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왕궁리유적을 찾았다
날씨가 겨울답지 않게 포근 따스하고 넓은 잔디밭의 왕궁리 유적을 산책하자니 마음이 펑 뚫린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한 왕궁리유적은 백제 30대 무왕(600 ~ 641)대에 조성되어 그 후 사찰로 변화했다.
백제 말기 익산 경영과정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왕궁으로 사비(부여)와 함께 복도로 이해하고 있다. 백제 왕궁은 용화산에서 발원한 능선 끝자락의 낮은 구릉 위에 조성되었다.
이 때부터 백제에서 불교는 왕과 버금? 아니 왕이 불교 석가모니를 자신과 동급으로 올리고 백성을 다스리며 그 위력으로 통치하던 분위기이지 않았을까?
서양에서 교황이 각 나라의 황제를 임명할 정도로 종교는 정치와 관련이 깊고 정치에서 중요하다
지금까지도 그것은 나타나 현재 윤석열이 왕자를 손에 새기고 무속종교의 힘으로 이 나라를 통치하려고 그 측근에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두고 부린다
1989년부터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내용에 의하면 백제 말기 왕궁으로 조성되어 일정기간 시용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탑과 금당, 강당 등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이다.
왕궁리유적의 왕궁은 백제왕궁으로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내부구조가 확인되어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성된 백제왕궁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왕궁의 외곽에는 폭 3m의 담장을 동서 245m, 남북 490m인 장방형으로 두르고 있다. 왕궁의 남측 절반은 국가의 중요 의례나 의식을 행하던 건물, 왕이 정사를 돌보던 건물, 왕과 왕의 가족의 생활을 위한 건물들이 4개의 동서석축을 쌓아 구분·배치하였다.
북측 절반은 왕의 휴식을 위한 공간인 정원과 후원, 왕궁의 서북측에는 백제시대 가장 귀중품인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왕궁의 남측에 의례나 의식, 정무, 생활을 위한 공간을 배치하고, 북쪽에 후원을 배치하는 것은 고대 중국이나 일본 왕궁에서도 확인되고 있어서 당시 고대 동아시아 국가에 문화교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왕궁으로 일정 기간 사용한 후 사찰로 바뀌어 통일신라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사역 동남측 일부에서는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눈으로 확연히 보이는 왕궁리 유적으론 왕궁리 오층석탑이 있다
고려시대 석탑으로 국보(1997.01.01 지정)이며 높이는 약 850cm이다.
1층 기단에 5층의 탑신이 올려진 형태로 기단은 지대석 위에 하대석을 올려놓은 단층 구조이며 하대석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2개씩 표현되어 있다.
갑석은 폭이 좁고 얇은 편이며 그 밑에는 부연이 마련되어 있고 위에는 낮은 탑신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개석과 옥신석은 각기 여러 개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1층 옥신에는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표현되어 있고 2층 옥신부터는 우주만 새겨져 있다. 얇고 넓은 옥개석은 편평하게 내려오면서 처마 끝부분이 약간 올라갔으며 3단받침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상륜부는 일부 파손되었으나 현재 노반·복발·앙화·보륜 등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가 단층인 점, 옥개석의 폭이 넓고 편평한 점,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3단인 점 등에서 같은 지역에 있는 백제시대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형식을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으나 1965년 탑을 보수할 때 1층 옥개석과 기단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의 양식으로 보아 백제계 석탑의 전통을 반영한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