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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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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선생(星湖先生)은 독학(篤學)ㆍ역행(力行)하여 정주(程朱)를 따르고 근원을 찾아 공자(孔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성문(聖門)의 심오한 뜻을 계발하여 후학(後學)들에게 보여주셨다. 선생이 만년에 한 제자를 얻었으니 그가 바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이다. 공은 영민하고 지혜로우며 어질고 화순(和順)하여 재덕(才德)을 겸비하였으므로 선생이 매우 사랑하여 문학(文學)은 자하(子夏) 같고 포양(布揚)은 자공(子貢) 같을 것이라 믿으셨더니, 선생이 죽은 뒤로는 과연 재주 있고 준수한 후배(後輩)들이 모두 공에게 모여들었다.
서서(西書)가 나오자 녹암의 동생 일신(日身)이 처음으로 화에 걸려 임자년(1792, 정조 16) 봄에 죽음을 당하였고 온 집안이 모두 서교(西敎)를 믿는다는 지목(指目)을 받았으나 녹암이 능히 금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녹암 역시 신유년 봄에 죽음을 당하여 드디어 학맥(學脈)이 단절되어 성호의 문하에 다시 학맥을 이을 만한 이가 없게 되었으니, 이는 녹암 한 집안의 비운(悲運)일 뿐 아니라 일세의 비운이었다. 공의 휘는 철신, 자는 기명(旣明)이며, 자호(自號)는 녹암이고 재호(齋號)는 감호(鑑湖)이니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먼 조상 양촌(陽村) 근(近)이 조선조에 벼슬하여 이상(貳相)이 되었는데, 이분이 이상 제(踶)를 낳고 제가 좌의정 남(擥)을 낳고 남이 홍문관 제학 건(健)을 낳았다. 이후 4대는 모두 음사(蔭仕)하였으나 길천군(吉川君) 반(盼)이 다시 벼슬하여 병조 판서가 되었다. 반이 승문 정자(承文正字) 경(儆)을 낳고, 경이 적(蹟)을 낳았는데, 적이 경학(經學)으로 대군(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종조부 좌랑(佐郞) 척(倜)의 후사(後嗣)로 출계(出系)하여 종가(宗家)를 잇게 되었다. 척의 아버지는 바로 길천군의 형 준(晙)이다. 사부가 이조 참판 휘(諱) 흠(歆)을 낳았으니, 이분이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는 진사(進士) 돈(敦)이고, 아버지 시암(尸菴) 암(巖)은 논의(論議)가 준엄하고 문학을 좋아하였으며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공이 맏이었다.
후세의 학문은 담론(談論)에 빠져 이기(理氣)와 정성(情性)만을 논할 뿐 실천에 소홀하였으나 공의 학문은 효제 충신(孝弟忠信)을 한결같이 종지(宗旨)로 삼아 부모에게 순종하고 뜻을 봉양하며, 친구와 형제를 한몸처럼 아끼는 데에 힘쓰니, 그 문하에 들어간 자는 다만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가 사방으로 퍼져 마치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것이 지란(芝蘭)의 방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아들과 조카들이 집안에 가득하나 마치 친형제처럼 화합하니, 그 집에 10여 일이나 한 달을 머문 뒤에야 비로소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노비(奴婢)와 전원(田園), 또는 비축된 곡식을 서로 함께 사용하여 내것 네것의 구별이 조금도 없으니,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까지도 모두 길이 잘 들고 순하여 서로 싸우는 소리가 없었다.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비록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고루 나누어 종들에게까지 돌려주었다. 그러므로 친척과 이웃이 감화(感化)되고 향리(鄕里)가 사모하였으며, 먼 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우러러 보니, 학문과 행검(行檢)을 힘쓰는 상류 사족(士族)들까지 모두 공을 사표(師表)로 삼아 자제(子弟)를 문하에 들여보냈다. 그에 따라 명성(名聲)이 자자하여 세상에서 정백순(程伯淳 명도 선생(明道先生) 정호(程顥)의 자)이 다시 태어났다고 하였다.
건륭(乾隆) 갑진년(1784, 정조 8)에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책봉(冊封)하고 경재(卿宰)들에게 동궁(東宮)의 관원(官員)이 될 만한 학행(學行)과 조리(操履)를 가진 사람을 각각 천거하게 하니, 판서 홍수보(洪秀輔)와 참판 채홍리(蔡弘履)가 함께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닦여졌다고 공을 천거하였으나 마침 세자가 5세에 죽었기 때문에 그 일은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경연관(經筵官)으로 초선(抄選)되었으니 끝내 그 벼슬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과거 이벽(李檗)이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宣敎)할 때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벽은,
“감호(鑑湖)는 사류(士類)가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감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감호를 방문하여 10여 일을 묵은 뒤에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공의 동생 일신(日身)이 열심히 이벽을 따랐다. 그러나 공은 서교를 믿지 않고 《우제의(虞祭義)》 1편을 지어 제사의 뜻을 밝혔다. 신해년 겨울 호남옥사(湖南獄事)가 일어나자 목만중(睦萬中)과 홍낙안(洪樂安)이 일신을 지적하여 고발하였으니, 일신이 끝내 죄를 자백하지 않으므로 제주(濟州)로 귀양보냈다. 상께서 타이르고 깨우치시니 일신이 옥중(獄中)에서 회오문(悔悟文)을 지어 올렸으므로 죄를 조금 감하여 예산(禮山)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일신이 옥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으니, 이때부터 문도(門徒)가 다 끊어졌다. 공은 문을 닫아걸고 슬픔을 지닌 채 10여 년 동안이나 산문(山門)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신유년 봄 공이 체포되어 옥에 갇혀 국문(鞫問)을 받았으나 증거가 나타나지 않자, 어떤 자가,
“을묘년에 죽은 윤유일(尹有一)이 본시 그의 제자였으니, 그 비밀스러운 속사정을 알지 못한 바가 없었을 것이다.”
하니, 드디어 이 자의 말에 의하여 공의 사형(死刑)을 결정하였다. 그때 마침 고문의 상처로 인해 공이 죽자 드디어 기시(棄市)할 것을 논의하였으니, 그날이 2월 25일이었다. 아, 인후(仁厚)하기는 기린(麒麟) 같고 자효(慈孝)하기는 호유(虎蜼) 같고 지혜롭기는 새벽 별 같고 얼굴과 용모는 봄 구름과 상서로운 해 같은 분이 형틀에서 죽어 시체가 거리에 버려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경신년 봄 나의 계부(季父)가 귀천초당(歸川草堂)에 계실 때,
“권철신은 갈가리 찢겨 죽어도 애석할 것 없다.”
하고, 이어 말씀하기를,
“그러나 그가 집안에서 한 행실만은 훌륭하다.”
하니, 나의 중씨(仲氏)가,
“그 행실이 훌륭한 사람을 어떻게 갈가리 찢어 죽일 수 있겠습니까?”
하던 말이 아직까지 기억에 새롭다. 아! 어찌 나의 계부만이 그렇게 생각했겠는가. 공의 효우(孝友)와 독행(篤行)에 대해서는 비록 공을 배척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인증하였다. 공은 병진년에 나서 신유년에 66세에 나이로 죽었다. 저서(著書)로는 《시칭(詩稱)》 2권과 《대학설(大學說)》 1권만이 전해지고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 그러나 내가 들은 바로는, 공이 《대학(大學)》을 논함에는 격물(格物)은 물유본말(物有本末)의 물(物)을 격(格)하는 것이고, 치지(致知)는 지소선후(知所先後)의 지(知)를 치(致)하는 것이라 하고, 또 효제자(孝悌慈)를 명덕(明德)으로 삼고, 구본(舊本)에 반드시 착간(錯簡)이 있지 않다고 하였다. 《중용(中庸)》을 논함에는 소불문(所不聞)ㆍ소부도(所不覩)를 상천지재 무성무취(上天之載無聲無臭)라 하였으며, 사단(四端)을 논함에는 조기(趙岐)의 설을 따라 단(端)은 수(首)이며, 인의예지(仁義禮智)는 행사(行事)의 성명(成名)이라 하였다. 상례(喪禮)를 논함에는 형제(兄弟)는 동족(同族)의 통칭(通稱)이고, 입후(立後)는 죽은 사람의 후사(後嗣)가 되는 것이며, 대하척(帶下尺)은 옷깃의 길이이며, 연미(燕尾)는 본래 없는 물건이며, 조상(吊喪)을 받을 때 주인(主人)만이 객(客)에게 절하고 그밖의 주인은 객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라 하여, 이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국풍(國風)을 논함에는 정풍(鄭風)ㆍ위풍(衛風)은 음분(淫奔)을 풍자한 시라 하고, 《서경(書經)》을 논함에는 매씨(梅氏)의 25편을 위서(僞書)라 하였다. 이상의 말들이 비록 주자(朱子)가 논한 바와 다름이 없지 않으나, 공은 평생 주자를 애모(愛慕)하여 주자의 글을 외고 그 뜻을 기술(記述)하는 것을 퍽 즐겨하여,
“나만큼 주자를 심모(心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지난 경술년 겨울에 내가 희정당(熙政堂)에 입대(入對)하여 각신(閣臣 규장각(奎章閣)의 관원) 김희(金熹) 등과 《대학(大學)》을 강론(講論)한 적이 있었는데, 공이 그 강론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내가 남중(南中)에서 지은 책에는 《시경》에서는 몽송(矇誦)의 뜻을 발명(發明)하였고 《서경》에서는 유림전(儒林傳)과 예문지(藝文志)를 인용하여 고문(古文)에도 두 종류가 있었음을 증명하였고, 《예기(禮記)》에서는 대의(大義) 수십 조항을 찾아내었고, 악(樂)에서는 취율(吹律)의 잘못된 것을 알아내었으며, 《역경(易經)》에서는 왕래(往來)와 승강(升降)의 뜻을 찾아내었고, 《춘추(春秋)》에서는 《주례(周禮)》의 유문(遺文)을 찾아내었고 사서(四書)에서는 인(仁)과 서(恕)가 일관(一貫)하는 바른 뜻을 찾아낸 것들이 있으니, 만약 공이 살아 있을 때 내가 돌아왔다면 공의 기쁨이 어찌 끝이 있었겠는가.
선형(先兄) 약전(若銓)이 공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년 겨울 천진암(天眞菴)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할 적에 이벽(李檗)이 눈오는 밤에 찾아오자 촛불을 밝혀 놓고 경(經)을 담론(談論)하였는데, 그 7년 뒤에 비방이 생겼으니, 성대한 자리는 두 번 다시 열리기 어렵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공이 죽은 지 한 달 뒤에 호남에서 유항검(柳恒儉) 등을 잡아 포도청으로 압송하니, 포청에서는 온갖 고문을 다하여,
“이가환 등이 은(銀)을 내어 선박(船舶)을 부르려 했는데, 공도 홍낙민(洪樂敏)ㆍ이단원(李端源)과 함께 그 계획을 알고 있었다.”
는 초사(招辭)를 받아내었다. 그러자 사헌부와 사간원은 대계(臺啓)하여 공에게 가율(加律)할 것을 청하였다. 아, 정말로 이런 계획이 있었다면 어찌 반드시 봄에 죽은 네 사람이 주관하였겠는가. 유항검 등이 죽은 사람을 끌어들인 것은 고문을 견딜 수 없어 부득이 거짓으로 공초(供招)하였던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을 끌어들이면 변명할 것이므로 죽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고문의 고통을 면하고자 한 것일 뿐, 공이 이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린아이들까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참판(參判) 상빈(尙賓)의 따님이고, 배위(配位)는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돈(墩)의 따님이다. 공에게 아들이 없어 집안에서 입후(立後)할 것을 상의하니, 공이,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내게 승중(承重)이 없고, 내가 살아 있으면 후사(後嗣)를 말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 입후를 하겠는가.”
하였다. 시암(尸菴)이 죽은 뒤 일신(日身)의 아들 상문(相門)을 양자(養子)로 삼았다. 상문 역시 신유년에 죽었는데, 황(愰)과 경(憬) 두 형제를 두었다. 공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이총억(李寵億)에게 시집갔다. 묘(墓)는 양근(楊根) 남시면(南始面) 효자산(孝子山) 선영(先塋)의 남쪽 임좌(壬坐)의 언덕에 있다. 부인 남씨를 부장(祔葬)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도술의 차이는 / 道術之差
털끝을 다투는 것인데 / 爭于毫髮
경이 쇠하고 위가 일어남에 / 經衰緯興
선기(禪機)가 발동하였도다 / 禪機竊發
세상 선비들은 조와 현을 서로 융합하고 / 相融祧玄
또 훈고에 빠졌으나 / 又溺詁訓
공은 그렇지 않고 / 公曰不然
주공ㆍ공자만을 본받았도다 / 周孔是憲
대세가 이미 기울자 / 大運旣傾
침묵을 지켰고 / 乃黙乃沈
친족을 보호하려 / 保我天親
형틀서도 담소했네 / 談笑俎碪
뭇 사람들 원수라 하면서도 / 衆口同仇
공의 효우는 인정하였도다 / 猶曰孝友
하늘이 시운(時運)을 살펴 / 天唯自徵
현량을 내셨으나 / 賢良是牖
참소하는 무리 매우 모질어 / 讒夫孔棘
이 어진 분 죽였도다 / 殲此仁人
공의 덕용 생각하니 / 言念德容
온화한 봄 기상일세 / 藹藹其春
백세 뒤엔 / 百世之後
다시 공을 알 사람 없겠기로 / 不復知公
이 변변치 못한 글을 묻어 / 瘞茲菲詞
천명(天命)을 기다리노라 / 以候天衷
부 한화
공이 젊었을 때 하헌(夏軒 윤휴(尹鑴))을 사모하여 일찍이,
“퇴계(退溪) 이후로는 하헌의 학이 본말(本末)이 있고, 하헌 이후로는 성호(星湖)의 학이 간 성인을 잇고 오는 학자들을 개도(開導)하였다.”
했다 한다. 이는 나의 중씨(仲氏)께서 들은 말이다. 그런데 공의 말년에는 이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들은 바로는 공이 하헌을 오활하게 여겼으나 하헌의 만필(漫筆) 1권은 매우 좋다고 감탄하였으며, 기해예설(己亥禮說)에 대해서는 참최설(斬衰說)을 옳게 여겼다.
공이 젊었을 때 의리에 엄격하여 말하는 사이에서도 혹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니, 이희사(李羲師)의 시에,
관문에는 의리가 보존되었다 / 關門義理存
한 것이 바로 이를 일컬은 것이다. 말년에는 논의가 공정하여 젊었을 때보다 많이 누그러졌다. 공은 매양,
“붕당(朋黨)의 사심(私心)이 폐부(肺腑)에 고질이 되었으니 씻어내기가 매우 어렵다.”
고 하고, 붕당을 후생들에게 경계시켰다.
신유년 옥사(獄事)가 일어난 뒤 지사(知事) 권엄(權𧟓)이 상소하기를, 남인(南人) 진신(縉紳)에 대한 소(疏)임.
“권철신은 바로 사적(邪賊) 일신(日身)의 형이니, 저에게 만약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일신이 죽은 뒤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각책(刻責)하고 구악(舊惡)을 일변하여 자신부터 먼저 마음을 고쳐먹어야 마땅할 것인데, 도리어 완악하게도 허물을 고칠 줄 모르고 어리석게도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자식에게 요망한 사설(邪說)을 퍼뜨리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죄로 전에 포청에 잡혔었고 뒤에 다시 군옥(郡獄)에 갇혔으니, 이와 같이 흉악하고 호종(怙終)하는 자를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 이 상소문을 살피건대, 공의 억울함을 알 수 있다. 이 상소문에 동생과 자식을 이끌어 말했고 끝까지 공이 직접 범했다는 말이 없으니, 당시 지구(知舊)들의 공론을 알 수 있다. 그처럼 깊은 학문과 성대한 명예를 지닌 분으로서 당시 죄를 성토당함이 이 정도뿐이었으니, 공이 법을 범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공은 효우(孝友)가 대단하여 차마 부자 형제 사이의 은의(恩義)를 해칠 수 없어서 이에 이른 것뿐이니, 어찌 무고한 선비를 죽인 것이 아닌가.
대사간(大司諫) 목만중(睦萬中)이 상소하기를,
“권철신은 젊어서부터 향학(向學)의 명예를 가지고 자못 영민하고 해박(該博)하다는 칭찬이 있었더니, 그 아우 일신이 사당(邪黨)에 가입한 뒤로는 창화(倡和)에 전념하여 온 집안이 모두 서교(西敎)에 고혹(蠱惑)되었으니 이는 장차 무슨 짓을 하려는 생각이겠습니까?”
하였다. 이 상소문의 말을 살피건대, 전혀 근거없는 사실을 끌어다 붙인 것뿐이다. 창화에 전념하여 온 집안이 모두 고혹되었다는 말이 바로 모호한 말이 아닌가?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숨겨주고 형은 아우를 위하여 숨겨주어 운명(運命)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인륜(人倫)의 지극함인데, 자식과 아우의 죄를 숨겼다 하여 그를 죽여서야 되겠는가?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익운(李益運)이 상소하기를,
“그 사교(邪敎)의 우두머리를 찾아낸다면 권일신이 바로 우두머리입니다. 일신이 죄를 받아 죽은 뒤에도 그들이 허물을 고치기는커녕 여전히 기고만장하여 왕래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권철신의 온 집안이 악(惡)을 계속하였다는 것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아도 분명합니다.”
하였다. 이 상소문을 살피건대, 공의 억울함을 알 수 있다. 부자 형제 사이는 죄를 연루(連累)시키지 않는 것이 옛뜻인데, 그 아우의 죄를 추론(追論)하여 그 형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것이 옳은 일인가? 말을 혼동하여 ‘온 집안이 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끝내 공 자신이 직접 범했다는 말은 없으니, 공에게 죄가 없다고 믿지 않고서야 이렇게 하였겠는가?
대제학 이만수(李晩秀)가 지은 주문(奏文)에 옥에 갇혀 화를 입은 사람은 생사(生死)를 막론하고 차례로 거론(擧論)하여 중언 부언(重言復言)하였으나, 녹암(鹿菴)의 이름만은 그 속에 끼지 않았으니, 춘옥(春獄)과 추옥(秋獄)에 끝내 공이 죄를 범한 증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기시(棄市)하는 날에 억지로 공에게 죄목(罪目)을 씌워 유일(有一)의 정상을 알고 있었다 하고, 호남옥사(湖南獄事)가 일어났을 때 죄인들이 공의 이름을 끌어대자 항검(恒儉)의 정상을 알고 있었다 하여 대계(臺啓)가 일어났다. 그래도 공론(公論)은 여전히 공을 무죄로 여겼으므로 주문(奏文)에 공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것이다.
대제학 이만수(李晩秀)의 반교문(頒敎文)에,
“철신(哲身)의 고장이 모두 미혹(迷惑)되었고, 그 친척(親戚)들은…….”
하였다. 단죄(斷罪)하는 법은 먼저 본인의 죄를 정하고 나서 집안과 이웃의 죄가 바로 이 사람 때문이라고 하는 것인데, 녹암만은 매양 집안과 이웃
의 죄를 녹암에게 덮어씌웠으니 법례(法例)가 아니다.
경신년 국상(國喪) 이후에 양근(楊根)에 사는 악당(惡黨) 김모(金某) 등이 도둑을 보내어 공의 집안 4대의 신주(神主)를 훔쳐다가 수화(水火)에 던져 넣고서 죄를 공에게 덮어씌우려는 모의(謀議)를 하였는데, 이희사(李羲師) 호는 취송(醉松)으로 시명(詩名)이 있었다. 가 그 사정을 알고 은밀히 공에게 알리니, 공은 곧 신주를 옮겨 벽장 속에 안치(安置)해 두고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날 밤에 과연 도둑 둘이 사당(祠堂)에 들어와 신주를 찾았다. 신주를 못 찾은 도둑이 그냥 돌아가서 악당에게 사정을 말하니, 악당은 공이 전에 이미 신주를 태워 없앤 것으로 생각하고 온 시골에 ‘공이 신주를 태워 없앴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신유년 봄에 군수(郡守) 유한기(兪漢紀)가 사람을 보내어 조사하게 하니, 벽장 속에 4대 신주가 봉안(奉安)되어 있었다. 진사(進士) 조상겸(趙尙兼) 등이 통문(通文)을 내어 악당이 도둑을 보낸 일을 논하고, 공이 신주를 태워 없앴다는 말이 거짓임을 밝혔으나, 군수 유공(兪公)이 그 사건을 느슨하게 다스렸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새 군수 정주성(鄭周誠)이 와서 조상겸 등을 잡아 하옥하니, 연루된 사람 50여 명이 죽거나 유배되어 한 사람도 면하지 못했는데, 악당이 신주를 훔치려 한 죄는 불문에 부쳤다.
[주-D001] 문학(文學)은 자하(子夏) : 공문(孔門) 제자 중에 문학에는 자유(子游)와 자하가 가장 뛰어났다.《論語 先進》[주-D002] 포양(布揚)은 자공(子貢) : 공자(孔子)의 이름을 천하에 널리 선양(宣揚)한 것은 자공의 힘이었다.《史記 貨殖傳》[주-D003] 윤유일(尹有一) : 천주교도. 이승훈ㆍ정약종ㆍ권일신 등의 밀사(密使)로 중국에 가서 영세를 받고 중국 주교와 로마 교황에게 신부(神父) 파견을 요청하는 서신을 전달하고, 지황(池潢)과 함께 3차로 북경에 가서 신부 파견을 요청하여 다음해 중국 신부 주문모를 데려오는데 성공하였다. 정조 19년에 주문모 신부 체포령이 내리자 그를 피신시키고 체포되어 처형되었다.[주-D004] 착간(錯簡) : 서책의 지면(紙面)의 전후가 뒤바뀐 것. 주자(朱子)는 구본(舊本)《대학(大學)》에 착간이 있다고 여겨 현재 통용하는 장구본(章句本)으로 편차를 시정해 놓았다.[주-D005] 조기(趙岐) : 한(漢) 나라 때 학자. 자는 빈경(邠卿).《맹자(孟子)》의 주석(註釋)을 처음 단 사람. 이 주를 고주(古註)라 한다.《後漢書 卷64 趙岐列傳》[주-D006] 매씨(梅氏)의 25편 : 현재《서경(書經)》에 수록되어 있는 고문(古文) 25편을 말한다. 이는 동진(東晉) 때 매색(梅賾)의 위작(僞作)임이 청 나라 염약거(閻若璩)의〈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에서 고증되었다.[주-D007] 유항검(柳恒儉) : 천주교도. 전주(全州) 출신으로 일찍이 천주교에 가담하여 자치적 조선교구(自治的朝鮮敎區)의 신부로 활약하다가 뒤에 북경교구(北京敎區)의 명으로 자치 조선교회가 해산되자 신부 영입을 주도하여 중국 신부 주문모의 영입을 도왔고, 홍낙민(洪樂敏)ㆍ이단원(李端源)과 함께 외국의 힘을 빌려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김유산(金有山)을 청 나라에 보내어 청원하였다. 순조 1년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주-D008] 대계(臺啓) : 사헌부ㆍ사간원에서 유죄로 인정하여 올리는 계사(啓辭).[주-D009] 선기(禪機) : 선문(禪門)의 기봉(機鋒)이란 말인데, 여기에서는 이단(異端) 곧 서교(西敎)의 칼날이 번득인다는 뜻으로 쓰였다.[주-D010] 호종(怙終) : 믿는 바가 있어 재차(再次) 죄를 범하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