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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아모스 3장 9-15절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리라
비록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나라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눠졌지만, 그들은 애굽의 종 되었던 집에서 구출된 동일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을 정복한 역사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보존의 역사가 있으며, 나아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친히 싸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런 역사를 다름 아닌 이스라엘 나라 가운데 베푸시는가? 그들이 남달라서인가? 그들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뭔가 월등해서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외적 조건으로 따지자면 사실은 내세울 게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택하셨고,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특별히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나라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 알았나니...”(암3:2a)
그러나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목적이 있는 선택입니다. 그 목적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만을 알기로 하고 너희를 선택한 이상 너희는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와는 구별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한 나라가 되고 있는가?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구별된 그런 모습으로 있는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아모스 1장과 2장에서 이스라엘의 이웃에 있는 나라들을 심판하시는 그 내용이 사실은 북이스라엘의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아니 굳이 비교하자면 말씀이 주어지지 않은 나라들에 비해 말씀이 주어지고 있는 북이스라엘의 모습은 같은 죄라도 더욱 심각하다고 알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암3:2b)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특별히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의 뜻이 같지 않은데 어떻게 동행할 수 있느냐? 즉 하나님은 나의 뜻과 너희의 뜻이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자기 백성의 거룩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와 다르다는 것은 지금 저들이 거룩이 아닌 죄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자처럼 부르짖습니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선지자를 통해 큰 소리로 외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덫을 땅에 놓게 되는데, 그 덫은 무엇인가?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험을 알리는 나팔 소리, 다시 말해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지금도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지만, 그것을 선지자를 통해 미리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방 나라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너희에게만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선택하셨다는 것이고, 그 선택은 불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자가 부르짖듯 큰 소리를 재앙을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기 뜻대로 하는 저들을 징계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춰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기 위해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고 하실 때 그들의 죄와 죄에 대한 형벌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9절입니다. “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아스돗은 아모스 1장 8절에서 언급된 바 있는데, 블레셋의 대표적인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게 선포하라고 하시는데, 무엇을 선포하라고 하시는가?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심에 있어 그들의 죄 때문임을 증명할 두 대상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제 북이스라엘을 심판할 것인데, 이방 나라들인 너희가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저들의 죄악을 보고 내가 심판하는 일이 불의한지, 아니면 공의로운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블레셋 역시 아모스 1장에 의하면 심판의 대상으로 언급된 나라입니다. 애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다른 선지자를 참고하자면 사실은 그들도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들도 죄인이지만, 그런 죄인들이 볼 때 지금 북이스라엘의 죄는 더욱 심각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을 어디로 모이게 하시는가? 사마리아 산들입니다. 마치 원형 경기장에 둘러 앉아 경기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도록 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두 눈을 뜨고 똑바로 보기만 하면 누구도 예외 없이 경기장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북이스라엘의 죄를 두 단어로 설명하는데, 큰 요란함이 있다는 것이고 학대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큰 요란함이란 무엇입니까? 법과 질서가 완전히 파괴된 무법천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 또한 질서 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질서가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가? 학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지만, 그 법이 파괴되다 보니 사랑이 아닌 학대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의 것을 빼앗습니다. 공갈과 협박으로 괴롭히고, 강탈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아모스 2장에서 살핀 바 있습니다. 6절 이하를 다시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암2:6-8)
지금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이방 나라를 불러 보라고 하십니다. 너희도 너희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런 너희들이 볼 때도 북이스라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의 심각성을 이렇게 드러내고 계신 겁니다.
계속해서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절에서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일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자기 궁궐입니다. 북이스라엘의 궁궐, 즉 왕이 살고 있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교하자면 9절에서는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를 보라고 하셨다면, 10절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성의 ‘궁궐’입니다. 왕이 살고 있는 궁궐, 거기서부터 포학과 겁탈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포학이라는 단어는 가혹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의미합니다. 또한 겁탈은 다른 사람의 재산과 생명을 강제로 빼앗는 강도와 살인 행위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그 일이 어디서부터 일어나고 있는가? 북이스라엘의 궁궐입니다. 왕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라면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어야 합니다(롬13:3).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그 스스로가 그런 자로 있어야 합니다. 지금 북이스라엘은 완전히 반대로 행하고 있는 겁니다. 선보다 악을 행하고 있고, 악을 행하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7장을 보시면 일찍이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14절부터 보시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17:14-20)
사무엘 시대 때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요구대로 왕을 세우셨습니다. 왕을 세우는 것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을 왕으로 두기 싫어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지만, 인간의 본성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서 모세를 통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말씀이 있지만 주목해야 할 부분은 18절과 19절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율법서의 등사본을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어떻게 되는가? 20절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게 됩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모습은 어떤가?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시는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만합니다. 자신의 왕 됨이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된 줄 압니다.
실제로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시대입니다. 그의 이름처럼 그는 여로보암 1세를 따랐습니다. 철저히 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자기의 힘과 능력이 아닌데, 여로보암은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된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지 않는 결과요, 하나님 경외를 배우지 못한 결과입니다. 심지어 그의 교만은 어떤 모습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큰 요란함, 학대함, 포학과 겁탈로 나타났습니다.
이 모든 일에 선지자는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바른 일, 다시 말해 옳은 일을 행할 줄 모른다. 바른 일, 옳은 일이란 무엇입니까? 신명기 17장에 있는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만이 바른 일이요 옳은 일인데, 그것을 행할 줄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자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셔야 합니다. 종교적인 행위가 북이스라엘에 없는가? 하나님의 이름이 북이스라엘에 없는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떠났습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요란합니다. 그래서 학대함이 있습니다. 포학과 겁탈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 일을 행하는가? 공의로워야 할 왕이 그 일에 앞장서 있습니다. 얼마나 심각합니까?
그런데 그 사실에 대하여 이방 나라를 불러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너희가 이방 나라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1장과 2장을 통하여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셨지만, 그런 이방 나라를 증인으로 세운다는 것은 너희의 죄가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이방 나라들조차 너희가 행하고 있는 바를 보고서 비판할 정도라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 본문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궁극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을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하시겠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세워 북이스라엘의 힘을 쇠하게 하겠다, 죄의 소굴이라 할 수 있는 그 궁궐을 약탈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있던 북이스라엘은 부국강병한 나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가운데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교만해졌습니다. 자기 힘과 능력으로 그렇게 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 교만이 죄악 된 행동으로 나타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그들의 힘을 쇠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힘을 뺏으십니다. 그들이 힘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쇠하게 하시고, 뺏으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신명기 17장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병마가 많으면 그것이 곧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돈이 많으면 그것이 곧 힘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알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하더라도 믿는 자라면 이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7절에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고린도후서 3장 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것을 마치 내가 뭔가를 해서 얻어 낸 것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교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않고 자기에게로 돌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리지 않는 것, 하나님께 돌리되 일부만 돌리는 것, 다 교만입니다. 즉 여러분의 여러분 됨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는데, 여러분의 여러분 됨을 자신에게 돌리면 그것이 곧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교만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 있는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을 힘으로 삼습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있는 사람을 힘으로 삼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병마를 얻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십니까? 외적으로는 힘과 능력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이 진정한 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만이 진정한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힘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유일한 능력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것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힘으로 삼는 것을 쇠하게 하십니다. 힘으로 삼는 것을 뺏으십니다. 누구를 통해 하시는가? 땅의 사면의 대적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인간은 얼마나 맹목적이고 어리석은지 대적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대상을 힘으로 삼고자 합니다. 언제 그렇게 합니까? 내가 힘이 없을 때입니다. 힘이 없을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대적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애굽을 찾고, 앗수르를 찾고, 바벨론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쇠하게 하십니다. 그들을 통해 뺏으십니다. 믿었는데 믿었던 자의 배신을 통해 그렇게 하십니다.
계속해서 1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 11절에서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고 하셨는데, 그나마 12절은 약간의 소망이 있는 듯 한 말씀을 하십니다. 건져냄을 입으리라. 그러나 그들의 죄악의 심각성을 생각한다면 이런 내용이 결코 심판을 완화하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란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은 위험으로부터 충분히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위협을 멸시하였다. 그러나 아모스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는 말하기를 ‘너희를 위하여 방어할 무엇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너희의 적은 사자 같아서 그들을 대항할 힘이 너희에게는 사자에게 잡혀 먹히는 양만큼도 없을 것이다.’ 구출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에 의한 것이다. 목자는 사자가 배가 불렀을 때 겨우 그 입에서 두 다리와 귀 한 조각을 건져낼 수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자가 먹이를 잡아 실컷 먹고 두 다리나 귀 한 조각을 남겨 놓을 때가 있다. 그러면 목자는 그것들을 집어 들고 ‘얼마나 많은 양들이 사자들에게 잡혀 먹혔는가를 보라’고 말할 것이다.”
실제로 본문은 사자에 잡혀 먹은 양에 대한 비유와 함께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고 하시는데, 건져냄을 입으리라는 말씀 자체는 어느 정도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리시지만 소망을 주기 위해 말씀하기보다는 궁궐이 약탈당하게 될 때의 참혹함을 여기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참혹한지 침상 모서리와 걸상의 방석이 앉아 있는데, 그들의 모습이 무엇과 같은가? 사자가 양을 잡아 배 불리 먹고 난 뒤 남겨 둔 양의 두 다리, 양의 귀 조각과 같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 먹고 양의 두 다리와 귀 조각만 남아 있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남아 있는 자들조차 아무 쓸모가 없을 정도로 철저히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은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 13절에서 15절입니다.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자신을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나라의 주인이시요, 홀로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가 모든 나라를 통치하실 수 있는 분이란 것입니다. 그런 분이 다시금 너희는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너희는 9절에서 언급한 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금 불러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고 하십니다. 즉 이방 나라로 하여금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듣고 그들에게 증언하라고 할 정도로 북이스라엘의 죄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에는 저들이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조차 선지자를 통하여 증언하고 계시지만, 이방 나라들이 듣고 증언하라고 말할 정도로 저들은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얼마나 듣지 않는지 믿지 않는 이방 나라를 통해 말씀하실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을 통해 무엇을 증언하라고 하시는가? 14절은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겠다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는 가장 먼저 벧엘의 제단들을 벌한다고 말씀합니다. 벧엘은 어떤 곳입니까?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본래 그곳 이름은 ‘루스’였지만 야곱은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로 불렀습니다(창28:17,19).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시작하자마자 그곳에 무엇을 세웠느냐? 금송아지로 된 신상을 세웠습니다. 금송아지로 된 신상이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그렇게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의하면 그것은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보자면 이미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갔을 때 시내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 신상을 만든 일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하여 분명히 노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북이스라엘은 시작부터 하나님이 노하실만한 짓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우상의 집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북이스라엘의 열 세 번째 왕인 여로보암 2세 시대까지 이어져 왔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조롱받고 있는 그들의 예배를 폐하겠다는 것입니다. 겉치레에 불과한 예배를 폐하겠다는 것입니다.
벧엘의 제단을 벌할 뿐만 아니라, 15절에서는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겨울이면 좀 더 따뜻하게 머물 수 있는 궁도 만들었고, 또 여름이면 좀 더 시원하게 머물 수 있는 궁도 만들었지만, 그 모든 궁도 치신다는 것입니다. 상아 궁은 상아로 치장한 궁을 의미하는데, 그들 스스로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값을 주고 사오는 것인데, 굉장히 비쌉니다. 비싸게 주고 사 들인 상아로 치장한 궁궐이기 때문에 그 모습이 화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파괴된다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큰 궁들도 있었는데, 그것도 무너지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즉 이런 저런 용도와 모양으로 지은 궁궐들이 파괴되고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14절이 종교와 관련되어 있다면 15절은 정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교 분리로 있지만, 이스라엘 나라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래서인지 종교가 타락하면 정치도 타락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그들이 다스려야 할 백성들 또한 올바르게 다스리지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서 14절과 같이 말씀하신다고 할 때 15절은 결과 될 수밖에 없다고도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타락한 종교, 타락한 정치, 그래서 하나님은 제단을 벌하시고 왕들이 살던 궁궐들을 파괴하고 무너뜨리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특히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통해 회개해야 하지만, 회개보다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외에 다른 방법들을 찾습니다. 어쩌면 북이스라엘 역시 살아보겠노라고 주변에 있는 나라로 하여금 자기 편을 만들고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노골적으로 말해 전 세계가 북이스라엘 편을 들고 하나님 홀로 그들을 상대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주님이시고, 하나님만이 홀로 계신 분이시고, 하나님만이 만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누가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종교적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말은 합니다. 그러나 정작 나타나는 모든 모습은 자기가 주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하시면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죄를 짓는데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뻔뻔합니까?
물론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그런 완전함으로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때문에 성경은 늘 죄에 대하여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와 함께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지난 시간 모든 죄에 대하여 너희에게 보응하시겠다고 할 때 적어도 택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처럼 자기 백성이기에 징계하신다는 성격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징계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는데, 자녀답게 만들기 위해 징계를 행하십니다. 그럼 자녀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12장 14절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때 화평함과 함께 거룩함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기 위해 거룩함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근거한 화평함이라는 것입니다. 구별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화평해야지, 거룩을 버리면서까지 화평하도록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열매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행위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만이 아니라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지만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에게는 전혀 공로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로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괜찮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이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까지 요구하시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의 모든 방향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주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주를 보기 위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측면보다는 너희는 주를 보는 자들로서 너희의 마땅한 방향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도록 하는 그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함부로 생각하고,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듣는 자리에 와서 말씀이 아닌 내 것을 펼쳐놓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그분의 말씀만을 듣고, 그 말씀이 우리의 생을 이끌도록 우리의 자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리라는 이 말씀 외에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