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승천과 강림 사이, 선민의 기도자리>의 줄거리: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120명이 모인 마가 다락방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땅에 태어난 요람이 됩니다. 교회의 모체가 된 이 모임은 기도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모든 교인과 성도가 드려야 할 기도의 성격을 결정 짓게 됩니다. 즉 기도란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님의 강림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인 겁니다.
승천과 강림 사이, 선민의 기도 자리
(사도행전 1장 12절~14절)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승천과 강림 사이, 선민의 기도 자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승천과 강림 사이, 선민의 기도 자리’
제목은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님의 강림 사이가 선민이 기도하는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주어져 있는 물리적 상황, 환경적인 조건과는 무관하게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기도가 이루어지는 자리는 승천과 강림 사이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릴지라도 이방인의 입장 혹은 종교인의 입장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이자 예수님을 믿는 성도이며 교인으로써 기도를 드리고자 한다면 언제나 예수님의 승천하심과 성령님의 강림하심 사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린 기도의 응답은 성령님의 강림으로만 주어지게 됩니다.
오늘 기도를 드리든 내일 기도를 드리든 10년 뒤에 기도를 드리든 어떤 상황에서 기도를 드리든 기도는 승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하며 그 기도의 유일한 응답은 성령강림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삶의 특정한 문제해결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응답을 바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기도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며 종교인의 상태에서 드리는 종교적 기도입니다. 우리는 인격적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향한 복음적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기도의 응답은 성령강림으로만 주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말씀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입니다. 6절에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백이십 문도는 외부세계와 차단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때의 백이십 문도는 아직 교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추종자의 상태였습니다. 아직 성령강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어떠한 기도를 드렸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에 앞서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성령강림을 기대하며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들이 드렸던 기도내용의 전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기도는 단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하나를 위한 전단계로서의 기도가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이루어지고 난 후로는 언급할 의미가 없는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선민이 특별히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고 다락방에서 기도한다는 말씀처럼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여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도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여 기도를 드립니다. 회사에서 정 바쁠 때는 화장실에 가서라도 기도를 드리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여 드리는 모든 기도의 성격을 결정해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승천하심과 성령강림 사이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며, 기도의 유일한 응답은 반드시 성령강림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는 언어와 문화와 풍습이 다른 나라와 민족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각자가 서로 다른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환경적으로 똑같은 상황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 문제가 심각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돈 문제가 심각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 문제가 심각할 수 있습니다. 또 직장 내에서는 승진이 문제가 될 수 있고, 국가적 차원에서는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재난 등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상황에 맞추어 기도의 내용 또한 달라져야 할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기도의 내용은 결코 달라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선민입니다. 이러한 선민이 구분된 시간과 장소에서 기도할 때에 바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나라와 민족의 상황도 아니며 개인적 상황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언제나 승천하신 예수님 뒤에 남겨진 사람으로서 성령님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환경적인 차이가 기도의 내용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선민의 기도는 항상 동일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구분하여 기도를 드린다면 10분을 드리든 30분을 드리든 한 시간을 드리든 언제나 승천과 강림 사이에서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 점을 잊어버리고 이 자리를 벗어나는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이며 종교인의 기도로 전락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만 성령 충만은 지속되는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 기도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다락방기도 전에는 예수님의 승천 사건이 있었고 후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게 됩니다. 이 상황은 우리의 삶에서도 하루에 몇 번씩 반복됩니다. 승천하신 예수님 뒤에 남겨진 제자들은 승천의 길을 따라 성령님이 강림하실 것을 전제로 삼아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선민들이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해야 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상황은 이것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기도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이 상황에 비추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은 세상에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령강림을 바라며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전처럼 조국의 독립이나 장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을 기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을 떠나신 예수님을 본 사람으로서의 기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제자들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상태에서 세상 문제를 붙들고 기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때에 끊임없이 반복하신 말씀은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마음을 드려서 따르고 좇아야 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종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특성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문제에 매여 있는 상태에서 종교를 통해 신을 자신에게로 부르고자 합니다. 신을 이 세상으로 끌어들이고자 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신이 나를 따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공생애 때의 제자들은 몸으로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것은 온전한 따름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목적지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라의 독립과 번영과 개인의 영달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심으로서 세상을 빠져나가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는 아예 하늘로 승천해버리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는 공생애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릴 수 있는 기도의 내용도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안에 있는 문제해결을 향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러하신 예수님을 따르며 문제해결이나 형통과 번영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는 기대이며 제자들이 가졌던 오해이기도 하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자들은 나라의 독립과 번영 그리고 개인의 영달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실 줄 알았던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뒤에 남은 자들이 됨으로써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왜 이 땅에 오셔야 했고,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셨는지, 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과정을 이루셔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승천을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번영을 이루실 것이라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 꿈꾸던 미래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따라야 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올라가신 길을 통해서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꿈꿀 수 있는 것은 미래의 번영이나 성공이 아닌 승천하신 길을 따라 내려오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예수 믿는 사람들의 유일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미래를 위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문제해결을 위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문제해결을 목적지로 삼으셨던 적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또한 이 세상의 문제해결을 목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부부 문제, 자녀 문제, 취직 문제 등을 비롯한 숱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이러한 문제해결과는 아무 연관성이 없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기도로는 오직 성령의 강림을 간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문제해결을 하시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이 세상의 문제해결을 기대하며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성령강림이란 무엇이며, 왜 성령강림이 기도의 유일한 응답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기도할 때 성령님은 내려오시게 됩니다. 이 성령강림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드릴 수백, 수천만 번의 모든 기도에 대한 유일한 응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승천과 강림 사이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강림이 기도의 응답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의 구조를 염두에 두면 좋습니다.
하늘에는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내가 지금 살고 있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삼라만상이 이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주권에 저항합니다. 스스로 주권자가 되어서 세상일에 대해 생각하면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있는 분이시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있게 된 것들입니다. 인간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다만 인간은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이 생기는 마음을 갖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있음의 느낌을 가질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존재감을 먼저 느끼게 되면서 좋음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염두에 둔다면 세상은 문제로 삼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직장 문제, 인간관계 문제, 결혼 문제는 본래 문제가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고 땅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흐르는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늘과 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적하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 대적하는 상태만 고쳐지면 삶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문제가 생겨도 진짜 문제는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추구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땅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에 맞서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성령님이 강림하시면 나의 마음이 성령님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게 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추구하게 됩니다. 마음이 본래의 상태로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을 장갑으로 끼시는 주체가 되어주십니다. 성령님이 주체가 되셔서 하나님의 주권적 뜻을 받들어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이 오심으로써 일어나는 일은 하늘을 향하여 땅을 향하여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이러하시기에 성령강림이 기도의 응답인 것입니다.
이로부터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백이십 문도의 기도내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먼저 회개기도와 성령강림을 위한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이 회개기도와 성령강림을 위한 기도가 합쳐진 것이 바로 주기도입니다.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여 드리는 모든 기도는 승천하신 예수님과 성령강림 사이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상 세상 문제를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나는 세상을 붙잡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른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회개기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또 회개는 나로 인해 망쳐진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에 대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될 사람이 이 땅에 남아서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의 확신을 가지고 추구하며 소원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주권적 생각과 계획은 망쳐지고 방해받았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주기도에 대해 살펴볼 때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에서 “그러므로”라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주시기에 앞서 외식하는 자들과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는 자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외식이란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으로는 세상을 추구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 채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해야 할 유일한 대상이십니다. 제자들 또한 이 문제에서 걸려 넘어졌기에 회개기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중언부언하는 것은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권자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대해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계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별도로 생각과 계획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하나님의 주권적 뜻을 품고 계신 성령님께서 오셔서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시면서 해결이 됩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감각기관이 되어주시고, 이 땅을 향해서는 지정의와 언행을 장악하시는 삶의 주체가 되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성령강림을 통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실제 기도를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 있는 것들의 존재감을 아버지보다 먼저 느끼며 좋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결과 마음으로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소원하며 살았습니다. 또 이 땅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생각과 뜻이 미치지 않는 곳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추구함으로써 아버지의 주권적 생각과 계획을 방해하였습니다. 이런 나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길을 따라 성령께서 내게 오셔서 오직 나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는 상태가 되게 해주시고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주권에 맞물리는 첫 번째 톱니바퀴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지정의와 언행을 오직 성령께서 장갑 삼아 주심으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진행되어가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이 일만을 할 수 있기 위해서 밥 먹고 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이 뜻하는 대로 아버지 외에 다른 대상으로부터 있음의 느낌과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는 죄적 체질을 회개하고, 아버지의 주권의 방해자였음을 회개하며, 이러한 나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바라보고 그 주님의 죽으심이 곧 나의 죽음인 것을 인정하며, 언제 어디서든지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기억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성령님은 오십니다. 그럴 때에 마음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과 좋음의 대상으로 느껴서 소원하게 되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문제로 여겨지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의 해결을 목적으로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기도로는 성령강림이라는 진정한 응답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성령강림이고, 성령강림이 응답으로 주어지는 기도의 자리는 승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릴 때입니다. 승천의 그 길을 따라 성령은 강림하십니다. 승천의 길은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삶의 자리를 떠나는 마음가짐으로 기도하며 살아갈 때 성령강림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때와 장소에 맞는 신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회사에서는 사장이나 부장일 수 있고, 가정에서는 엄마이고 아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신분에 앞서서 먼저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것을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자리는 언제나 십자가입니다. 이렇게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자리로 찾고 기억하고 붙잡을 때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님과의 동일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의 의식으로 붙잡는 동일시와 성령이 오셔서 이루어지는 동일시의 차이는 나의 동일시가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라면 성령님께서 오심으로 나타나는 동일시는 실제로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의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죽은 자처럼 이 세상의 대상들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며 소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적 체질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의식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죽음의 효과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동일시하게 하십니다. 나는 죽은 자이며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의 자리가 나의 자리라는 의식의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사람에게 성령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실제 죽음의 효과가 나타나게 하시고 부활의 효과가 나타나게 하시고 승천의 효과가 나타나게 해주십니다.
기도는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 뒤에 남은 자리에서 승천의 길을 따라서 내려오실 성령님을 기다리며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기 위해서 의식으로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그러므로”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하나님보다 세상 것을 좋아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세상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방해한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십자가를 붙잡은 자로서 성령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나의 마음에서 아버지의 이름만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아버지만을 소원하는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이 뜻하는 대로 외식과 중언부언이 뜻하는 바를 주님의 십자가와 연결시켜 기도합니다. 외식하는 것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방해하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성령님께서 오실 수 있습니다. 이 틀에서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실제로 성령강림을 응답으로 받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셔서 하늘을 향하여 땅을 향하여 자유와 해방과 탈출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사오니 기도하는 교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 승천과 강림 사이에서 기도하는 자가 됨으로써 성령강림을 응답으로 받아서 하늘을 향하여 땅을 향하여 진리가 실현될 수 있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