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3대 기녀 시인 설죽 서문
이원걸(문학박사)
설죽雪竹은 경북 봉화 유곡에서 태어나 충재冲齋권벌權橃(1487-1547)의 손자 석천石泉 권래權來(1562-1617)의 여종으로 태어났다. 아리따운 미모· 재치 있는 말솜씨·글재주·가창력이 뛰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녀의 재주를 아낀 석천 집안 어른들은 그에게 틈틈이 시와 문장을 짓는 방법을 가르쳤다.
충재의 후손들은 설죽 사후, 그녀의 시를 모아 권상원權尙遠(1571-?)의 백운자시고白雲子詩稿 말미에 필사해 두어 주옥같은 설죽의 시 166수가 전해지게 되었다. 최근 이원걸 박사가 그동안 ‘한국여류한시사’에서 작자 미상으로 남았던 「백마강회고白馬江懷古」 시의 작가가 설죽임을 학계에 최초로 소개했다.이로써 설죽이 남긴 시는 모두 167수로 확정된다.
설죽은 주체적 생을 선택하여 예인의 길로 나서 석전石田 성로成輅(1550-1616)의 계실繼室이 되어 10년 동안 한양에서 살았다. 성로가 죽자,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20년 동안 기녀 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이후, 한양 등지에서 명사들과 교유하다가 만년에 고향 석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다. 설죽은 황진이黃眞伊-매창梅窓 다음 가는 여류 시인으로 문헌상 확증되었기에 ‘조선 3대 기녀 시인’으로 공인된다.
‘눈 맞은 대나무[雪竹]’의 의미를 간파해내야 한다. 설죽에게 ‘눈’의 이미지는 ‘순백’과 ‘낭만’이 아니라, ‘신분 제약’과 예술 재능의 발산을 저해하는 ‘시대 장벽’이었다. 설죽은 그녀의 삶 전체를 짓누르는 ‘눈’의 무게를 이겨내야만 했다. 설죽은 강인한 정신력으로 시대의 아픔과 신분 제한의 통증을 견뎌내고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교유하며 예술적 경지를 독자적으로 개척해나갔다.
설죽은 봉화 출신 천재 여류 시인이다. 다양한 설죽 문화 컨텐츠 개발 사업과 스토리텔링 활성화로 설죽의 예술적 생명을 살려내야 한다. 그녀의 내밀한 아픔을 헤아리고 탁월한 문학적 감성을 재현해내는 설죽문학관·설죽 테마공원 건립·실경 뮤지컬 공연 등 다채로운 후속 사업이 활발히 이어지길 기대한다. 설죽의 천부적 예술성을 기리는 ‘봉화예총’의 일곱번 째 ‘설죽 사랑 운동(설죽예술제)’이 설죽 문학의 만개를 위한 밑거름이 되리라 믿으며 찬사를 보낸다.
사촌 동생 초선의 죽음을 슬퍼하며
부평초
쑥대 같이
떠도는 신세
몇 년간
너랑 함께 지냈지.
어느 산
어디쯤
무덤 만들었으니
젖먹이 울음
양친의 애통하는
울음소리 구슬퍼라.
輓從弟楚仙 만종제초선
身似浮萍迹似蓬 신사부평적사봉
幾年甘苦與君同 기년감고여군동
何山何處爲松土 하산하처위송토
乳子雙親哭未窮 유자쌍친곡미궁
백마강 황 좌랑 정자에서 안 첨지에게 차운하며 두 수(1)
정자 아래
긴 백마강 맑은데
고깃배 오가며
물에 비친
달그림자 흔드네.
은잔 가득
자하주 마시고
취한 터에
호숫가 산에서
피리 소리
들려오네.
白馬江黃佐郞亭子次安僉知二首(一) 백마강황좌랑정자차안첨지이수(일)
亭下長江萬里淸 정하장강만리청
漁舟來往壓空明 어주래왕압공명
銀鍾滿酌紫霞酒 은종만작자하주
醉聽湖山吹笛聲 취청호산취적성
* 紫霞酒 : 신선이 마시는 술
* 佐郞 : 조선조 六曹에 소속된 從五品官
백마강 황 좌랑 정자에서 안 첨지에게 차운하며두 수(2)
물결 잔잔하여
언덕까지 맑은데
들쭉날쭉한
푸른 산이
호수에
산뜻하게 비쳐요.
팔월의
성엔
매화가 지고
높은 누각에
피리 소리 들려옵니다.
白馬江黃佐郞亭子次安僉知二首(二) 백마강황좌랑정자차안첨지이수(이)
千頃波平溢岸淸 천경파평일안청
碧山高下鏡中明 벽산고하경중명
江城八月梅花落 강성팔월매화락
人在危樓弄笛聲 인재위루롱적성
독수공방 여인의 노래
향로엔
가벼운 향기
피어오르고
양대엔
구름 걷혀
비가 그쳤어요.
주렴 내리고
병풍에 기대니
어여삐
기울던 달만
울고 있는
저를
빤히 내려다보네요.
空閨怨詞 공규원사
玉鴨輕飄香一縷 옥압경표향일루
陽臺雲散難行雨 양대운산난행우
珠簾却下倚空屛 주렴각하의공병
落月多情窺怨淚 락월다정규원루
완산 동각에서 밤에 고향이 그리워
벌레 소리
멈추자
등잔불도 꺼지고
주렴은
흐릿하게
새벽안개 가르네.
그리운
고향 땅 어디일까.
하늘의
반달이
창가를 떠 있어요.
完山東閣夜宿憶鄕 완산동각야숙억향
土蟲消盡暗缸花 토충소진암항화
簾幕依俙隔曉霞 염막의희격효하
鄕國不知何處是 향국부지하처시
半窓殘月在天涯 반창잔월재천애
* 缸花 : 등잔불
* 依稀 : 어렴풋함
잠에서 깨어나
잠에서
깨어보니
해는
이미 기울고
어여쁜 계단에
석류화 피었어요.
꾀꼬리
울어주어
수심 풀어졌대도
두 줄기 눈물에
옷소매
다 젖어버렸어요.
睡起 수기
睡起紗窓日影斜 수기사창일영사
玉階新發石榴花 옥계신발석류화
黃鶯却喚淸愁去 황앵각환청수거
紅淚雙雙濕越羅 홍루쌍쌍습월라
칠송의 ‘등만경대운’에 차운하며
우뚝 솟은 성이
긴 강을
누르고
하늘 찌를 듯한
누대는 까마득하여라.
풀 위의
구름 산은
비단결 같고
풍류의 나그넨
신선 같구나.
次七松登萬景臺韻 차칠송등만경대운
層城千仞壓長川 층성천인압장천
天襯危樓縹緲邊 천친위루표묘변
草頭雲山如錦裏 초두운산여금리
風流遊子似神仙 풍류유자사신선
완산 객사에서 잘 때 피리 소리 듣고
피리 소리에
원망이
가득 담겼고
밤중의 창가엔
달이
기울어요.
매화곡
연주하지 말아요.
외로운
제 마음을
다 태우니까요.
完山客枕聞笛聲 완산객침문적성
逐奏龍吟怨思長 축주용음원사장
月斜窓外夜中央 월사창외야중앙
遊人莫弄梅花曲 유인막롱매화곡
獨妾天涯易斷腸 독첩천애역단장
* 完山 : 전북 전주의 옛 지명
차운한 시
벽도화 그림자
고운 난간에
한들거리고
천년의 누대엔
해와 달이
한가롭네.
마을의 사립문엔
멍멍이 짖고
구화산 신선이
구름타고
내려오시네.
次韻 차운
碧桃花影弄株欗 벽도화영롱주란
千載瓊樓日月閑 천재경루일월한
玉洞金屝聞犬吠 옥동금비문견폐
九華仙子下雲間 구화선자하운간
* 九華山 : 중국 안휘성 靑陽縣 서남쪽에 있는 산
완산 관아에서 고향 그리워
빈 집에서
잠 깨어
병풍에 의지하니
고향 소식 그리운데
기러기
날아가네.
타향의 내 마음
그 누가
알아줄까요.
안개비
쓸쓸히 내려
뜰을
어둡게 하여라.
在完山衙館憶鄕 재완산아관억향
夢覺空齋獨依屛 몽각공재독의병
鄕山消息鴈催翎 향산소식안최령
誰知今日天涯意 수지금일천애의
烟雨蕭蕭暗黃庭 연우소소암황정
초가을
비 온 뒤
서늘한 바람에
새벽 기운
걷히고
우물가 오동나무
뜰의 대나무
가을을 알려와요.
구름 걷히자
하늘은
청명한데
달 밝은
밤에
혼자서
누대에 올라요.
初秋 초추
雨後風凉曙氣收 우후풍량서기수
井梧庭竹報新秋 정오정죽보신추
浮雲散盡天如洗 부운산진천여세
月白淸宵人倚樓 월백청소인의루
운봉 태수님께
그대와 함께
유쾌히
취하길 기약해 마셔서
술동이 앞에서
두건을
거꾸로 쓰신 것도 모르셨지요.
밤 깊어
객도 흩어지고
술도 깨어
다시
쇠잔한 촛불 마주해
시를 지어봅니다.
寄雲峰太守 기운봉태수
淸遊取醉共君期 청유취취공군기
不省樽前倒接羅 불성준전도접라
客散酒醒深夜後 객산주성심야후
更對殘燭獨吟詩 갱대잔촉독음시
* 雲峰 : 조선조 전북 남원군 雲峰縣
* 接羅 : 두건
운성의 늦가을
성에
서리 내리자
초목이 시들고
하늘엔
찬 기운 돌며
서풍이 불어요.
쓸쓸한
가을 산에
태양이 기울고
고향 그리운 마음
날 저물자
더욱 심해집니다.
雲城暮秋卽事 운성모추즉사
霜落荒城草樹空 상락황성초수공
碧天寒氣送西風 벽천한기송서풍
秋山瘦影含殘日 추산수영함잔일
故國歸心逐暮紅 고국귀심축모홍
* 雲城 : 전북 남원군 雲峰縣
* 故國歸心逐暮鴉을 운에 맞게 故國歸心逐暮紅으로 바로 잡음
운성 산사에서 밤에 읊음
쓸쓸히 낙엽 져
가을이 다해가고
오경 무렵
기러기
울며 날아갑니다.
밝은 달빛
고향 그리는
제 마음
아랑곳 않고
다시
산창에 비쳐
수심을 더해요.
雲城山舍夜吟 운성산사야음
木葉蕭蕭欲盡秋 목엽소소욕진추
數聲歸鴈五更頭 수성귀안오경두
月光不解多鄕思 월광불해다향사
更照山窓別作愁 갱조산창별작수
서문/한시 번역
이원걸
경북 안동 출생
문학박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 박사 과정에서 한국한문학 전공
안동대학교 국학부 강사 역임
봉화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역임
안동문화원 향사사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