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대성(大姓)이 있으니, 한씨(韓氏)이다. 한씨의 관적(貫籍)은 청주(淸州)이니 고려의 태사(太師) 란(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대로 경상(卿相) 벼슬을 하여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다. 근세에 이르러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휘 준겸(浚謙), 시(諡) 문익(文翼)이 있었으니, 목릉(穆陵 선조(宣祖)) 때의 명신이다. 이분이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휘 회일(會一)을 낳고, 좌윤이 생원 휘 이성(以成)을 낳았는데, 이성이 자식이 없었으므로 종조형제(從祖兄弟)인 군수 휘 익명(翼明)의 아들 돈녕 판관(敦寧判官) 휘 두상(斗相)으로 후사를 삼았다. 판관이 사헌부 감찰 휘 종규(宗揆)를 낳았으니, 감찰의 장자는, 휘는 덕사(德師), 자는 사득(士得), 호는 석은(石隱)이다. 모친 해남 윤씨(海南尹氏)는 처사(處士) 이구(爾久)의 딸이니, 고산(孤山) 선생 휘 선도(善道)의 증손녀이다.
공은 어렸을 때에 따를 자가 없을 만큼 기억력이 뛰어나 스승의 가르침 없이도 날마다 수천여 글자를 암송하였다. 의심나거나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깊이 연구하여 이해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장성해서는 자사(子史)에 두루 통달하여 붓을 들면 문장이 술술 이루어져 막힘이 없었으며, 여가에 과거 공부를 하였는데 이 또한 익숙하고도 민첩하였다. 공은 탄식하기를, “장부의 사업이 여기에서 그치겠는가.” 하고는 책 상자를 들고 관악산(冠岳山)에 들어가 성인(聖人)의 글을 3년 동안 읽고는 돌아와 말하기를, “본래 10년을 기약하였는데 병이 나서 중도에 파하게 되었으니, 운명이다.” 하였다.
임신년(1692, 숙종18)에 생원진사시에 모두 입격하였다. 임인년(1722, 경종2)에 현릉 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다가 조금 뒤에 사릉 참봉(思陵參奉)으로 옮겨졌다. 이듬해에 목릉 봉사(穆陵奉事)로 승진하였고, 또 그 이듬해에는 상의원 직장으로 승진하였다. 병오년(1726, 영조2)에 대신(臺臣)이 문자의 꼬투리를 잡아 시휘(時諱)를 범하였다고 아뢰었는데, 이 일로 파직되었다. 정미년(1727) 가을 9월 7일에 고종명하니, 수가 53세였다. 무덤은 청풍(淸風) 서운동(瑞雲洞) 임좌(壬坐)의 산에 있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이에 앞서 선부인(先夫人)의 묏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선부인이 꿈속에 나타나 마침내 길지를 얻었으니, 바로 이 자리이다.
부인 숙인(淑人) 정씨(鄭氏)는 사헌부 장령 선명(善鳴)의 따님이니, 부제학 성근(誠謹)의 후손이다. 1남 1녀를 길렀으니, 아들 맹전(孟傳)이 요절하여 아들을 두지 못하였으므로 중제(仲弟)의 아들 기전(箕傳)으로 후사를 삼았다. 딸은 교리 홍중효(洪重孝)에게 시집갔다. 맹전의 딸 하나는 신교(申漖)에게 시집갔다.
한씨가 학문으로 모범이 된 것은 유음(柳陰) 선생 휘 효윤(孝胤)부터 시작하였으니, 유음은 바로 부원군의 대인(大人)이다. 저헌(樗軒) 박민헌(朴民獻)에게 예(禮)를 배웠으니, 저헌은 화담(花潭) 서 선생(徐先生 서경덕(徐敬德))의 적전(適傳)이다. 후손에게 법도와 가르침을 드리워 공에게까지 이르렀으니, 배양(培養)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공에게는 종부제(從父弟) 사소(士昭) 휘 덕린(德麟)이 있었는데, 그 또한 도를 배워 깊은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선비들의 마음이 경도되어 추종하였다. 마침내 같은 집에서 함께 강습하여 훈지(塤篪)가 서로 호응하였으며, 효성으로 소문이 나서 대련(大連), 소련(小連)과 같다는 칭찬이 있었다. 사소가 별세하였을 때에 조명(朝命)이 내려 그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였는데, 지금 공이 죽은 지 30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까지 적막한 채로 있으니, 이는 수레의 두 바퀴 중에 하나가 없는 것이요, 새의 두 날개 중에 하나가 꺾인 것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 평소 행실의 독실함은 모두 보통 사람들이 지극히 어렵게 여기는 바이다. 훌륭한 행실은 한 가지로 국한해서 말할 수가 없는데, 만약 그 주요한 것을 들어서 부모에게 효성스러웠다거니, 형제에게 우애가 있었다거니 한다면, 이른바 ‘그 일을 하나하나 헤아려서 칭찬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니, 병통이 있지 않겠는가.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평상시에는 자신의 공경을 지극히 하고, 봉양할 때는 어버이의 즐거움을 지극히 하고, 병을 앓으실 때에는 자신의 근심을 지극히 하고, 상사에는 자신의 슬픔을 지극히 하고, 제사 지낼 때에는 그 엄숙함을 지극히 한다.” 하였으니, 오직 이 말이 그 사람을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유집(遺集) 3권이 남아 있다. 유려하도다, 그 문장을 이룸이여. 조화롭도다, 그 이치에 가까움이여. 신중하도다, 가다듬어 문란하지 않음이여. 내가 외람되이 이렇게 기술하면서 삼도(三都)의 손을 빌려 후대에 보일 수 있기를 삼가 기대해 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청풍이라 불리는 고장에 / 地號淸風
서운이란 골짜기 있다네 / 有瑞雲谷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이 / 穆如油然
모여 땅위에 비를 뿌리니 / 膚寸施澤
길몽이 들어맞아 / 吉夢惟叶
귀신이 유택(幽宅)을 보호하였네 / 鬼護厥宅
세상이 싫어할 만한지라 / 世之可厭
정신이 광활한 우주에 노닐었으니 / 神遊寥廓
기운을 타고 오르내리매 / 乘氣下上
신인(神人)이 감통(感通)하였네 / 至于合莫
손으로 하늘의 문장을 오려 내어 / 手抉天章
상제(上帝)와 더불어 흩뿌렸나니 / 與帝揮攉
태어나면서 이미 재능을 지녔고 / 生旣斂用
문장 또한 아름답게 다듬었으니 / 載追載琢
어찌 사람을 진작시키지 않으리오 / 遐不作人
화락한 군자에게 복을 내리리로다 / 豈弟降福
후인이 알고 있는 분인지라 / 後人攸識
이렇게 조각돌에 새기노라 / 鐫此片石
[주-D001] 박민헌(朴民獻) : 1516~1586.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희정(希正)ㆍ원부(元夫)인데, 스승 서경덕이 이정(頤正)으로 고쳐 주었다. 호는 정암(正菴), 저헌(樗軒), 슬한(瑟僩)이다. 대사간, 형조 참판 등의 내직과 강원 감사 등의 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성리학과 역학에 뛰어났으며, 시문집인 《슬한재집(瑟僩齋集)》이 있다.[주-D002] 훈지(塤篪)가 서로 호응하였으며 : 훈(塤)과 지(篪)는 모두 악기의 이름이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백씨는 훈을 불고, 중씨는 지를 분다.〔伯氏吹塤 仲氏吹篪〕” 하였는데, 이로 인해 훈지는 형제가 모두 훌륭하고 서로 간에 우애가 지극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주-D003] 대련(大連), 소련(小連) : 모두 동이(東夷) 사람으로 거상(居喪)을 잘하였다고 한다. 공자는 이들을 가리켜, “소련과 대련은 거상을 잘했다. 3일 동안 게을리하지 않았고, 3개월 동안 해이하지 않았으며, 1년 동안 슬퍼하였고, 3년 동안 초췌하게 지냈다.” 하였다. 《禮記 雜記下》[주-D004] 이른바 …… 것이니 : 그 훌륭함을 표현하기에는 미진한 점이 있다는 뜻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자산(子産)을 평하기를, ‘군자(君子)의 도(道)가 네 가지 있었으니, 몸가짐이 공손하며, 윗사람을 섬김이 공경스러우며, 백성을 기름이 은혜로우며, 백성을 부림에 의로웠다.’ 하였다.” 하였는데, 오씨(吳氏)의 주석에, “그 일을 하나하나 열거하여 꾸짖는 것은 그의 선(善)한 점이 많은 것이니, 장문중(臧文仲)이 인(仁)하지 못한 것이 세 가지이고 지혜롭지 못한 것이 세 가지라 한 것이 이것이다. 그 일을 하나하나 열거하여 칭찬하는 것은 오히려 미진한 점이 있는 것이니, 자산에게 군자의 도가 네 가지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주-D005] 평상시에는 …… 한다 : 《효경(孝經)》 〈기효행장(紀孝行章)〉에 보인다.[주-D006] 내가 …… 본다 : 성호가 기술한 묘갈명이 석은공(石隱公)의 훌륭한 문장 덕에 후대에 전해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삼도(三都)는, 진(晉)나라의 문장가인 좌사(左思)가 10년 동안 고심하여 구상한 끝에 완성했다는 〈삼도부(三都賦)〉를 말한다. 이 문장이 천하에 명문(名文)으로 알려져서 호사가들이 그것을 서로 다투어 전사(傳寫)하는 바람에 낙양(洛陽)의 종잇값이 폭등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左思》 여기에서는 석은공의 훌륭한 문장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