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문화사(18)-공주(公州)
충청남도 중앙 부분에 있는 공주는 구석기 시기의 집터, 석기, 토기 등의 유물이 발견될 정도로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지역이다. 공주 지역이 우리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 시점은 백제의 도읍지로 정해지면서부터이다. 한강 유역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 남쪽으로 도읍지를 옮길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한강 유역에서 웅천(공주)으로 천도한 서기 475년부터 부여로 다시 옮긴 538년까지 63년 동안 공주는 백제의 도읍지였다.
역사로 기록된 공주의 첫 지명은 백제에서 정한 웅천(熊川)이었다.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한 이후에는 소정방(蘇定方)이 웅진(熊津)으로 고쳐서 웅진도독부를 두었다. 그 뒤 신라가 땅을 되찾은 뒤에 웅천주(熊川州)로 고쳤다가 경덕왕 때인 757년에 웅주(熊州)로 다시 고쳤다. 신라의 항복을 받아 고려가 한반도의 주인이 된 뒤 태조 왕건(王建)은 이 지역을 공주로 고쳤다. 조선 인조 때에는 공산(公山)으로 잠시 바꾸었다가 다시 공주로 돌려서 지금까지 그 땅이름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공주의 땅이름에서는 ‘熊(곰 웅)’이 중심을 이루고 ‘公(공평할 공)’이 부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川(내 천), 州(고을 주), 津(나루 진)은 모두 사람들이 모여서 살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하므로 고을, 혹은 도시라는 공통된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熊’과 ‘公’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이 지역의 땅이름이 가지는 문화사적 의미와 가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熊’은 다리가 굵고 짧으면서 머리와 몸집은 매우 크고 살찐 짐승으로 깊은 산에 사는 곰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곰이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존재여서 그런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동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의 공주 지역에는 ‘곰’, 혹은 ‘고마’라는 말과 연관을 가진 명칭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熊이라는 글자가 지닌 뜻을 꼼꼼히 살펴보면 과연 곰이라는 뜻으로 熊을 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왜냐하면 백제라는 나라와 곰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곰이라는 짐승을 나타내는 글자는 원래 ‘能(능할 능)’이었다. ‘能’은 곰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자(象形字)인데, 글자의 왼쪽 윗부분은 곰의 머리, 아래는 몸뚱이를 나타낸다. 글자의 오른쪽은 곰의 다리를 그린 것이다. 그래서 이 글자는 원래 곰이라는 뜻을 기본으로 했다. 곰은 매우 현명하고 재주가 많으며(賢能) 굳세고 위엄(彊壯)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후대로 오면서 능력이 있는, 재주가 많은 것을 의미하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었다.
‘能’이 원래의 뜻에서 벗어나 다른 뜻으로 쓰이게 되자 곰을 지칭하는 글자가 필요했는데, 맨 아래에 ‘灬(불 화)’를 넣어서 만든 ‘熊’이었다. 곰은 몸속에 많은 열을 가지고 있어서 추위를 잘 견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能’에 ‘火’를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熊’이 곰을 지칭하게 되면서 이 글자가 가지는 뜻이 점차 확대되었는데, 불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처럼 기세가 장엄함, 남성적인, 아름다운, 제왕, 임금, 존칭 등의 의미로도 쓰이게 되었다. 이런 뜻은 모두 곰의 모양과 성질을 바탕으로 하여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의 발전을 추구했던 백제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임금이 죽임을 당하는 치욕을 겪은 후 옮긴 도읍지가 공주 지역이었으니 이곳에 붙였을 땅이름 역시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연관 지어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땅에 떨어진 백제 왕실의 권위와 나라의 자존심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군주가 백성을 다스리는 도읍의 땅이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선택된 것이 ‘熊’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제시대의 지명이었던 웅천(熊川)은 ‘왕의 고을’, 혹은 ‘신의 고을’이라는 지역으로 되면서 백제의 서울(京都)이라는 뜻이 된다. 그 뒤의 지명인 웅진(熊津), 웅천주(熊川州), 웅주(熊州) 등도 모두 이런 의미가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고려가 건국하면서 땅이름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신라의 항복을 받아 고려를 건국하고 한반도의 주인이 된 왕건(王建)은 웅주라는 지명을 없애고 공주(公州)로 바꾸었다. 조선 시대에는 잠시 공산(公山)으로 한 적이 있었으나 다시 공주로 바꾸어서 지금까지 법정 지명으로 쓰이고 있다. 1530년에 국가에서 편찬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656년에 유형원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등에서는 산의 모양이 ‘公(공평할 공)’처럼 생겼다고 하여 공산이라 이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려 태조가 웅주를 공주로 바꾼 것도 이런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왕건이 후손들에게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 공주 강(錦江) 바깥쪽의 사람들은 절대로 등용하지 말 것을 강조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태조는 이 지역을 결코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왕이 있는 지역이라는 뜻을 가진 웅천(熊川)이란 땅이름을 없애고 그보다는 격이 낮은 제후(諸侯)가 사는 지역이라는 뜻을 가진 공주로 바꾸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공주라는 이름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와는 관계없이 공주 지역은 ‘임금이 계시는 곳’이라는 뜻을 기본으로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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