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7세부터 동아기독교회에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어머니의 신앙 덕분이었다. 그 때 나는 신앙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가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이 교회가 바로 부여군 양화면 원당리에 있는 원당침례교회다. 원당교회는 1905년에 강경에서 전도하던 침례교선교사 스테드만(F. W. Steadman)의 전도를 받은 정성교(鄭成敎) 씨와 최미리암(최종석 목사 조모) 성도가 주축이 되어 세워졌다. 그리고 최미리암의 남편 최원여(崔元汝) 씨가 교회를 돌보았다.
그 후 원당교회는 최초로 침례를 받은 김치화(金致化) 씨가 목회를 하였다. 그와 함께 침례를 받은 고내수(高乃秀) 성도는 같은 면에 있는 초왕리(草旺里)에서 1901년 교회를 개척했다. 스테드만 선교사가 한국 선교를 철수하고 돌아가자, 고씨는 군산(群山)에 주재하고 있는 남장로회 선교부에 연락하여 그 교회를 장로교로 예속시켰다. 그 후 교회는 300여 명으로 부흥하면서 지금의 오량리(五良里)로 이전했다. 그래서 양화면에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원당교회와 오량교회 두 곳 뿐이다.
어린 시절, 나는 교회라는 새로운 분위기와 생활에 흥미가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당시 원당교회는 어린이를 위한 주일학교가 없었다. 처음부터 어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고, 지루해도 끝까지 참고 예배를 드렸다. 예배당 구조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예배당 중앙에 흰 휘장이 있었고, 그것을 기준으로 남녀가 분리되어 예배를 드렸다. 강단에서는 양쪽을 다 볼 수 있었지만, 교인들 남녀 간에는 서로 볼 수 없었다. 예배당 들어가는 문도 양쪽으로 쪽문을 만들어 놓고, 남자가 들어가는 문과 여자가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었다.
예배는 일주일에 주일 낮과 밤, 그리고 삼일(수요일) 밤, 이렇게 세 차례 드렸다. 나는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밤예배에서 대표기도가 길어지면 기도가 끝나기 전에 잠이 든 적도 있었다. 찬송을 부르고 배우는 일은 내게 무엇보다도 큰 기쁨이었다.
해마다 성탄절이 돌아오면 교회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떡과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교인들은 교회당 건물 처마 밑에 줄을 지어 돌아가며 각각 등불에 자기 이름을 써서 붙였다. 특히 성탄절의 새벽송은 어린 마음에 아주 신기하고 재미있는 하나의 놀이였다. 새벽 2시경에 시작하여 6시가 넘도록 교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복음찬미 제19장을 지정곡으로 불렀다. 찬송을 부르며 성도들의 가정을 찾아다녔다. 흰 눈이 펄펄 내릴 때도 있었다. 평소에 교회에 나오지 않던 아이들도 성탄절만큼은 교회에 몰려와 떡을 함께 먹었다. 어렸을 때만 해도 전 가족이 다 믿는 가정은 흔치 않았다. 그래서 부인만 나오는 분들에게는 “짝믿음”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일찍이 믿는 도리를 깨달은 뒤부터 금주하셨고, 모든 제사를 중지하셨으며, 교회 일에 열심을 내셨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금주단연(禁酒斷煙), 즉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오랫동안 유교문화권에서 뿌리 내렸던 관습인 예의범절이 기독교문화와 달랐고, 특히 제사제도를 폐지해야 하는 점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봉건적인 완고한 가문에서 기독교인이 되면 심한 핍박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종중(宗中)으로부터 축출당하는 일까지 감수해야 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수 있었다. 그 반면에 믿는 사람들끼리는 세상일가 친척보다 더 가까운 유대를 맺게 해주었다. 핍박이 있으면 반비례로 그 믿음은 더욱 굳건해지는 법이다.
그 당시에는 새벽기도회도 없었고, 금요가정예배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부흥회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편단심 주님을 믿는 열정은 대단했다. 어떤 이는 믿지 않는 남편의 심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갔다. 이런 일들을 바라보며 어린 나의 가슴 속에도 믿는 사람들의 또 다른 세계가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세상과 합하지 않는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