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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말씀 :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욥(욥기 3:11~26)
* 본문요약
욥은 자신이 낙태되었거나 태어나면서 죽었더라면
지금쯤 평안히 누워 쉬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탄합니다.
욥은 죽음의 자리는 이 세상처럼 고통이 없고 연안과 고요함만 있을 것이라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왜 이런 죽음의 평안을 허락하지 않고
계속 빛과 생명을 주셔서 현실에서의 고통을
있는 대로 느끼게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절규합니다.
그래서 금과 은을 찾는 것보다 죽기를 더 찾고
찾다가 묘지의 돌만 발견해도 기뻐 뛸 것 같은 심정이라고 고백합니다.
전에 그가 이런 일을 두려워하여 그렇게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기까지 했는데,
그럼에도 결국 이런 일이 자신에게 오고야 말았다고 한탄합니다.
찬 양 : 383장(새 336) 환난과 핍박 중에도
435장(새 385) 못 박혀 죽으신
* 본문해설
1. 차라리 태어날 때 죽어서 태어났더라면(11~12절)
11)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죽어서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에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 어찌하여 어머니의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어머니가 나를 품에 안고 젖을 빨게 하였던가.
2. 죽기를 바라는 욥(13~19절)
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지금쯤은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잠들어 쉬고 있을 텐데.
14)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거친 터, 폐허 위에 성을 건축하여 세운)
세상 임금들과 모사(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 혹시 그렇지 않다면 금과 은으로 집을 가득 채운
고관(성주, 귀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 또는 낙태되어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땅에 묻혀서 빛을 보지도 못한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도 않은 자가 되었을 것이라.
17) 거기서는 악한 사람들도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못하며,
삶에 지친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18) 거기서는 갇힌 사람들도 다 함께 평화를 누리며,
노예를 부리는 감독자의 호통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19) 거기서는 낮은 자와 높은 자의 구별이 없고
종도 그 주인에게서 놓이느니라(주인에게서 놓여 자유를 얻는 곳이라).
- 거기서는 악한 사람들도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못하며(18~19절) :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삶이 너무나도 괴로운 욥이
죽으면 지금 이 고통의 현실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절망적인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3. 살아있음을 한탄하는 욥(20~26절)
20) 그런데 어찌하여 이 고달픈(비참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괴로운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 이런 사람들은 죽기를 바라도(기다려도) 죽음이 오지 아니하니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땅을 파며 죽음을 구하다가
22) 묘지의 돌만 보여도 반갑고,
마침내 무덤에 이르게 되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의 울타리로 나를 둘러싸서
인생의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인생의 미래가 없이 비탄에 빠진 사람에게)
빛을 주셨는고.
24) 음식을 앞에 놓고서도 나오느니 탄식뿐이요,
나의 앓는 소리가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그것이 내게 임하였고,
내가 무서워하던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내게 일어났구나).
26) 나에게는 평안도 없고 안일(안식, 안정)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고통과 두려움만 있구나.”
- 죽기를 바라도 죽음이 오지 아니하니(21절) :
죽기를 그렇게 바란다면 자살을 하면 될 것이나,
욥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을 권리가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죽게 해 주실 것을 금과 은을 찾는 것보다 더 찾고 구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생명만 주시니
고통스러운 삶이 계속되고 있다며 한탄하는 것입니다.
고통에 울부짖는 한이 있더라도 주께서 내 생명을 거두시기 전까지
결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리하지 않겠다는 결심이기도 합니다.
- 어찌하여 하나님의 울타리로 나를 둘러싸서(23절) :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울타리로 욥을 보호하셨으나,
고통 속에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 하나님의 울타리가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는 원수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 나의 앓는 소리가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다(24절) :
보통 앓는 소리는 ‘끙끙거리는 소리, 신음 소리’로 표현되지만
여기에서는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같이 큰 소리로 울부짖는 것을 가리킵니다.
욥의 앓는 소리가 바다의 파도 소리나 큰 폭포 소리 같다는 것입니다.
* 묵상 point
1. 내가 두려워하던 그것이 나에게 일어나고야 말았구나
1) 그동안의 욥의 신앙의 특징 : 이런 일이 올까 봐 자식들 수대로 번제를 드렸었는데(25절)
이런 재앙이 올까 봐 혹 자녀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했을지 모를 죄를 위해
자녀 수대로 번제를 드렸었는데
그럼에도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동안 욥이 하나님을 섬긴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는 말해 줍니다.
2)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벌과 재앙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전에 욥이 율법을 지켰던 이유는
욥이 지금 당하고 있는 이런 재앙이 올까 두려웠기 때문이었고,
자기 딴에는 열심히 율법을 지켰다고 하지만
혹시 생각지 못한 죄 때문에 재앙이 올까 두려워
자식들 숫자대로 번제까지 드린 것입니다.
욥은 이 모든 일에 빈틈없이 철저히 했으므로 복은 오지 않을지 몰라도
최소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재앙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소유가 사라지고 자식까지 잃게 되는 재앙이 왔더라도
아직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은 아니니 견딜 수 있었습니다.
3) 그러나 그 재앙이 자신의 몸에까지 고통을 받는 데까지 이르게 되자
욥의 신앙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재앙이 자신의 몸에까지 와서 큰 물소리와도 같은 신음 소리를 내고,
어두움의 환상이 보이고 저주의 환청까지 들리는 지경이 되니
욥은 자신에게 오는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의 진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으려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번제도 드렸던 것인데
누가 봐도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고 할만한 재앙이 오니
그동안 그가 했던 모든 신앙의 행위들이 소용없는 것이 되어
욥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 묵상 : 이것은 신앙의 동기가 무엇인지 묻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자는
시련이나 어려움이 닥칠 때 그것을 하나님의 진노로 오해하여
신앙의 자리가 크게 흔들리거나 믿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의 환난을 만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견딜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지, 내 신앙의 기초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신앙의 기초가 되게 하십시오.
2. 욥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울타리가 오히려 욥을 공격하는 것이 되었다.
1) 하나님께 대한 서운함이 복받쳐 오르는 욥(20~26절)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런 재앙이 오고야 말았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을 향한 서운한 감정이 복받쳐 오릅니다.
그러므로 욥은
이렇게 자신에게 재앙을 주실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21절).
2)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의 울타리로 나를 둘러싸서 … 빛을 주셨는고(23절)
그러나 죽음을 달라고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하나님의 빛이 자신에게 오는 것 같습니다.
죽음을 주셨다면 최소한 이런 고통은 더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의 빛이 임하여 고통 중에도 생명이 이어지니
욥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쳐 놓으신 하나님의 보호의 울타리가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날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데
하나님의 빛은 무슨 소용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다 무엇이냐고 절규하는 것입니다.
● 묵상 : 신앙이 좋은 사람들도 때로 욥처럼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삶의 과정에서 이런 아픔과 고통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본문의 욥처럼 내가 느끼는 이 고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면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욥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차라리 죽게 해 줄 것을 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시련과 고통이 나를 압박할 때 하나님은 나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실 만큼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재앙을 당장이라도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그대로 두시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후일 우리는 주께서 왜 그때 나를 고통 가운데 두셨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좋을 때이든지 나쁠 때이든지
변함없이 우리는 항상 주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 신앙의 기초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3. 죽기를 갈망하는 욥의 절규
1) 자신의 생명과 삶의 권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믿는 욥
왜 죽기를 구하고 찾습니까?
그렇게 죽고 싶다면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욥이 스스로 죽는 방법을 몰라서
죽게 해 달라고 이렇게 갈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을 권리가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스스로 죽을 권리가 나에게는 없으니 하나님께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게 하신다면 최소한 자살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과 은을 찾는 것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죽게 해 주실 것을 구합니다.
2) 그러나 그럴수록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욱 빛과 생명을 주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 전혀 고맙지 않습니다(20~23절)
전에는 그에게 빛과 생명을 주시는 것이 감사했는데
지금의 현실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더욱 괴롭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욥은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이 괴로움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규와 고통의 울부짖음 속에서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이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 차라리 욥처럼 하나님 앞에 절규를 하십시오.
그러면 그 절규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절규를 할지언정 절대로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생명일지라도 내가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내 생명에 대한 모든 권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죽이셔도 하나님께서 죽이시고 살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감정을 솔직히 내어놓으십시오.
지금 내 마음이 답답한지 고통스러운지 기쁜지 내 마음을 내어놓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가 내 마음을 잔잔하게 합니다.
4. 죽음은 결코 현실의 아픔을 달래줄 도피처가 아니다.
1) 죽으면 모든 고통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욥(13~19절)
욥은 죽음을 자신에게 평안을 줄 참된 안식처라고 노래합니다.
그곳에는 노예를 부리는 주인들의 고함 소리도 없고,
그곳에는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구분도 없는 곳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욥의 이 고백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은 후에 들어가게 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지금의 현실이 괴로우니 차라리
죽으면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감상적인 고백입니다.
2) 욥이 말한 이런 평안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은 자들에게만 허용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주님 앞에 나아가 심판을 받게 되고.
그 심판의 자리에서 죄의 판결을 받은 자들에게는 결단코 이런 평안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더 큰 고통의 길로 들어가는 멸망의 길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 자들에게는 결코 평안이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죽인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상적인 생각에 스스로 삶을 마감합니다.
많은 사람이 본문의 욥과 같은 감상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고 있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본문의 욥처럼
죽으면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감상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당장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버리십시오.
자살한 자는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죽였으니
생명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권세를 침탈한 것입니다.
또 자기 자신의 생명을 죽인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했으니
이런 자는 100%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단 죽으면
다시 이 땅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죽음 후의 삶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그런 삶을 평생이 아니라 영원토록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길을 걸은 것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며 죽음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이 땅에서의 문제는 이 땅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죽기 전에 내가 심판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인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일단 죽고 나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 기도제목
1. 현실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어리석음을 결단코 범하지 말게 하옵소서.
2. 지금도 주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의심하지 말게 하옵소서.
3. 우리의 신앙의 기초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채워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