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의 새로운 승리의 시대를 열기 위해 -
이케다 회장은 첫 ‘교수시험’을 단행했다.
은사로부터 받은 학회교학을 제자의 생명에 새겨 넣기 위해.
‘사제의 교학’ 속에서 밖에 신시대를 여는 힘은 없다.
교학부의 획기적인
대개혁을 행하다
전세계의 철학을 석권
교수시험 다음 날 본부간부회에서 교학부의 신체제가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교수시험을 막 끝낸 중추 간부와 함께 해외 첫 교학시험을 치룬 미국 멤버도 참석했다.
이 본부간부회는 12월 2일자 세이쿄신문에서 크게 보도되었다. 대표 제어는 이렇다.
“교학부 획기적인 대개혁 행하다.”
기사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본부간부회에서 전국에 13명의 교학부장이 나왔다. 또 13명의 운영 위원장이 나왔다.
지금까지는 본부 교학부장과 부부장, 운영위원장 3명으로 운영되어 왔지만 이번에 13명이 임명되어, 이것이야말로 앞으로의 학회의 교학이 실로 전세계 철학을 석권해 가는 일대 원동력으로 되어간다는 것을 각자가 자각하고 분발해 가고 싶다.”
당시 청년부 간부가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교학 체제로는 학회의 전진이 멈추어 버린다고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어구의 훈고주석에 사로잡혀 실천면이 결여될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교학의 체제를 일변하셨습니다. 광포 승리를 향한 ‘싸우는 교학’으로 해 가셨던 것입니다.”
◆ 다다 쇼고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관념의 교학, 종문의 교학에서 탈피하여 실천교학, 창가의 교학, 사제의 교학을 새겨 넣으려 하셨습니다.
호리 니치코 상인도 “학회교학이야말로 진짜의 교학입니다”라고 각별하게 감탄하신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 ‘오타루 문답’의 때도 그랬습니다.
본래라면 종문이 선두에 서서 싸워야만 하는 것을 정작 법론이 시작되자마자 중들은 겁쟁이가 되어 법론에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사의(邪義)와 감연히 싸우고 이긴 것은 학회였습니다. 학회는 대성인의 불법의 정의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사의를 타파한 것입니다.
‘악과 싸우는 교학.’ 그 중요함을 몸소 가르쳐 주셨던 것이 이케다 선생님이셨습니다.
교수 등용을 향한 길
본부간부회에서는 ‘교수시험’의 우수한 답안은 ‘대백연화’에 게재된다는 것이 발표되었다.
또 ‘조교수 논문시험’의 합격자도 발표되었다.
합격자에게는 필기시험이 부과되었다.
이케다 회장은 조교수 시험의 당초 예정도 바꾼 것이다.
논문 ․ 면접에 필기를 더하고 3단계의 엄격한 시험으로 하여 합격하면 교수에 등용하게 했다.
시험에 의해 교수를 등용하고 폭넓게 인재를 등용하는 길을 연 것이다.
회장은 이 시험문제도 일체 스스로 만들었다.
◆ 모리타 야스오
1961년 12월 제가 이 영광스러운 조교수 필기시험에 임한 것은 일생의 보배가 되었습니다.
시험은 다양한 각도에서 진짜의 실력이 있는가, 신심을 뒷받침으로 하고 있는 것인가 어떤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새겨진 것이 저의 신심의 골격이 되고 실천 ․ 행동의 규범으로 되었습니다.
◆ 사토 다케히코
긴 시간에 걸쳐 조교수 필기시험에 땀을 흘렸던 것은 지금도 그리운 추억입니다.
교수라고 하면 교학의 자격 중에서도 최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교수가 되고나면 그 후에 공부를 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저도 교학의 자세에 대해 이케다 선생님께 몇 번이나 지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최고 간부가 솔선하여 교학을 몸에 익히지 않으면 광선유포의 흐름이 멈추고 만다’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강하게 생각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학의 추진에
진두지휘를 잡다
여자부는 교학으로 일어서라
조교수 시험이 종료한 그 해 말, 새롭게 23명의 신교수가 탄생했다. 교수진은 67명이 되었다.
당시 세이쿄신문은 적고 있다.
“이번 회의 이 시험은 교학의 추진에 진두지휘를 잡으시는 이케다 회장의 뜻에 응해, 논문 ․ 필기 ․ 면접이라고 하는, 일찍이 없었던 엄격한 3단계로 행해진 것이다.”
◆ 고바야시 토시코
교수 등용의 면접시험에서 3명의 간부로부터 교학에 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에게서 출제된 질문에는 답할 수 있었습니다만 후에 퇴전한 한 사람의 간부로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는 어려운 문제를 받았습니다.
답할 수 없었던 저에게 그 간부는 “안되겠군. 그래서는 교수가 될 수 없어”라고 냉정하게 단언했습니다.
면접을 끝내고 완전히 낙담한 저에게 이케다 선생님께서 말을 건네 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조금 전의 간부와는 대조적으로 미소를 띄우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여자부 중에서 여기까지 온 것은 당신 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도다 선생님께서는 ‘여자부는 교학으로 일어서라’라고 말씀하셨는데, 확실하게 실증을 나타냈군요.”
선생님의 생각지도 못한 격려에 침울했던 기분은 한 번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기념으로 금배지를 주겠습니다”라고까지 격려해 주셨던 것입니다.
신년 근행회 자리에서 선생님께서는 교수의 임명을 받은 저에게 금배지를 주셨습니다. 생애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추억입니다.
사회에서 단연코
이기기 위한 교학이다
광선유포를 향한 힘
교학에는 자기를 변혁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교학을 공부하고 “아, 잘 알았다”라고만 해서는 아직 충분한 이해라고는 할 수 없다.
이케다 SGI회장은 말하고 있다.
“정말로 깊은 회득은 전인격적인 변혁을 촉구합니다. 소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바뀐다’는 것입니다.”
◆ 스기오카 히로아키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교수를 목표로 하는 조교수시험도 교수시험과 다름이 없는 권위와 내용으로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선생님께서는 ‘다음의 인재를 육성하고 싶다’라고 교학에 힘을 넣으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떨리는 듯한 감동을 받고 필사로 교학을 연찬했습니다.
당시 저는 댐 건설의 현장 책임자였습니다. 12월 20일의 최종 면접시험 때, 담당하고 있던 댐 공사가 완성이 얼마 남지 않아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긴장 속에서 교학을 공부하고 야간열차로 상경하여 시험을 치고 끝나고는 바로 되돌아서 현장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교학은 검호의 수행과 같은 것입니다. 언제나 진검승부로 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는 지도를 상기하고 진검승부로 일에 임했습니다.
교학시험에 대한 이 ‘배수의 진’의 싸움에 의해 저의 생명은 확실하게 단련되었습니다. 댐도 무사히 완성시킬 수가 있어서 저의 인생을 열수 있었습니다.
시험에 합격한 것은 대부분이 청년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교학시험을 통해 미숙하고 무른 저희들의 생명을 단련하고 미래를 짊어질 인재로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
교학이란 관념의 교학이 아니다.
기억하는 교학도 아니다. 학자가 되기 위한 교학도 아니다.
광포를 위한 힘이 되는 것이 교학이다.
이케다 SGI회장은 말한다.
“모든 현실의 인생과 싸워 나아가는 사회에서 단연코 이기기 위한 교학이며 대철학이다.”
무엇을 위한 교학인가. ‘이기기 위한 교학’인 것이다.
☞ 기획특집 - 신시대를 향해 ‘제1회 교수시험’ 에서 (4)
(4) 제1회 교수시험 - 이기기 위한 교학.hwp
첫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잘 읽고 심간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획특집은 아직 법련에 실리지 않은 거네요....
혹시 어디에 실린 것인가요?
감사합니다 노고많으셨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