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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05
디모데후서 3장 17절 [1장 6항]
성경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할 때 믿고 순종해야 할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진리 자체이시며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성경에 대하여 우리는 교회의 증거에 의해 성경의 높고 존귀한 가치로 이끌려지고 인도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방금 말한 성경의 권위가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존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 권위 아래에서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함으로 그 의미를 잘 드러내게 될 때 성경이 얼마나 높고 존귀한 가치가 있는지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증거는 이런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증거와 함께 성경 자체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 하면서 권위를 드러냅니다. 신앙고백서는 내용의 천상적인 특성, 교리의 유효성, 문체의 장엄함, 모든 부분들의 일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전체적 조망,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에 대한 충만한 발견, 다른 많은 비교할 수 없는 탁월성, 및 그로 말미암은 전적인 완전성이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증거 한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증거가 있다 할지라도, 또한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충분히 증거 한다 할지라도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충만한 이해와 확신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역사로부터만 나옵니다. 역으로 말하면 성령의 내적 역사 없이는 아무리 교회가 증거 할지라도, 성경 자체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 한다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의 내적 역사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내적 역사는 반드시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신다는 게 중요합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과 상관없이 역사하실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지, 말씀이 없는데도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부분은 제1장 6항으로, 성경의 완전성 혹은 충분성에 대해 말하는 내용입니다. 6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 및 인간의 구원과 믿음과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 뜻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성경으로부터 유추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지 인간의 전통들에 의해서든지 아무 것도 어느 때에 추가될 수 없습니다(딤후3:15-17, 갈1:8-9, 살후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씀에 계시되어진 것들로부터 구원을 아는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필수적임을 인정합니다(요6:45, 고전2:9-12). 그리고 하나님 예배와 교회 정치에 관해서 인간의 행동들 및 사회들과 공통적인 어떤 상황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것은 항상 준수되어야 할 말씀의 일반 규범들을 따라서 본성(자연)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에 의해 규정되어야 합니다(고전11:13-14, 14:26,40).
우리는 이미 2항에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 66권만이 신앙과 삶의 규범, 그것도 유일한 규범이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 말은 신앙에 대한 모든 가르침을 성경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신앙에 합당한 삶에 대해서도 성경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항에서는 믿고 순종해야 할 성경의 권위까지 말하게 되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권위를 가진다, 그것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6항은 이 성경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언급했지만 가톨릭은 성경 66권 외에 외경을 정경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성전이라는 전통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백하는 바에 따르면 성경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66권의 완성 외에 또 다른 계시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재세례파, 퀘이커교도 등). 소위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성경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전체 뜻을 아는 데 있어 성경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합니다.
일단 신앙고백서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 및 인간의 구원과 믿음과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 뜻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성경으로부터 유추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가르쳐지는 하나님의 전체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믿음(신앙)과 그 믿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그래서 성경 66권만이 신앙과 삶의 규범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6항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 및 인간의 구원을 앞세웁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고, 하나님의 영광은 결국 우리의 구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5항에서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낸다고 할 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전체적 조망과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에 대한 충만한 발견을 말한 바 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창조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섭리 안에서 타락한 인생들 가운데 일부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신 뜻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고, 또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인간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자들의 믿음과 삶,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처음 세 문항이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1문.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고전10:31, 롬11:36)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시73:25-28).
제2문.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지도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규범을 주셨습니까?
답.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지도하기 위한 유일한 규범은(요일1:3-4) 신구약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딤후3:16,엡2:20).
제3문. 성경이 제일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성경이 제일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할 바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입니다(딤후1:13, 3:16).
소요리문답 1, 2, 3문에서 구원에 대한 표현은 없지만 성경이 제일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이 두 가지, 즉 믿음과 순종(삶)이라고 할 때 이것 자체가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 인간의 구원, 믿음과 삶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전에 말했지만 창조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섭리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에 대한 작정도 말하고,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예정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도 말하고, 심판 이후에 대해서도 알려주시는 바가 있습니다. 그만큼 성경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핵심 된 내용은 무엇인가? 5항에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전체적 조망과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에 대한 충만한 발견이라고 할 때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자들의 믿음과 삶, 이것이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 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소요리문답은 성경이 제일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할 바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라고 답하는 겁니다. 믿음과 순종의 삶, 이것이 성경의 가장 큰 틀입니다.
한편 성경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다 기록해 놓고 있지만, 다 기록해 놓았다고 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지혜와 지식을 다 기록해 놓은 것은 아닙니다. 분명 성경 66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대하여 우리는 성경 66권 외에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성경 66권만으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대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믿음과 삶으로 있다고 할 때 이 부분에 있어서도 우리는 성경 66권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다 담고 있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명 하나님 안에는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십니다. 오늘날 여러 부분에 있어 학문이 발전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인간에 의해 새롭게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께서 알게 하심으로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혜와 지식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그리고 믿음과 믿음에 합당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 뜻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전체 뜻이 두 가지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성경으로부터 유추될 수 있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성경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인간의 구원이 믿음과 삶이라고 할 때 우리의 믿음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식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를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으로, 또한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웃까지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조차 성경을 읽는다면 받아들이지는 않을지라도 이런 지식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모든 부분에 있어 분명하게만 기록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성경으로부터 유추될 수 있는 내용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는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말할 수 있습니다. 채드 반 딕스혼 & 에밀리 반 딕스혼 부부의 공저인 「믿음의 고백」이라는 책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총회 일원이던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의 예를 드는데, 비록 성경에서 누가 성찬의 상에 나아와야 하고 또 누가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에 관하여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성경에서 그 교훈을 추론하여 낸다고 말한 바가 있다고 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유아 세례와 관련해 성경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재세례파에서는 유아 세례 자체를 거부합니다. 오늘날 침례교가 그러합니다. 하지만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성경으로부터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를 추론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4문이 이와 관련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74문.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답. 그렇습니다. 성인들뿐 아니라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과 교회에 포함되며(창17:7, 마19:14), 또한 성인들 못지않게 유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죄로부터의 구속과 또한 믿음의 주인이신 성령이 약속되어 있으므로(시22:10, 사44:1-3, 눅1:15, 행2:38-39, 16:31), 유아들도 언약의 표인 세례를 통하여 기독교 교회에 받아들여지고 불신자들의 자녀들과 구별되어야 하는데(행10:47, 고전7:14), 구약에서는 이 일이 할례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나(창17:9-14) 신약에서는 그 대신 세례가 제정되었습니다(골2:11-13).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다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그리고 믿음과 믿음에 합당한 삶에 대한 모든 내용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만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점에서 디모데후서 3장 15절 이하 17절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특히 오늘 본문으로 읽은 17절은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66권의 모든 성경만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할 수 있고, 또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에 합당한 이런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 외에 다른 것을 더해서는 안 됩니다. 가톨릭처럼 외경을 더하거나 성전이라고 하는 전통을 더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라고 하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외에 새로운 계시가 있는 것처럼 더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에는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지 인간의 전통들에 의해서든지 아무 것도 어느 때에 추가될 수 없다고까지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과 관련해 인용하는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갈라디아서 1장 8절과 9절입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다시 말해 사도들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일치합니다. 왜 일치하느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도들의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가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통해 전하여 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더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충만하게 말씀으로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신앙고백서를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씀에 계시되어진 것들로부터 구원을 아는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필수적임을 인정한다고 고백합니다. 5항에서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충만한 이해와 확신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역사로부터 나온다고 고백 한 바 있지만, 성령의 새로운 계시가 없다고 해서 성령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계시는 없지만 계시된 말씀에 대한 성령의 조명하심은 있습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또한 믿음과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완전하지 않아서 충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9-12) 그러니까 하나님의 것을 알려면 인간의 것으로는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6항 첫 부분에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 및 인간의 구원과 믿음과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 뜻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할 때 불신자조차 성경을 읽어보면 이러한 내용을 알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앎이 믿음으로 반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에 합당한 삶 역시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역사가 있지 않으면 결코 나타날 수 없습니다.
특히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서 하나님의 뜻을 성경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성령의 조명하심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예를 든 삼위일체만 하더라도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서 이 내용을 말하지만, 소위 이단들 중에서는 성자의 하나님 되심, 또한 성령의 하나님 되심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단순히 자기 생각만 나열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도 성경을 따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성경을 따라 다른 해석이 있다는 것은 결국 성령의 조명하심이 모든 자에게 동일하게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 믿음과 삶에 있어서 성경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앞에 서 있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자요,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완전하다고 할 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또한 그가 주시고자 하신 모든 부분에 있어 완전하다,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말씀 앞에 서 있는 우리는 너무나도 부족한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는다고 해서, 또한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분명한 것, 혹은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역사가 있게 하셔서 무지한 우리를 깨우치십니다. 이것이 지금 6항의 내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씀에 계시되어진 것들로부터 구원을 아는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필수적임을 인정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덧붙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 예배와 교회 정치에 관해서 인간의 행동들 및 사회들과 공통적인 어떤 상황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것은 항상 준수되어야 할 말씀의 일반 규범들을 따라서 본성(자연)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딕스혼 부부의 「믿음의 고백」이라는 책은 참조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성경의 완전성, 충족성은 예배와 교회 정치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까지 미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할 수 없는 일부 측면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교회의 정치와 관련하여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조금 더 상세히 말하면 구원이나 기독교 교리, 기독교 생활과 관련하여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할 수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직분들과 기도, 찬송에 관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를 지도하는 내용이 상당히 있으며, 예배와 교회 정치를 위해서도 성경은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와 교회 정치에서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신 부분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도 시간에 친구와 잡담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위해 특별 계시가 필요한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별력이 있으면 우리가 예배하기 위해 비를 피하고 더위 혹은 추위에 대비할 수 있는 어떤 장소를 찾아야 할 것은 굳이 성경에서 기록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고린도전서 11장과 고린도전서 14장에 있는 내용을 근거 구절로 제시하는데, 고린도전서 14장만 보면 우선 26절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40절도 인용하는데,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26절의 경우 너희가 모일 때 찬송시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 당시에는 계시도 있고, 방언도 있고, 방언을 통역하는 일도 있다고 전합니다. 오늘날 방언에 대하여 방언기도로 이해하지만, 가르치는 말씀도 있다고 할 때 가르치는 말씀과 관련된 내용이 계시, 방언, 통역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이 주어진다고 할 때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권면합니다. 40절에서는 좀 더 분명하게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까지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근거로 3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한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이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란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가르칩니다. 율법을 통해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역사들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6일 동안 모든 만물을 만드시되 배경을 만드시고 그 배경 안에 채우신 역사, 또한 그렇게 만든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서 보존되는 그런 역사는 결코 하나님이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너희가 모여 예배할 때 그 순서를 이런 식으로 하라고 말씀하신 바는 없지만, 항상 준수되어야 할 말씀의 일반 규범을 따라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에 의해 규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회중이 모이면 기도로 예배를 시작하고, 성경을 봉독하며, 시편을 찬송하고, 설교 전 공중 기도, 설교, 설교 후 기도, 시편 찬송, 축도로 마칠 것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 순서로만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항상 준수되어야 할 말씀의 일반 규범들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분별로 이렇게 정하여 예배해야 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 것입니다. 예배 모범만이 아니라 교회 정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있는데,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에 의해 규정되어야 할 것조차 항상 준수되어야 할 말씀의 일반 규범들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원리는 어디로부터 나와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을 따라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닙니다. 예배의 요소로 이런 방식은 어떤가 하면서 소위 사람을 출처로 하는 방식도 가능하다고 열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출처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상적인 일에서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의 모든 삶의 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하고, 그 삶은 성경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로 규정할 수 있을지라도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은 반드시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이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말씀만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임을 다시금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