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가 있는 그림 한 점
푸른 그림 앞에 섰다. 그림은 하버 브리지가 캔버스 중앙을 가르고, 하늘과 바다가 온통 검푸른 빛깔로 덮여 있는 조금은 우울한 느낌의 유화이다. 구도가 어딘지 모르게 빼딱하고 붓 터치가 거칠다. 교각에 부딪혀 올라오는 물살에는 여러 번의 붓질이 지나갔는지 물감의 두께가 그대로 보인다. 이렇듯 어설픈 그림인데도 나는 화폭 전체를 감싸고 도는 짙은 블루에 끌려 그림 앞에 자주 서게 된다.
그림은 우리 집 다이닝룸 조금 구석진 자리에 걸려 있다. 중앙 자리에서 밀려난 이유는 은연중에 나만 아껴 보고 싶은 마음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그림만큼은 나만의, 오로지 나만의 그림으로 간직하고 싶은 바람이 컸으니까.
나는 이 그림을 십 수 년 전에 아들에게서 받았다. 정확히 말해 아들이 9학년 되던 해에 직접 그려준 작품이다. 사실 처음부터 내게 주려고 작정하고 그린 그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위한 작품이라고 내 마음대로 정해 버렸다. 오일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신생아 같은 그림을 내 품에 안겨 준 것도 사실이고, 거금을 들여 표구해서 내 집에 걸어 놓은 것도 나이니 그렇게 틀린 주장만은 아닐 듯싶다.
당시 아이는 학교에서 진로상담을 한 후에 느닷없이 건축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말을 들어보니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현장 소장의 모습쯤을 꿈꾸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건축학은 예술성이 받침이 되어야만 하는 분야였다. 아이는 쓰거나 그리는 일에는 젬병이었다. 건축학은 어쩐지 불안했다.
호주에 머무는 가장 큰 이유가 아이들 교육이라면 평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갈림길에서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고민 끝에 아이에게 진로를 건축학으로 정하기 전에 먼저 그림을 그려 보자고 제안했다. 아이는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나는 광고 잡지를 뒤져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교민이 운영하는 화실을 찾아냈다. 그렇게 되어 아들의 그림 공부 면담을 위해 화실 계단을 밟게 된 것이었다.
선생님은 인도 델리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미술 학원을 시작한 젊은 남자 화백이었다. 한눈에 봐도 코흘리개 아이들 그림이나 봐줄 포스는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화 중에 그가 한국 미술계의 거장 박수근의 손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박수근이 누구인가. 소설가 박완서의 데뷔작 <나목>의 주인공인 ‘옥희도’의 실제 모델이 아니던가. ‘나목’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투명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황폐함 속에서도 진정한 예술혼을 추구했던 그들의 절절한 내면이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당대 대표적인 문화 아이콘이었던 두 거장의 자취를 시드니 후미진 거리에 있는 조그만 화실에서 만난 것에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박수근에 대한 뒷이야기로 면담 시간을 다 채웠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거세되었던 문학에의 촉들이 내 몸 어딘가에서 삐죽삐죽 올라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아이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빠지지 않고 화실 문을 두드렸다. 주로 아이를 내려놓고 눈인사만 하고 오는 정도였지만 그때마다 비밀스러운 교감이라도 하듯 내 심박은 거칠게 빨라졌다.
화실로 오르던 계단은 나를 진로로 고민하던 여고 시절로 돌려놓곤 했다. 당시 나는 법대나 교대를 가야 하는 학생이었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세뇌 당하듯 결정되어 있던 부모님이 정해준 내 진로였다. 그러나 내 꿈은 따로 있었다. 내색하지 못해 누름돌에 눌린 오이지처럼 쪼그라져 있던 진짜 내 꿈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미대를 가겠다는 나를 향해 아버지는 협박에 가까운 설득을 했고, 그 합일점이 내 두 번째 꿈이던 국문학이 된 셈이었다.
화실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소품 그리기를 벗어나 20호짜리 그림으로 들어간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아이는 정말로 완성된 작품을 들고 나타났다. 그림을 받아드는데 색감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놀랐다. 내 아이가 그린 것이라고 하기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분위기의 작품이었다.
그것은 ‘블루’였다. 어두운 톤의 블루가 섬광처럼 훅하고 화폭에서 뛰쳐나와 마음 한쪽을 덮쳤다. 나는 이런 종류의 느낌을 전에도 받은 적이 있었다. 헤어진 지 오래된 첫사랑의 목소리를 전화선을 통해 들었을 때였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리에서 시작에서 아랫도리를 타고 목울대까지 크레센토로 올라오던 쿵쾅거림, 바로 그것이었다. 하버 브리지를 그렸다는 그림에서 박완서와 박수근 그리고 내 첫사랑이 한데 어울려 너울거렸다. 놀란 나는 선생님이 얼마나 도와주었냐고 아이를 추궁했다. 아들은 거의 자기가 했다고 당당히 말하면서 내가 모르던 정보를 흘렸다.
선생님의 아버지, 그러니까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 화백이 아이의 그림을 보고는 블루 색조를 너무 잘 냈다며 질감을 위해 덧칠하는 법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언젠가 ‘박수근의 열십자 터치’까지 터득했다고 밝히던 박성남 화백의 인터뷰가 어렴풋이 생각났다.
면담이 있던 날, 할아버지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내게 전해주던 젊은 화가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박수근의 2세라는 굴레를 안고 자신의 그림을 불태워야만 했다던, 호주에 와서 레스토랑 허드렛일과 청소를 하면서 생계형 예술인으로 살고 있다던, 불운의 화가 박성남.
그림에서 고단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피붙이를 부양하는 가장으로 살아야만 했던 3대의 가난한 예술인들이 내는 혼의 소리, 그것은 ‘포월抱越’이었다. 박성남 화가 일생의 철학으로 삼았던 ‘품에 안고 넘는다’, ‘포함하여 초월한다’는 뜻의 묵직한 화두가 푸른 빛을 타고 넘실거렸다. 그것은 오로지 지나간 세월을 안고 자기만의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거친 질감의 열병 같은 꿈이었다. 그리고 사라져 버린 젊은 날의 초상화를 안고 걸어가고 있는 내 푸르렀던 날의 꿈이기도 했다.
두 화가가 걸어가고 있는 예술 세계의 고단함을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엄마의 눈치 때문이었을까. 아들은 이 그림을 내게 안겨 주고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다만 나만이 아이의 마지막 작품이 된 그림 앞에서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내 젊은 날의 검푸른 이야기에 종종 빠져들곤 하는 것이다.
*박성남, 박진홍 화가는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글 중 개인에 관한 부분은 가족에게 허가를 받은 내용임을 밝혀둔다.
유금란 / 시드니에 거주하면서 수필과 시를 쓰고 있다. 산문집으로 <시드니에 바람을 걸다>, 해외 5인 공저 <바다 건너 당신>이 있다. 재외동포문학상, 동주해외신인상 수상. <문학과 시드니>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