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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민(申舜民)은 천하의 뛰어난 선비이다. 그 학문은 통하지 못한 것이 없고 그 재주는 충분히 큰 임무를 맡을 만했다. 그런데 성명(聖明)하신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고도 끝내 그 내면에 온축한 것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였으니 군자들이 애석하게 여긴다.
순민은 휘(諱)는 경준(景濬)이고 호(號)는 여암(旅庵)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의 대성(大姓)으로 그 선조는 대대로 현인(賢人)과 이름난 관리가 많았다. 우리 세조조(世祖朝)에 이르러 대사간 말주(末舟)가 좌명원훈 공신(佐命元勳功臣) 숙주(叔舟)의 아우로서 관직을 버리고 순창(淳昌)의 남산(南山)에 은거하니 자손들이 그 뒤를 이어 이곳에 살게 되었다. 그의 손자 좌찬성 공제(公濟)가 대를 이어 그 어진 덕을 이어갔고 3대를 전하여 주부(主簿) 책(𣽤)에 이르러 효행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사적이 실렸다. 그의 아들 참봉 극순(克淳)이 바로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는 휘 운(澐)이고, 조부는 찰방 휘 선영(善泳)이다. 부친은 휘 래(淶)이고 모친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진사 의홍(儀鴻)의 따님이다.
공은 숙종 임진년(1712, 숙종38) 4월 15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특출한 재질이 있어 5세에 《시경》을 읽었다. 조금 장성해서는 학문의 폭이 넓고 기억을 잘하였다. 뜰의 늙은 살구나무가 오랫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였는데 공이 글을 지어 책망하자 이해에 열매가 갑자기 무성하게 열리니 고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공은 사람됨이 진중하고 큰 뜻을 지니고 있어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천하의 일이 모두 나의 직분이니 한 물건이라도 그 이치를 궁구해내지 못함은 나의 수치요, 하나의 기예라도 제대로 하지 못함은 나의 흠결이다.”라고 하여 마침내 성인의 글부터 마음을 깊이 쏟아 그 도리를 찾아내어 대지(大旨)를 얻었다. 그리고서 9류(流)와 2교(敎)를 두루 섭렵하고 천문(天文), 지리(地理), 음악, 의술 및 복서(卜筮)의 학문과 역대의 전장제도(典章制度)와 해외의 특이한 책들에 이르기까지 그 깊은 뜻을 캐내고 그 요점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 산천(山川)과 도리(道里)에 대해 더욱 일목요연하게 알아 “무릇 장수가 되는 이들은 모름지기 먼저 지리(地利)를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세상일에 대해 자신의 책무로 여기는 점이 이와 같았다.
무오년(1738, 영조14)에 소사(素沙)로 이사하여 〈소사문답(素沙問答)〉을 지었고, 신유년(1741)에 직산(稷山)으로 이사하여 〈직서(稷書)〉를 지으니, 모두 사물을 관찰하여 이치를 깨달은 말로써 깊은 경지에 도달한 독창적인 견해가 많은 글이었다.
갑자년(1744)에 순창으로 돌아왔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에 합격하고서 우연히 지리산에 유람 갔다가 그곳을 즐거워하여 마침내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않았다.
갑술년(1754) 여름에 증광 문과(增廣文科) 을과(乙科)에 뽑혀 승문원(承文院)에 분관(分館)되고, 휘릉 별검(徽陵別檢)을 배수하고, 규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고, 자리를 옮겨 병조와 예조의 낭관이 되었다.
경진년(1760)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고 얼마 뒤 이조의 낭관이 되었고 승진하여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임오년(1762) 봄에 외직으로 나가 서산 군수(瑞山郡守)가 되었을 때 큰 기근을 만났는데 녹봉을 덜어 구휼하는 비용으로 대고 소금을 구워 곡식과 바꾸니 온 경내에 유랑하거나 굶주려 여윈 사람이 없었다. 이듬해에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돌아가게 되니 서산군의 남녀노소 모든 사람이 울부짖으며 길을 막고서 공의 옷을 남겨주어 사당에 모시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공이 웃으면서 거절하였다. 조정으로 돌아오던 도중에 충청 도사(忠淸都事)로 이임되어 향시(鄕試)를 관장하였다.
이듬해에 충청도에 머물면서 조운(漕運)을 감독하고 기한이 차서 고향으로 돌아가 두 차례 장령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향리에 머물고 있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다. 겨울에 다시 외직으로 나가 장연 현감(長淵縣監)이 되었다. 응지(應旨)하여 민은시(民隱詩)를 올리니 상이 그 문사(文辭)를 매우 칭찬하였다. 공이 다스릴 때 겉으로는 관대하게 하고 안으로는 분명하게 하여 간사하고 음험한 이들을 능히 굴복시켰다. 한 번은 관아에 앉아 있다가 군교(軍校)에게 명하기를 “어느 방향으로 몇 리쯤 되는 무슨 숲 속에 도적이 있을 터이니 내일 아침까지 잡아오라.”라고 하였는데 군교가 가서 공의 말처럼 도적을 잡았다. 근세에 이 현을 다스린 자들 중 많은 수가 죄를 얻어 떠났는데, 전하는 말에 관아 뒷산에 몰래 무덤을 쓴 자가 있기 때문에 관아에 이롭지 않다고들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곳이 어딘지는 찾아내지 못하였다. 공이 하루는 뒷산을 산보하며 노닐다가 아전에게 한 곳을 파보라고 명하였는데 별다른 소득이 없었고, 야밤에 다시 몇 보쯤 옆의 곳을 파보게 하였는데 역시 소득이 없었다. 3일째 밤에 군교들을 나누어 산길에 매복시키고서 “관을 메고 지나가는 자가 있거든 따져 묻지 말고 단지 그가 누구인지만 염탐하라.”라고 하였는데, 그날 밤 과연 관을 메고 지나가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현의 교활한 아전이었다. 그리고 그 무덤구덩이를 보니 앞서 팠던 두 구덩이 사이에 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며 신인(神人)이라고 여겼다.
을유년(1765, 영조41)에 헌납으로 소명(召命)받았고 얼마 뒤 통례(通禮)를 배수하였다.
정해년(1767)에 사간으로 승진하였는데 마침 간관으로서 지방에 있는 사람이 많아 공이 연좌(連坐)되어 면천(沔川)으로 유배 갔다가 한 해 뒤에 풀려나 돌아왔다.
기축년(1769)에 종부시 정(宗簿寺正)으로 명을 받들어 강화도의 선원각(璿源閣)을 수리하고 일을 마치고 나서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공의 명성을 듣고 넌지시 도성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는데 공이 움직이지 않자 마침내 상에게 말하기를 “신모(申某)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가 있습니다. 비국 낭청(備局郎廳)으로 소벽(召辟)해야 합니다.”라고 하여, 상이 명하여 신속히 역마로 불러 《여지편람(輿地便覽)》을 감수하게 하였다.
이듬해에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배수하였는데 비국 낭청을 예전과 같이 겸하게 하였다. 이때에 상이 또 문학(文學)에 재능이 있는 선비 여덟 사람을 선발하여 《문헌비고(文獻備考)》를 찬수하면서 편집청(編輯廳)을 차렸는데 공은 〈여지고(輿地考)〉를 담당하였다. 상이 자주 공을 입시하라 명하였는데 공이 하나하나 진달하여 응대하면서 한밤중에 이를 때가 많았다. 상이 기특하게 여겨 술과 음식을 내리고 특명으로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에서 돈과 쌀을 지급하고 어영청(御營廳)과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땔나무와 숯을 대어주어 타향살이하면서 겪는 곤란을 돌봐주게 하였다. 그러나 공이 몇 달이나 굳게 사양하여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해 여름에 책이 완성되자 상이 친히 책머리에 서문을 쓰고는 “이 책의 편집(編輯)은 신모의 공이 많다.”라고 하고 특명으로 통정대부의 품계를 더하였고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하였다. 곧이어 자리를 옮겨 병조 참지가 되었는데 상이 명하여 《팔도지도(八道地圖)》를 감수하게 하였다. 감수가 끝나자 병풍으로 만들어 전각 안에 걸어두니, 이로써 상이 공이 견문과 재주가 많아 크게 쓸 만함을 더욱 알게 되어 좋은 지역을 골라 관리로서 재능을 시험해보라고 명하고 다시 승지를 제수하였다. 일찍이 조용히 입대하였을 때 상이 크게 탄식하며 “어찌하여 서로 이렇게 늦게 만났는가. 승지는 머리가 세었고 나는 여든의 나이로구나. 임금과 신하가 늘그막에 만났으니 한스러워 할만하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승지는 부모님이 살아 있는가?”라고 하여, “부모께서 모두 살아 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상이 슬퍼하면서 하유하기를 “지금 그대가 섬기는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이니 나를 버리고 멀리 가지 말라.”라고 하였다. 당시 대신(臺臣) 최익남(崔益男)이 상소하여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을 논핵하니, 상이 공을 불러 시비를 물었는데, 공은 주저하면서 세 번이나 물었음에도 세 번을 대답하지 않았다. 상이 묵묵히 있다가 조회를 파하고서 공을 호연(湖沿)으로 유배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 일은 상소 내용에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공이 그 사안을 지목하여 말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은진(恩津)으로 유배되었는데 상이 묻기를 “그곳이 호남과 가까운가? 신모가 여기에서 호남으로 돌아갈까 걱정이다.”라고 하여 수원으로 유배지를 고쳐 명하였다가 얼마 뒤에 용서하였다. 공은 이때부터 도성에 집을 빌려놓고서 감히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지 못하였다.
신묘년(1771, 영조47) 봄에 다시 승지에 제수되고 곧이어 북청 부사(北靑府使)를 배수하였다. 북방의 풍속이 지나치게 질박하고 문채가 없었는데 공이 자질이 준수한 백성을 학교에 모아 직접 가르치고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니 사민(士民)들이 둘러서 보면서 차츰 윗사람을 친애하고 장관을 공경하는 의리를 알게 되었다.
계사년(1773)에 체직되어 승정원에 들어왔고 서승(序陞)하여 좌승지에 이르렀는데 얼마 안 있어 강계 부사(江界府使)에 제수되었다. 강계는 서쪽 변경의 웅장한 고을이었으므로 공을 시샘하는 자가 논핵하여 말하기를 “학문과 식견은 넉넉하지만 사무에는 엉성합니다.”라고 하니 공이 인의(引義)하여 체직되었다. 이해 가을에 외직으로 나가 순천 부사(順天府使)가 되니 순천은 순창과 땅이 서로 인접하여 친척과 고구(故舊)들이 날마다 공을 의지하여 찾아왔는데, 공은 그들을 피곤한 기색 없이 대접하면서 일처리는 한결같이 법대로 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개차되었다. 당시 공의 나이가 이미 예순셋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많이들 측은히 여겼는데 공은 편안한 기색으로 길에 오르면서 “임금의 명에 감히 험이(險夷)를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년이 지나 어사 홍상성(洪相聖)과 일을 다투다가 파직되어 잡혀가 신문받았는데 상이 그 정상을 살피고 곧바로 놓아주었다.
병신년(1776, 영조52)에 영묘(英廟)께서 승하하니 인산(因山)을 마쳤음에도 공은 여전히 소식(素食)하였고 매번 선조(先朝)의 일을 말할 때마다 눈물을 함께 흘렸다.
기해년(1779, 정조3)에 이르러 공이 다른 사람에게 고하기를 “내가 선왕께 지우를 받아 여러 차례 은혜로운 말씀을 받들었다. 그러므로 차마 멀리 떠나지 못하였는데, 이제 삼년의 상을 마쳤으니 돌아갈 만하다.”라고 하고 마침내 남산의 옛집으로 물러가 거하면서 서책에 푹 빠져 뜻을 탐구하고 숲과 골짜기를 소요하면서 담박하게 세상살이에 대한 온갖 생각이 없었다. 다섯 번이나 지방관을 맡았음에도 사사로이 집안을 위한 재물을 영위하지 않아 부서진 집과 황폐한 밭뙈기에 거친 밥도 끼니마다 대지 못하였지만 그러한 상황에 편안하게 처하였다.
경자년(1780, 정조4)에 세 차례 승지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여름에 갑자기 두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근래 기운이 피곤함을 느끼니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평생의 일을 매우 자세하게 낱낱이 서술하였다. 다음 날 손님과 바둑을 두다가 조금 어지러워 침상에 누웠는데 얼마 뒤 초연히 세상을 떠나니 이때가 신축년(1781, 정조5) 5월 21일이었다. 석 달 뒤 모일(某日)에 남산 모좌(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세 번 장가들었다. 원배(元配)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음랑(蔭郞) 형만(亨晩)의 따님으로 일찍 죽어 자식이 없다. 차배(次配) 강릉 최씨(江陵崔氏)는 학생 돈오(惇五)의 따님이고, 후배(後配) 평창 이씨(平昌李氏)는 음랑 광집(光潗)의 따님이다. 2남 3녀 가운데 진사 이영갑(李永甲)에게 시집간 장녀는 최씨 소생이고, 아들 재권(在權)과 두권(斗權) 그리고 이호연(李浩淵)과 윤치정(尹致鼎)에게 시집 간 두 딸은 모두 이씨 소생이다.
내가 갑술년(1754, 영조30) 봄에 호남에서 시험을 관장할 때 수령 두 사람이 부시관(副試官)이 되었다. 내가 본도에서 이름이 알려진 선비가 누구인지 물으니, 모두 “순창의 신모라는 사람이 남쪽 지방의 으뜸가는 선비입니다. 이 한 사람을 얻으면 방문(榜文)을 빛나게 채우기에 넉넉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시장(試場)을 열고서 수레 제도에 대한 책문(策問)을 내었는데 늦게 바친 한 시권(試券)을 보고서 내가 책상을 치며 “내가 신모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두 부시관이 “그 사람인지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일단 두고 보시오.”라고 하고 마침내 그 시권을 제1등에 뽑아두었다. 탁명(坼名)해보니 과연 그 사람이었으므로 두 부시관이 모두 놀랐다. 회시 때에 또 높은 등급으로 합격하여 내가 그 집을 찾아가 만나보니 참으로 뛰어나고 특별한 선비였으므로 마침내 서로 교분을 맺었다. 공이 도성에 있을 때 교유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오직 나와 교유하면서 고전을 토론하고 고금의 역사를 평론하면서 날이 저물어 밤이 깊어가는 것도 알지 못하였으며, 혹 며칠을 머물러 묵으면서 흥이 다하면 돌아갔다. 나 역시 술병을 챙겨 나귀를 타고서 때때로 남곽(南郭)에 있는 공의 우거(寓居)를 찾아갔는데 공은 바야흐로 붓을 잡고 글을 지으면서 오뚝하니 정신을 집중한 채 문 밖에 손님이 왔는지도 모르다가 기뻐하면서 맞이하여 웃으며 몇 잔 술을 마시고 초고를 꺼내 보여주며 이것저것 물어보며 의논하였다. 그리고 잠시 뒤에 “그대는 내가 책을 많이 보았다 여기시오? 책이 아무리 많다 한들 나에게는 무익하니 그저 기문(記問)의 학문일 뿐이라오. 학문은 도를 아는 것이 귀하고 도는 자득하는 데 달려 있으니 맹자는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라고 하였고 관자(管子)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귀신이 깨닫게 해줄 것이다.’라고 하였소. 이것이 자득하는 방법이오.”라고 하였으니, 드넓게 배우되 요점을 알고 높은 데 뜻을 두되 실제적인 것에 힘을 써서 백가(百家)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여 오도(吾道)로 절충했던 것이다. 이치를 분석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변별할 때에는 곧바로 깊고 미묘한 부분을 캐내었는데 모두 이전 사람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이자 요즘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내가 공손한 마음으로 놀라며 탄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혹 은연중에 시원하고 분명하게 계합(契合)하여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으면 공 또한 기뻐하며 손뼉을 치면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음을 즐거워하였으니, 옛날의 이른바 “마음을 함께하는 말은 그 향기로움이 난초와 같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이 이미 사방의 이곳저곳에서 벼슬살이를 하였고 나 또한 험난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 무상하게 서로 만났다 흩어졌다 했는데, 비록 천 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면한 것과 다를 바 없이 지낸 30년 세월이 하루와도 같았다. 지난날 내가 좌천되어 북쪽 변경에서 벼슬살이할 때 공도 남쪽으로 돌아갔는데 한 번 이별에 5년 세월이 흘러 마침내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매번 지난날을 생각할 때마다 서글피 길게 탄식하였는데 지금 공의 사위 이영갑과 문인 유숙지(柳肅之)가 공의 행사(行事)를 적어와서 나에게 고하기를 “공이 아니면 누가 여암의 묘갈명을 맡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그렇다. 내가 참으로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하고서 마침내 눈물을 훔치며 서술하였다. 공의 문장에 대해서는 내가 일찍이 그 유집(遺集)에 서문을 지었으니 여기에서 다시 논하지 않는다. 공은 저술이 지극히 많은데 《의표도(儀表圖)》 《부앙도(頫仰圖)》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일본증운(日本證韻)》 《언서음해(諺書音解)》 등의 여러 저서는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하니 여기에서 그 학문의 풍부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에게는 오히려 겨나 쭉정이 정도라 하겠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옛날 우리 부자께서 / 昔吾夫子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보셨는데 / 登泰山而小天下
천하가 어찌 작으리오 / 天下豈小
태산이 높은 것이로다 / 泰山之高也
그러나 이는 구주의 천하이지 / 然是九州之天下
온 세상 사대주(四大洲)를 말한 것이 아니네 / 非謂寰海之四大
저 지극히 큰 사대주를 / 彼四大之至大
어찌 태산이 작게 만들 수 있으랴 / 豈泰山之能小
군자가 도를 추구함은 / 君子所以求道
높고 오묘한 것까지 한껏 다 보는 데 달렸으니 / 在縱觀乎高妙
대담했던 이 사람이여 / 若有人兮大膽
곧바로 깊은 경지 캐내며 멀리까지 밝게 보고 / 直鉤深而瞭遠
어떤 물건이든 숨겨져 분석해내지 못하는 것 없었네 / 物無隱而未劈
이는 견문에 한계가 없어 / 蓋不限於聞見
지혜는 찬란히 밝고 / 炯炯兮慧性
혜안(慧眼)은 독보적으로 탁월했기 때문이네 / 犖犖兮隻眼
오직 이 몇 자 높이 말없는 비석이 / 惟玆數尺之頑石
변하지 않을 형적(形跡)이야 지켜가겠지만 / 將以護未化之形
무궁한 명성에 어찌 도움될 수 있으랴 / 曷能助無窮之名耶
[주-D001] 좌승지 …… 묘갈명 : 이 글의 말미에 사위인 이영갑(李永甲)을 진사로 호칭하고 있는데, 이영갑이 진사에 합격한 것은 1783년(정조7)이고 《승정원일기》를 참고하면 이계의 몰년인 1802년 이후 1805년(순조5)까지도 진사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1783년에서 1802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주-D002] 좌명원훈 공신(佐命元勳功臣) …… 버리고 : 신숙주가 세조를 도와 단종(端宗)을 몰아낸 일을 부끄러워하여 관직을 버린 것이다.[주-D003]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 신책의 사적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실려 있다.[주-D004] 9류(流)와 2교(敎) : 9류는 선진(先秦) 시대의 9개 학술 유파인 유가(儒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를 가리키고 2교는 경우에 따라 지칭하는 대상이 다르지만 여기에서는 도교와 불교를 가리킨 듯하다. 9류와 2교는 곧 제가(諸家)의 방대한 학문을 가리킨다.[주-D005] 갑자년에 …… 않았다 : 원문의 기술로는 갑자년에 초시에 응시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원문에도 갑자년과 분리되는 어감의 ‘상(嘗)’ 자가 있고, 《여암유고(旅庵遺稿)》 권13 〈행장(行狀)〉의 서술 순서에도 무진년(1748, 영조24) 모친상을 당한 다음에 이 일이 기술되어 있다.[주-D006] 두 …… 제수되었는데 : 앞서 1760년에 장령에 제수된 사실이 있으므로 원문의 ‘재(再)’가 ‘다시’의 의미로 오해될 수 있으나, 뒤의 ‘모두’라는 표현을 감안하면 당해년인 1764년에 두 차례에 걸쳐 장령에 제수된 것이다. 실제 《승정원일기》 해당 연도를 고찰해보면, 9월 17일에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계속 지방에 머물고 있다가 29일에 부호군(副護軍)으로 불리고 있으며, 다시 12월 3일에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이튿날 부호군이 되었다.[주-D007] 민은시(民隱詩) : 백성들이 겪는 괴로움을 읊은 시이다.[주-D008] 이로써 …… 제수하였다 : 이 묘갈명에는 자세히 기재하지 않았으나, 임천상(任天常)의 《궁오집(窮悟集)》 권8에 있는 〈좌승지 여암 신공에 대한 행장[左承旨旅菴申公行狀]〉에 따르면, 이조에 명하여 좋은 지역을 골라 관리의 재능을 시험해보라고 명한 것은 《문헌비고》의 편집이 끝난 이후이고, 승지를 제수한 것은 편집청의 세초(洗草)가 끝나고 연회를 마친 뒤의 일이다.[주-D009] 대신(臺臣) …… 논핵하니 : 1770년(영조46) 11월 10일에 최익남이 상소하여 세손이 사도세자의 묘사(墓祠)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공격하고 이에 협조한 사람으로 김치인 등을 들면서 논핵하였다. 영조는 최익남을 국문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英祖實錄 46年 11月 10日, 12月 2日ㆍ4日》[주-D010] 호연(湖沿) : 보통 호남의 연해 지방을 가리키지만, 이 뒤에 기술한 내용을 보면 처음 귀양 간 곳이 충청도 은진이고, 영조가 신경준이 호남 가까운 지방에 귀양 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으므로 보통의 뜻처럼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호남과 호서를 구분할 때 호(湖)는 금강(錦江)이나 벽골지(碧骨池), 의림지(義林池) 등으로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적으로 충청과 전라 접경의 강과 저수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때의 호연은 호남보다는 호서의 강이나 저수지 인근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주-D011] 마음의 …… 못한다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보인다.[주-D012] 생각하고 …… 것이다 : 《관자(管子)》 〈내업(內業)〉에 보인다.[주-D013] 마음을 …… 같다 :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보인다.[주-D014] 옛날 …… 보셨는데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공자가 동산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는 말이 보인다.[주-D015] 구주(九州) : 중국 전역을 지칭하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