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믿음 없으면 말도 행동도 금물인 이유>의 줄거리: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의인이 아닙니다. 의인이란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하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결국에 의인은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마음에 들여 놓은 상태에서 하는 것이 아닌 한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독이고 모든 행동이 살인이 되어 버립니다.
믿음 없으면 말도 행동도 금물인 이유
(로마서 3:1~20)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믿음 없으면 말도 행동도 금물인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믿음 없으면 말도 행동도 금물인 이유”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자기 자신의 죄인 된 의식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1~18절에 걸쳐 언급되는 내용을 나에게 적용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목구멍은 열린 무덤인가? 내 혀는 속임을 일삼고 있는가? 내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는가? 내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한가? 내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가?”라고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나 자신의 죄의 양상을 보지 못하면 십자가 생활화를 정확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의인이 아닌 죄인입니다. 죄인의 상태에서는 말도 행동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 없으면 말도 행동도 금물인 이유”라는 제목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9절을 보면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는 질문으로 말씀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우리”란 인류 전체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인 전체와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합친 인류전체를 우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0절을 보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기록된 바”가 의미하는 것은 시편 14편 1~3절까지를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너 내 마음에 든다.”라고 말씀하시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마음에 모셔 들이는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셨습니다. 출애굽 때 열 가지 재앙의 역사를 일으키셨고, 홍해를 가르셨으며, 죽음의 땅인 광야에서 40년 동안 250만 명이 먹고 살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도 선민을 잊지 않고 신실하시고 미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참으로 믿을만한 분으로 당신을 소개하셨고 하나님을 마음 안으로 모셔 들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의인이 누군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은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신 그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뒤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든다는 것은 그 대상을 마음에 모셔 들일 때에 기쁨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고 그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을 누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말씀드렸듯이 의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는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일 수 있는가 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본문에서는 깨달음과 찾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11~12절을 보면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신앙적 인격이 무엇인지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언제 어디서나 의식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의식이 하나님의 있음, 즉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동차 유리에 선팅을 짙게 하면 바깥에서는 내부의 운전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리막에서 차가 천천히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운전자가 안 보이니 차가 미끄러지는 줄 알고 달려오자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면서 비로소 운전자가 보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 있게 하시고 모든 순간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심장박동과 호흡의 날숨과 들숨까지도 주관하시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세포를 세시고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내 몸 자체를 하나하나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몸의 오감으로 이 세상 것의 있음을 의식하느라 정작 나의 몸과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계시며 내가 의식해야 할 분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것이 의인이 못 되는 죄인의 첫 번째 특성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늘 의식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일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이라는 유대인조차도 삶의 모든 순간에 그렇게 하나님의 있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9절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이 다 죄 아래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제외한다면 똑같은 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똑같이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지 못하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지 못하는 첫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깨달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살아 계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식이 깨어있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합니다. 깨달음이란 의식이 어떤 사실이나 상황이나 지식에 도달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있음에 도달하지 못하기에 깨달음도 없습니다.
이로부터 나타나는 일이 하나님을 찾지 않음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당연한 결과로써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세상 것을 마음에 들여놓고 그것을 찾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이 선민이면서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있음은 언제나 세상 것의 있음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온갖 것을 찾고 구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을 찾고 구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일 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결과를 13절에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인에 대한 신랄한 묘사가 이어집니다. 이 묘사가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대로 “내 목구멍은 열린 무덤인가? 내 혀는 속임을 일삼고 있는가? 내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는가? 내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한가? 내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가?”를 살펴봅니다.
이 말씀은 시편과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먼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나에게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제외하면 나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이 비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무엇인가를 찾기 때문에 세상 것을 들여놓게 됩니다. 이 상태가 목구멍이 열린 무덤의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이 아닌 죄인의 우선적인 인격적 특징을 말하는 것으로 꼽고 있습니다. 혀와 입술과 입에 대한 언급이 모두 말과 연관됩니다. 그리고 15절을 보면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고 하였습니다. 발은 행동을 의미합니다. 죄인의 또 다른 인격적 특징은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과 행동 이 두 가지는 죄인에게서 나타나는 금물(禁物)입니다.
먼저 무덤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무덤에는 시체가 들어있습니다. 시체는 썩음과 더러움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27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시체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인도와 계획이 끝난 대상입니다. 벌레 한 마리, 백합화 한 송이, 참새 한 마리조차도 하나님의 뜻은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든 동물이든 시체가 되었다면 그것을 위한 하나님의 뜻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좋아하여 들여놓게 되면 시체가 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예를 들어 마음에 재물을 들여놓았다면 이 사람은 재물을 들여놓은 상태에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에는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재물에 대한 생각과 계획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재물에 대해 생각하고 계획하며 추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식과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지 않기에 재물에 대한 모든 생각과 계획은 시체를 만지는 것과 같은 일이 됩니다. 재물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뜻하시고 계획하시지 않은 일이라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지 내가 뜻하고 계획할 때에 시체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마음에 들여놓고 나면 내 속은 시체를 주무르는 무덤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마음에 담고 그것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내 속이 무덤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과 뜻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없는 것들입니다. 말이 나오는 목구멍이 열린 무덤인 것입니다.
또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자녀에 대해 생각과 계획을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지 않았다면 그 생각과 계획은 하나님께서 자녀에 대해 가지신 생각과 계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럴 때 마음에서 자녀를 생각하는 일은 시체를 만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녀에 대해서 하는 말들은 모조리 열린 무덤에서 나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 상관없기에 속임수가 됩니다. 내가 멋대로 하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뜻과 의도가 아니기에 다 거짓말이고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른 대상을 마음에 들여놓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의 치우침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목구멍을 통해 나오는 모든 말은 시체의 더러움을 토해내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완전히 거짓말이고 속임수입니다. 지금 현재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고 판단해서 말하지만 거짓말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라고 하였습니다. 독은 해로운 것입니다. 거짓말은 나 자신에게 해로울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해롭습니다. 배우자를 대하든 자녀를 대하든 하나님의 뜻이나 생각과 무관한 거짓말을 한다면 배우자나 자녀를 독사가 무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일이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없는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없다면 나의 뜻과 생각은 하나님과 무관해집니다. 그로부터 나오는 나의 이야기는 속임수가 되고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말은 독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말을 받아들였기에 그 사람의 삶도 하나님과는 멀어집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사람을 멸망하게 하는 저주와 악독이 되기에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10절에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였습니다. 모범시민도 교황님도 대통령도 정치인도 누구도 의인일 수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아버지의 주권만을 믿을 뿐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땅과 하늘을 향해서 확장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다른 것의 있음을 깨닫고 다른 것을 찾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 혀는 속임을 일삼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말을 받아들이면 독사에 물리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 입에서 나오는 말 때문에 저주와 악독에 씌워서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자연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믿음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일지라도 십자가 믿음이 없다면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는 없습니다. 본래 죄인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아버지를 마음에 모신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있음을 깨닫고 아버지를 찾는 상태까지만 가도 마음에 아버지를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아니면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상태가 아니면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딴 사람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없고 그럼으로써 하늘을 향해 아버지를 찾음이 없다면 땅을 행해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상태는 목구멍이 열린 무덤입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게 되고 내 말을 듣는 사람에게 독사의 독을 내뿜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도 남도 저주의 악독 속에서 멸망하게 됩니다. 말이 이처럼 중요하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15절을 보면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라고 하였습니다. 발은 행동을 의미하고 피를 흘린다는 것은 살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지 않으면 행위가 살인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내가 언제 살인을 했다는 것이냐?”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의 말씀을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살인이란 단순히 타인의 육체를 죽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 마태복음 5장 28절을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간음하지 않았어도 마음에서 음욕을 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간음한 것으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살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22절을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쓸모없는 자)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미워하여 그 사람이 내 마음에 방해가 되고 걸림이 된다면 살인과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살인이란 존재의 말살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죽여서 존재를 말살하는 것만 살인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존재가 나의 유익을 위해서 없어지기를 바란다면 살인입니다. 반대로 나의 유익을 위해서 있기를 바라는 것 또한 살인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서 그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살인이라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유익을 위해서 그가 있기를 바라는 것도 살인이라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있게 하신 이유를 완전히 묵살하고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와의 관계와 필요에 따라서 그 사람의 존재가 없어지기를 바란다든지 있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지금 이 순간 있게 하시는 이유를 무시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이끄심을 방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살인이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그 사람을 없애버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살인을 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죄인들은 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없어지기를 바라거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본래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시고 있게 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속에 그 사람의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방해하고 묵살하고 실현되지 못하게끔 만들기에 살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자녀에 대해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존재의 이유를 끊어버리고 무시한다면 결과적으로 자녀를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죽이고 없애버리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살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상태로는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 되는 금물입니다. 모든 인간관계, 일 관계, 사물과의 관계에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그 일과 그 물건을 있게 하시는 이유와 아무 상관이 없이 내가 관계한다면 존재의 의미를 말살하는 살인입니다. 그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관계하고 행동하고 끌거나 밀거나 하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의 이유가 적용되지 못하게 한다면 살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장 17절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도 살아있었습니다. 여기서 죽는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갖고 계셨던 존재의 이유로부터 결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죽음이란 천국에 내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상태이고, 천국에서 나의 존재감이 발휘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천국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려면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그 사람을 있게 하신 이유를 단절시키고 무시하고 뭉개버리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사람을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죽이는 일이 되기에 살인입니다.
죄인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혀는 속임수로 가득 차 있으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은 저주와 악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발은 피 흘리는데 빠릅니다. 이러한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이라면 말과 행동을 금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한 말과 행동은 오직 하나님의 지시를 따를 뿐이고 성령님에 의해서만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말과 행동도 하지 못하는 나는 매 순간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죄인의 실상을 신랄하게 언급한 뒤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넘어가기 시작합니다.
아무쪼록 본문에서 언급된 죄인에 대한 신랄한 지적이 어느 한 구절도 예외 없이 나 자신을 향해 적용될 수 있음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의 십자가 생활화가 더욱 치밀하고 밀도 높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인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말도 행동도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될 이유를 나의 참담한 죄인 됨의 깨달음으로부터 찾을 수 있게 해주시고, 십자가를 붙잡는 악력이 나의 죄인 됨의 깨달음으로부터 더욱 더 강화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