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덕민(德民)이고 자는 방량(邦良)이며 성은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예이다. 고려 말기에 판도 판서(版圖判書) 휘 장유(將有)가 처음으로 호서(湖西)의 보은현(報恩縣)에 살았으므로 자손들이 그곳에 살게 되었다. 판도 판서 이후로 대대로 그 명성을 계승하였으니, 충암선생(冲菴先生) 정 원충공(淨元冲公 원충은 김정(金淨)의 자)도 그의 후손이다.
증조 휘 벽(碧)은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으로 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되었고, 조 휘 천부(天富)는 김제 군수(金堤郡守)이며, 고 휘 가기(可幾)는 생원으로 벼슬이 이산 현감(尼山縣監)에 이르렀고, 초취(初娶)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바로 대곡선생(大谷先生) 운(運)의 형 우(遇)의 딸이다. 대곡선생이 승지공의 문(門)에 장가들었는데, 세상을 은둔하여 그대로 승지공의 집에 더부살이하였다. 선생은 현감공을 사랑하여 그를 마치 자식처럼 가르친 다음, 형의 딸을 아내로 삼아주고 후사(後事)를 부탁하였는데, 끝내 자식이 없었다. 후취(後娶)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된 윤상(潤祥)의 딸인데, 공은 바로 그의 소생이다.
공은 재기(才器)가 일찍 성취되어 글을 읽고 외는 것이 남보다 갑절이나 많았고, 8세 때에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필법(筆法)도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다. 그리하여 선생이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사랑하였다. 공이 자라서 사장(詞場)에 노닐 적에는 명성이 드러나서 사람들이 모두 공과 사귀기를 갈망하였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조남명 식(曺南溟植)의 문하에 종유하면서 유자(儒者)의 명칭을 훔쳐서 세상을 현혹하였는데, 남명과 대곡(大谷)은 도의(道義)의 사귐이 매우 돈독하였으므로, 인홍이 이 때문에 대곡의 문하에도 왕래하면서 항상 공을 만나보려고 하였으나 공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 후 문묘종사(文廟從祀)의 논의가 일어나자, 인홍이 상소를 올려 퇴계(退溪) 이 선생 황(李先生滉)을 헐뜯고, 또 퇴계가 일찍이 대곡을 청은(淸隱)이라고 한 데 대하여, 청은은 편절(偏節)에 해당하는 명칭이라면서 이것을 가지고 퇴계를 허물하고 대현(大賢)을 무함하였다. 그러자 공이 상소하여 이를 분변하기를,
“청(淸)이란 한 글자는 성현들의 고상한 풍치이고, 은(隱) 또한 선생의 실덕(實德)이니, 퇴계가 그를 청은으로 지목한 것은 흉잡는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때에 인홍은 명성과 위세가 한창 혁혁하여 남들이 감히 그를 오시(忤視)하지 못했는데, 공의 이 상소가 올라가자, 식견 있는 이들은 공이 인홍의 농락을 받지 않은 것을 옳게 여기었고, 반면 인홍은 공이 자기에게 붙지 않은 것을 더욱 혐오하였다.
공은 나이 37세인 병오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44세인 계축년에 와서 별제(瓦署別提)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인홍이 이전의 감정으로 자기 패거리를 사주하여 공을 탄핵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말년에는 정사가 더욱 어지러워져서 윤기(倫紀)가 무너지고 군소배(群小輩)들이 서로 부화뇌동하므로 공이 이에 과거(科擧)를 그만두고 향리에 은거하여 종적을 감추었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 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있고 나서 공이 사축 별제(司畜別提)가 되었다가 이윽고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에 옮겨졌다. 그 후로는 수년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집에 있었다. 그러다가 정묘년에 북로(北虜)가 침략해와서 상(上)이 강도(江都)로 들어가자, 공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김사계선생 장생(金沙溪先生長生)을 따라 함께 국난(國難)에 달려가서 활인 별제(活人別提)에 제수되고 이어 예빈 주부(禮賓主簿)에 승진되었다. 무진년에 용궁 현감(龍宮縣監)에 제수되었다가 숭정 6년인 계유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마침내 다시 벼슬하지 않았다. 신묘년에 나이로 인하여 3품에 올라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그해 12월 10일에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82세였다. 그 다음해 2월에 현(縣)의 북쪽 종산(鐘山)의 후원(後原)에 장사 지냈다가 갑오년 11월에 이산(離山) 아래 장갑리(長甲里)의 동쪽 손좌 건향(巽坐乾向)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학(才學)을 지니어, 문사(文辭)를 잘 짓고 서법(書法)에 정밀하였고, 자라서는 대현(大賢)의 문하에 있으면서 당세의 대인(大人)과 현준(賢俊)들 사이에 종유하였으니, 과거에 급제하여 좋은 벼슬 하는 것쯤은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겠으나 끝내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은 운명이었다.
공의 집이 이산의 남쪽 기슭에 있었으니 바로 대곡선생이 자리잡은 곳이다. 여기에 원림(園林)과 천석(泉石)의 좋은 경치가 있어, 시내를 닦고 못을 파고 연(蓮)과 대[竹]를 심어놓고서 공이 장구(杖屨) 차림으로 그 가운데 소요하며, 원화(園花)를 가꾸고 책을 열람하는 것을 일과로 삼고 진종일 한가롭게 지내면서 이렇게 만년을 보내었으니, 대개 스스로 즐기는 것이 있어 세상에 부앙(俯仰)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년에는 자손들이 앞에 가득하고 문정(門庭)이 잘 다스려졌으므로, 사람들이 공을 일러 복이 많은 어른이라고 지목하였다.
공은 성품이 엄중하고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감히 친압하지 못하였고, 집안에서는 자손이나 비복(婢僕)들도 모두 두려워하였다.
초취 증 숙부인(贈淑夫人)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영의정 숙주(叔舟)의 후손이며 사헌부 대사헌 식(湜)의 딸이다. 부인은 나면서부터 단아하고 아름답고 화락하고 성실하였으며, 평상시에는 《소학(小學)》과 《열녀전(列女傳)》 등의 책을 읽기 좋아하였고 매우 부도(婦道)가 있었다. 부인이 정유년의 왜란(倭亂)에 적(賊)을 만나 절개를 지키다 죽자,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연릉(延陵) 이호민(李好閔)이 그 묘명(墓銘)을 지었고, 간이(簡易) 최립(崔岦)이 기리어 그 일을 노래하였다. 부인은 25세로 별세하였고, 두 딸을 두었다. 큰 딸은 6세 때에 부인과 함께 적병에게 죽었고, 작은 딸은 사헌부 대사헌 윤모(尹某)에게 시집갔다.
후취 숙부인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선공 감역(繕工監役)으로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된 희문(希文)의 딸이며, 고 영의정 토당(土塘) 오공 윤겸(吳公允謙)의 누이동생이다. 부인은 성품이 유순하고 아름다운데다 또 훌륭한 부형(父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서 대체로 진성(眞誠)과 순덕(醇德)이 있었다. 그리하여 남편을 섬기는 데에 뜻을 어김이 없었고, 전 부인의 소생을 기르는 데 있어서는 몸을 돌보지 않고 애쓰는 것이 자기 소생에게보다 더하였다. 집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그다지 규제하는 뜻을 두지 않은 듯했으나, 일가(一家) 대소(大小)로부터 복첩(僕妾)이나 종족(宗族)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진실로 부인의 덕의(德義)와 온화함을 겪어본 사람들은 다 성심으로 복종하고 즐거워하였다. 고금의 역사에도 통하여 묵묵히 이해하고 잊어버리지 않았고, 옛사람들의 언행(言行)을 듣기 좋아하여 나이가 많아진 뒤에도 자손들을 시켜 서사(書史)를 읽고 얘기하게 하면서 간혹 한밤중이 되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기도 하였다. 그 천성이 이러하여 평생에 말을 조급하게 하거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고, 만년에 자녀들의 참척을 만났을 때도 사리로써 스스로 위로하여 부인으로서 매우 하기 어려운 행실이 있었다.
기묘년에 태어나 계사년 12월 19일에 서울의 우사(寓舍)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75세였다. 한남(漢南 수원(水原)의 고호)의 오씨(吳氏)의 선영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그 다음해 11월 모일에 보은(報恩)으로 귀장(歸葬)하여 공의 묘와 합봉시켜 광중(壙中)만 다르고 봉분은 같게 해서 신 부인과 좌우로 합부(合祔)시켰다.
신 부인의 소생인 대사헌의 아들은 휴(鑴)이고, 휴가 아들을 낳았으니 큰 아들은 홍제(弘濟)이고 나머지 자녀는 어리다. 오 부인은 5남 3녀를 길렀다. 아들은 옥(鈺)ㆍ용(鎔)ㆍ상(鋿)ㆍ경(鏡)ㆍ과(鈛)인데, 정묘년에 옥ㆍ용ㆍ경이 똑같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옥은 벼슬이 현풍 현감(玄風縣監)이었고 용은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이었는데 모두 부모보다 앞서 죽었다. 상은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지금 원주 목사(原州牧使)가 되었고, 경은 무과에 급제하여 품계가 가선(嘉善)에 올랐으며, 과는 과거를 단념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옥은 첨지 강선(姜璿)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어 과의 아들 군필(君弼)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용은 가평 군수(加平郡守) 조훈(趙塤)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이 넷이고 딸이 하나이다. 상은 만호(萬戶) 이준영(李俊英)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적실(嫡室)에게서는 자식이 없고 측실(側室)에게 2남 3녀가 있다. 경은 참봉 최달원(崔達源)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다. 과는 감역(監役) 조의현(趙義賢)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1녀를 낳았다.
큰딸은 생원 송국시(宋國蓍)에게 시집가서 3남 2녀를 두었고, 그 다음은 응교 윤계(尹棨)에게 시집가서 후사가 없이 죽었으며, 또 그 다음은 수사(水使) 이인하(李仁夏)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부인보다 앞서 죽었다.
용의 큰아들 무필(武弼)은 장가들기 전에 죽었고, 그 다음 동필(東弼)은 현감 조시량(曺時亮)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으며, 그 다음 명필(明弼)은 사인(士人) 정용(鄭墉)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고, 그 다음 현필(鉉弼)은 현감 민희원(閔希遠)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딸은 윤총(尹摠)에게 시집갔다.
과의 아들 여필(礪弼)은 생원 이신규(李身圭)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그 다음 위필(渭弼)은 아직 장가들지 않았으며, 그 다음 군필(君弼)은 바로 현감의 후사가 되었고, 언필(彦弼)ㆍ하필(夏弼)은 모두 어리다. 딸은 아직 15세가 안 되었다.
송국시의 아들은 규정(奎禎)ㆍ규상(奎祥)ㆍ규창(奎昌)인데 모두 자녀가 있으나 어리다. 큰딸은 승문 정자(承文正字) 변황(卞榥)에게 시집가서 자식도 없이 일찍 죽었고, 그 다음은 박세부(朴世阜)에게 시집가서 1남을 두었다.
측실에게서는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으니, 아들은 전(鈿)ㆍ연(鍊)ㆍ임득(壬得)이다. 전의 아들은 진필(震弼)이고, 연의 아들과 딸은 다 어리다. 큰 딸은 영월 군수(寧越郡守) 정기수(鄭猉壽)의 첩이 되었는데 자식이 없고, 그 다음은 밀양 부사(密陽府使) 조정립(曺挺立)의 첩이 되어 4남 2녀를 두었다.
휴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外家)에서 자라면서 외왕부모(外王父母)를 30여년 동안 섬기었다. 그리하여 외삼촌께서 내가 외가의 일을 자세히 안다고 여기시고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시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인현의 문하에 양육되어 / 仁賢之育
두터운 몽양을 받아서 / 蒙養之篤
부정한 데에 빠져들지 않고 / 不詭于邪
뛰어나게 두각을 나타냈건만 / 嶄嶄其角
어이 그리 벼슬길은 막히었던고 / 何官之阨也
훌륭한 부인을 만나서 / 配美匹德
가성이 매우 평화로웠고 / 家聲之穆
선을 심고 경복을 길러서 / 種善毓慶
자손이 매우 번창했는데 / 子姓其僕
아, 어찌하여 혹 요절했던고 / 吁何或弗祿
이산의 산기슭에 / 離山之麓
높다란 언덕이 있어 / 有崗欝律
부인들을 부장하여 / 衛人之祔
세 묘혈을 한데 합했으니 / 參合其穴
장차 그 후손들이 훌륭하리라 / 將其後秩秩
[주-D001] 편절(偏節) : 혼후(渾厚)한 데에 결함이 되는, 즉 한쪽으로 치우친 절조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