점점 시야가 넓어지고 밝아지는 것 있잖아요? ‘스타크래프트’ 같은 컴퓨터 게임을 보면, 처음에는 암흑이에요.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고 주위는 시커먼 어둠인데, 돌아다니다 보면 점점 밝아지잖아요. 소설도 그래요. 낯선 세계에 던져진 하나의 일꾼처럼 시작해요. 그런데 돌아다니면서 많은 세계들이 밝아지는 거죠. 소설 또 써야죠. 그런데 앞으로 무엇을 쓰게 될지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어요. 책상 앞에 앉으면 생각이 나겠죠.
출처: 네이버북 지식인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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