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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기양(基讓)이고,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茯菴)이니, 광주 이씨(廣州李氏)이다. 그 선조(先祖)에 좌의정(左議政) 극균(克均)이 연산군(燕山君) 때 화를 입은 뒤로 4대 동안 떨치지 못하였다가 한음(漢陰) 덕형(德馨)이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공덕(功德)이 매우 드러났다. 한음의 아들 여규(如圭)가 음사(蔭仕)로 판결사(判決事)가 되고, 그 뒤 5대는 한미하였다가 건륭(乾隆 명 고종(明高宗)의 연호) 갑자년(1744, 영조 20)에 공이 태어나서 만달(晩達)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신유년(1801, 순조 1)에 화를 입어 단천(端川)으로 귀양갔다가 오래지 않아 죽으니, 군자(君子)들이 슬퍼하였다.
공은 크고 준수(俊秀)한 체격을 타고났다. 이마는 둥글고 튀어나왔으며, 얼굴은 훤하게 넓으며, 코ㆍ입ㆍ광대뼉ㆍ볼이 모두 우뚝하고 풍만하였다. 키는 8척에 살빛은 희고 헌칠하였으나 수염은 성긴 편이었다. 그러나 변설(辯舌)은 물이 흐르는 것 같았으며 뜻에 맞는 데에 이르면 고금(古今)의 사례(事例)를 들어 호리(毫釐)를 변석하는 것이 마치 영장(郢匠)이 나무를 깎을 때 자귀를 들면 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멋대로 행동하고 예의에 얽매이지 않았다. 자란 뒤에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 선생에게 수학(受學)하고 장천(長川) 이철환(李嚞煥) 선생과 교유(交遊)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성호 선생(星湖先生)의 문인들이다. 공은 이들에게서 천인성명(天人性命)의 학을 듣고 물러나서는 경(經)과 사(史)를 익혀 모두 박식ㆍ정통하였고,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과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등과 학문을 강습하여 덕을 쌓았다.
갑오년(1774, 영조 50) 겨울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하여 4년 뒤 영릉 참봉(寧陵參奉)이 되고 7년 사이에 여러 번 승진하였는데 문의 현령(文義縣令)이 되어서는 자혜(慈惠)로운 정사로 소문이 났다.
현령을 그만두고 돌아와서는 땅 한 마지기 없이 이천(利川)에 우거(寓居)하니, 초가(草家) 단칸은 지붕도 이지 못하여 서까래가 드러났으며, 낮은 울타리에 비바람이 들이쳐 집안이 썰렁하였다. 공은 양이 커서 한 끼에 몇 사발의 밥을 먹어야 하는데도 밥커녕 시래기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노점[虛勞]과 허기병을 얻었다.
몇 년 뒤 다시 벼슬에 나아가 진산 현감(珍山縣監)이 되니, 이때는 건륭 말년으로 우리 정종대왕께서 채번암(蔡樊菴)을 상국(相國)에 등용하여 붕당을 타파하고 황극(皇極)을 세우시는 한편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현자(賢者)를 구하셨다. 또 8년(을묘) 봄에는 이가환을 발탁하시어 정경(正卿 판서 判書)으로 삼고 신 용(鏞)을 하대부(下大夫)로 삼으시니, 악당(惡黨)들이 꺼려 서로 무함하고 헐뜯었다.
여름 6월에 대사헌 권유(權裕)를 사주하여 사학(邪學)을 감싼다는 명목으로 상국을 공격하게 하고, 가을 7월에 산반(散班) 박장설(朴長卨)을 시켜 사학의 우두머리라고 가환을 공격하였다. 근거없이 떠도는 말이 날로 심해지자 상은 괴롭게 여기시어 가환을 충주 목사로 나 용을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내보내셨으니 이는 그들을 조정하여 분쟁을 중재(仲裁)하려는 처사였다.
그리고 진산 현감인 공을 서울로 불러 태학(太學)의 과시(課試)에 응시케 하셨다. 상이 공을 인견(引見)하고는 매우 기뻐하여 즉석에서 부(賦) 한 편을 시험해 보시고 특별히 사제(賜第)하시니, 이때가 9월이었다. 10월에 공을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제수하시고는 상국에게,
“경(卿)은 늙고 경을 대신할 만한 사람은 없어 근심하였는데 지금 이기양을 얻으니 나는 아무 걱정이 없다.”
하셨다. 오래지 않아 가환과 나도 부름을 받아 다시 돌아왔고, 고(故) 상국(相國) 허적(許積)도 복관(復官)되었다. 당시 악당들이 가환과 나 두 사람을 제거하려는 사실을 상이 아셨기 때문에 외견(外見)으로는 우리 두 사람을 내치는 것처럼 하셨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한 사람을 더 보태어 세 사람이 되게 하시니, 악당들이 매우 분해하였다. 그 당시 금옹(錦翁 이가환을 가리킴)이 충주에서 나에게 보낸 편지에,
“사흥(士興)이 왕은(王恩)을 입은 것은 선류(善類)의 다행이다. 그러나 두 가지[枝]의 창(槍)이 장차 세 가지의 창으로 변할 것이다.”
하였는데,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공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사위가 되었고, 작은아들은 금옹과 약혼하였다. 그때 공에 대한 악당들의 공격이 날로 심하여 금옹이 겁이 나서 성혼(成婚)하고자 하지 않으니, 상께서 이 소문을 들으시고,
“장차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질 것이다. 자기들끼리 불화하는 것이 근심이지 외부의 공격이야 어찌 두려울 게 있겠는가.”
하시고, 이익운(李益運)과 나에게 이가환을 책망하여 언약을 어기지 말고 성혼토록 하라고 하셨다. 오래지 않아 복암이 등용되었으니, 상께서 우리들을 한집안 사람처럼 보심이 이와 같았다.
병진년(1796, 정조 20) 봄 공은 헌납(獻納)에 제수되어 삼사(三司)를 출입하고, 정사년(1797, 정조 21) 봄에는 의정부에서 공을 불러 검상(檢詳)을 삼고, 8월에는 하대부로 발탁되어 승정원 승지가 되었고, 10월에는 대신(大臣)의 천거로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되었다. 이는 상이 공을 빨리 경상(卿相)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하셨기 때문에 이와 같이 벼슬의 차례를 밟지 않고 탁용(擢用)하셨던 것이다.
공이 젊어서부터 가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공이 의주에 가면 반드시 재산을 모아 살림을 윤택하게 할 것으로 알았는데, 이와 반대로 공은 돈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날마다 돈을 흩어 가난한 친구와 친척들을 구제하니, 공을 찾아온 사람마다 모두 만족해 하였다. 잠화(潛貨 밀수(密輸))하다 잡힌 역관(譯官)이나 의주 상인(商人)들의 물건을 모두 창고에 간직하였다가 사신(使臣)의 행차가 멀리 떠난 뒤에는 그 물건을 모두 본인들에게 돌려주고 조금도 취하지 않으니, 환성(歡聲)이 우뢰와 같아 서울에까지 진동하였다. 이런 일은 고금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1년 남짓 있다가 돌아오려 할 때 의주부의 재정 결손이 80만이나 되니, 공을 아끼는 친구들이,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잘못이다.”
하며 공을 나무라니, 공은,
“진실로 나의 죄를 안다. 그러나 장부(帳簿)를 살피고 계산을 맞추어 남는 것이 있은 뒤에 쓰려 한다면 평생토록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은 역시 지언(至言 이치에 꼭 맞는 말)이라 하겠다. 기미년(1799, 정조 23)에 조정에 들어와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는데, 이해 봄 번옹(樊翁)이 죽었다.
10월에 공이 호조 참판으로 부사(副使)가 되고 지금의 상국 김재찬(金載瓚)이 정사(正使)가 되어 함께 중국으로 가는데, 정사 김재찬이 공과 이야기를 해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친교(親交)를 맺고, 사행(使行)에서 돌아온 뒤에도 서로 방문하여 매우 사이좋게 지냈다. 김공은 원래 남을 방문하거나 서로 어울리는 성품이 아니었는데, 공 때문에 이런 성품을 고쳤으니 서울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공이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 굴대[軸] 끝에 십자(十字)로 된 풍차(風車)를 설치하고 아래에는 횡목(橫木)을 설치하여 만든 박면교거(剝棉攪車)가 있는데 목화(木花) 따는 사람이 그 의자에 앉아 발판을 밟으면 하루에 수백 근의 목화를 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구매(購買)해 와서 조정에 바치니, 상은 삼영문(三營門)에 명하여 각각 그 양식(樣式)에 따라 대여섯 개를 만들어 팔도(八道)에 반포하게 하셨다. 이때 사람들은 박면교거를 구입해 온 공의 공이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공에 비길 만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상이 승하하시니 그 일도 드디어 중지되었다.
경신년(1800, 정조 24) 봄 병조 참판이 되고 우승지(右承旨)가 되었으며, 여름에 형조 참판이 되고 한성 우윤(漢城右尹)이 되고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6월에 정종이 승하하셨고, 가을에는 예조 참판이 되고 겨울에는 좌승지가 되었다. 신유년 2월 9일에 큰 옥사(獄事)가 일어나 금옹(錦翁) 등 일대(一隊)가 이미 옥에 갇혔으나 12월까지 공은 여전히 승지로 있었다. 16일에 목만중(睦萬中) 등이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상소(上疏)하여 공을 공격하게 하니, 사헌부도 잇달아 소(疏)를 올렸다. 마침내 공이 체포ㆍ하옥되니, 물론(物論)은 공을 억울하게 여겼다. 목만중은 곧 스스로 상소하기를,
“이기양은 명조(名祖)의 후손으로 평소 그를 아끼는 제우(儕友)가 많았으나, 본래 성품이 음흉하고 거짓되어 잘못을 감추는 데 능합니다. 그러나 기양이 권철신(權哲身)ㆍ홍낙민(洪樂敏)ㆍ이가환 등과 혼인을 맺었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으므로 그에 대한 징치(懲治)는 그저 준동(蠢動)하는 무리와는 더욱 구별이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옥관(獄官)은 드디어 이 목만중의 말에 의거하여 고문(拷問)하였다. 아, 공이 권씨ㆍ홍씨와 혼인한 것은 그듥에게 명성만 있고 비방이 없을 때였고, 금옹과 혼인한 것은 선조(先朝)께서도 아시는 바였다. 공은 평생 동안 서서(西書 곧 기독교 서적)를 한 자도 보지 않았건만 혼인한 것 때문에 이같은 무함을 입었으니, 이런 일은 기축ㆍ경신 두 옥사(獄事) 때에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옥관이 공을 끝까지 신문하였으나 증거가 나타나지 않자 드디어 단천(端川)으로 귀양보냈다.
단천은 마천령(摩天嶺) 아래 슬해(瑟海) 가에 위치한 곳이므로 기후가 차다. 공은 본래 병이 있는 몸이라서 찬 기후를 견디지 못하여 임술년(1802, 순조 2) 12월 6일에 적지(謫地)에서 죽었으니, 악인(惡人)이 선류(善類)를 해침이 이처럼 혹독했다. 그뒤 8년째 되는 기사년(1809, 순조 9) 가을에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이 경연에서 공의 무죄를 아뢰어 마침내 은전(恩典)을 입어 죄명을 씻고 복작되었다. 다음해 경오년 가을 나도 방면의 은전을 받았으나 이기경(李基慶)의 대계(臺啓)로 인하여 9년 뒤인 무인년 가을에야 비로소 방면되었다. 공과 같은 죄목으로 귀양갔던 나는 살아서 돌아왔는데 공은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공의 죽음은 실로 억울한 죽음이었다.
아, 정여립(鄭汝立)이 역적이 아닌 것이 아니나 사람이 기축옥사를 원옥(冤獄)이라 하는 것은 최영경(崔永慶)ㆍ정언신(鄭彦信) 등 죄없이 죽은 이가 많기 때문이고, 허견(許堅)이 역적이 아닌 것이 아니나 경신옥사를 원옥이라 하는 것은 이원정(李元楨)ㆍ유혁연(柳赫然) 등 죄없이 죽은 이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록 역적과 관련된 사람을 다스리는 옥사라 할지라도 억울하게 죄를 받은 사람이 있으면 사화(士禍)인 것이다.
공이 젊어서는 사납고 난폭하였으나 단가서(丹家書 도가(道家)의 서적)를 얻어 읽은 뒤로는 생물 해치기를 꺼려서 아무리 작은 개미나 이[蝨]라 할지라도 밟거나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이 백성을 다스릴 적에 가는 곳마다 모두 인자(仁慈)와 온화로 다스렸고 형벌과 위엄으로 다스린 적이 없었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목릉(穆陵 선조의 능호(陵號)) 이전의 명신(名臣)과 석보(碩輔)들은 유택(遺澤)이 있어 지금 조정에 있는 이들이 대부분 그 자손들이지만, 현종ㆍ숙종 이후로는 당론(黨論)이 더욱 고질이 되어 서로 끝없이 살해하였기 때문에 당시 일을 주도(主導)하던 신하들의 자손은 대부분 몰락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편당(偏黨)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
하였다. 임오년(1762, 영조 38)에 장헌세자(莊獻世子)가 죽으니 세상에는 두 설(說)이 있었다. 하나는 그 당시 투서(投書)한 것을 간쟁(諫諍)이라 하는 설이고 또 하나는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남을 해쳤다는 설인데,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말이 바로 임오년의 의리(義理)라고 하였다. 정종 때는 집에 있는 자나 벼슬에 나온 자를 막론하고 이상 두 설 중 반드시 한 설을 주장하였고, 과격한 자는 격분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나 공은 평생 동안 흑백(黑白)을 말하지 않아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 할지라도 공이 편당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은 이가 없었다. 공이 비록 자신의 주의(主義)를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공의 마음을 안다. 공의 생각에는, 장헌세자의 일은 신하로서 감히 차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모두 당심(黨心)으로 투서를 간쟁이라 칭찬하기도 하고 또는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해쳤다고 헐뜯기도 하니, 차라리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 일을 논하는 자들은 연거푸 상소문과 차자(箚子)를 올려 감히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라 하면서도 사실에 있어서는 감히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을 말하고 있으니, 진실로 말하지 않은 이는 오직 공 한 사람일 따름이다.
공은 경전(經傳)의 해석에 모두 성호(星湖)의 뜻을 따랐으나 사람됨이 혼후(渾厚)하여 고금(古今)의 시비(是非)를 경솔히 말하지 않으니, 친한 친구도 그가 어느 설을 주장하는지를 알 수 없었고, 다만 그의 문장의 규모(規模)가 크고 조리(條理)가 분명하며 연구와 핵실(覈實)이 정밀하여 속된 선비들이 미칠 바가 아니라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저서로는 《복암유고(茯菴遺稿)》 4권이 있으나 아직 분편(分篇)하지 못하였다.
아버지 휘(諱) 종한(宗漢)은 이조 참판에 추증(追贈)되고 할아버지 휘 광운(光運)은 이조 참의에 추증되고 증조부 휘 복인(復仁)은 음사(蔭仕)로 하양 현감(河陽縣監)을 지냈다. 본생(本生)의 조부 휘 광기(光箕)는 진사(進士)였고 증조부 휘 우인(友仁)은 음사로 현풍 현감(玄風縣監)을 하였다. 생가(生家)와 양가(養家)의 증조는 본래 사촌 형제였다. 어머니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현서(玄瑞)의 따님이고, 계모(繼母)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경한(經漢)의 따님인데,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경(檠)의 따님이고, 음사로 목사(牧使)를 지낸 원(源)의 손녀이다.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맏 총억(寵億)은 을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둘째 방억(龐億)은 창상(滄桑)의 변은 거치고 나서 금년에 진사가 되니, 사람들은 모두 고목(枯木)에 꽃이 피었다고 하였다. 방억의 아들이 총억의 양자가 되었다. 공의 관(棺)이 단천에서 돌아와 광주(廣州) 율현리(栗峴里) …… 원문 1자 빠짐 …… 좌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왕이 현자 구하기를 / 維聖急賢
목마른 자가 물 찾듯 서두시어 / 如渴求淸
공이 남쪽에서 오니 / 公來自南
조정으로 부르셨네 / 王召于庭
현감을 그만두고 / 遂解縣紱
홀연 홍문관에 올라 / 欻焉登瀛
삼년 만에 / 歲旣三周
아경이 되었네 / 超躋亞卿
거룩한 용모와 깊은 학문은 / 偉貌邃學
조상의 덕이고 벗의 명성이로세 / 祖德友聲
가환과 나 둘을 내친 것이 아니라 / 匪伊兩絀
우리를 셋으로 만들어 주셨네 / 俾爾三成
하늘이 시운을 알아 / 天惟自徵
영웅 호걸 배출시켰건만 / 輩出豪英
이들이 마구 해쳐 / 候薙候獮
북해(北海)에 던져 넣고 / 投舁北冥
악인들이 날뛰며 / 憸人踊躍
태평 누리기를 도모하니 / 謀亨太平
기울어진 국운(國運)을 / 邦之殄瘁
뉘라서 떠받칠쏜가 / 疇柱其傾
공의 관(棺) 북에서 오니 / 公來自北
깃발만 펄럭이네 / 子子其旌
임금의 사랑과 벼슬 여전하매 / 寵秩如故
백성들 슬퍼하면서도 영광으로 여기네 / 民曰哀榮
부 한화(閒話)
일찍이 대교초당(碓橋草堂)에서 나와 《역대전(易大全)》 몇 구절을 강론하였는데, 공이,
“형이상(形而上)을 도(道)라 하고 형이하(形而下)를 기(器)라 하니, 도와 기가 모두 형(形)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인가?”
하기에, 내가,
“도는 형을 초월(超越)하지만, 기는 형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하니, 공은,
“형이하가 스스로 형이하가 되는 것이라면 형이상도 스스로 형이상이 되는 것이다. 형이상과 형이하의 글의 예(例)가 똑 같은데 자네는 곧 도는 형에서 초월하지만 기는 형에서 떠나지 못한다 하니, 어찌 공언(公言)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내가,
“형에서 초월하기 때문에 형이상이라 하고 형에서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형이하라 하는 것이다.”
하니, 공이,
“형이상이 형에서 초월하는 것이라면 형이하도 마땅히 형에서 떠날 수 있다. 형이하가 형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라면 형이상만이 어찌 홀로 떠날 수 있겠는가. 영이북(嶺而北)을 충주(忠州)라 하고 영이남(嶺而南)을 상주(尙州)라 하니, 이 두 고을이 모두 영(嶺)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인데, 어찌 충주만이 영에서 떠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땅에다 한 개의 선(線)을 긋고 말하기를,
“선이좌(線而左)를 동(東), 선이우(線而右)를 서(西)라 하니, 선으로 경계를 정하는 상태가 조금도 틀리지 않은 뒤에야 선이좌ㆍ선이우라 할 수 있다. 자네도 형이 도와 기 사이에 있는 것이 마치 영이 충주와 상주 사이에 있으며, 선이 좌와 우 사이에 있는 것과 같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하고, 거듭 변론하면서 끝내 나의 말이 공정치 못하다고 하였다. 이는 공이 형이상과 형이하를 몰라서 한 말이 아니라, 공이 해학을 좋아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공은,
“글을 대하고 뜻을 찾을 때는 정밀하고 엄격해야 되고 다만 훈고(訓詁)만으로 일과(日課)를 메워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이를 가지고 본다면 공이 경전(經傳)에 대하여 세밀히 살피고 깊이 탐구하여 확실하게 주장한 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미년 가을에 들은 말이다.
일찍이 공이 소갈병(消渴炳)을 앓은 적이 있는데, 내가 가서 보니 공은 한창 혼미한 상태였다. 내가 좌중(座中)에 있는 빈객(賓客)들에게,
“옛사람들은 문장(文章)을 배우는 데 육서(六書)를 주로 삼아 글자마다 연구하고 이치를 찾아 상형(象形)ㆍ해성(諧聲)ㆍ회의(會意)ㆍ지사(指事)를 모두 분명히 안 뒤에 문장을 엮었기 때문에 글자를 잘못 쓰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문장을 배우는 데 육서는 무시하고 전구(全句)를 배우기 때문에 문체(文體)가 날로 비속해진다. 옛사람들은 의술(醫術)을 배우는 데도 《본초(本草)》를 주로 삼아 약재(藥材)마다 맛을 보고 시험하여 그 약재의 성질ㆍ맛ㆍ기운을 모두 분명히 안 뒤에 약을 지었기 때문에 약을 잘못 쓰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성방(成方)을 배우기 때문에 의술이 날로 졸렬해지고 있다.”
하였더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이 벌떡 일어나 갓을 쓰고 앉아 책상을 치며,
“내 병이 오늘 다 나았다. 오늘 지극한 이치가 담긴 말을 들으니 청량산(淸凉散)을 먹은 것보다 낫다.”
하고, 밥상을 들이라 하여 밥 한 그릇을 다 먹고는 환담(歡談)하며 내 말의 뜻을 부연하였으니, 공이 선(善)을 즐겨 용감히 취함이 이와 같았다.
내가 일찍이 《대학(大學)》의 책문(策問)에 효제자(孝弟慈)를 명덕(明德)의 응험(應驗)이라 하였더니, 상께서는 나의 대책(對策)을 제1등으로 삼고자 하셨으나 번옹(樊翁)이 나의 대책을 낮추어 제2등으로 정하였다. 며칠 뒤 번옹이 나에게,
“여강(驪江 윤휴(尹鑴))이 일찍이 명덕을 효제자라 하였는데, 사흥(士興) 역시 여강의 뜻을 따랐다. 그대의 대책도 필시 이들의 설을 취한 것인 듯하므로 내가 제2등으로 낮춘 것이다.”
하고, 또,
“사흥이 일찍이 ‘여강의 문장은 마치 구천 현녀(九天玄女)가 옥을 부수고 구슬을 찧어 옥과 구슬의 가루가 온 공중 가득히 날리는 것과 같으니, 진세(塵世)에 사는 인간의 위장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기에 내가 그의 말을 비웃었다. 여강의 문장 역시 숙속지문(菽粟之文)이어서 이런 기미(氣味)가 전혀 없다.”
하기에, 내가 복암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복암이,
“이는 나의 소싯적 말이다. 그러나 현녀(玄女)란 말은 기억되지 않는다.”
하였다. 여강은 하정(夏亭) 윤휴를 말한다.
을묘년에 상국(相國) 허적(許積)이 신원(申冤), 복관(復官)되었다. 이는 상국의 손자 복(澓)이 원정문(原情文)을 올렸기 때문인데, 그 원정문은 바로 복암이 지은 것으로 수없이 많은 말을 사용하여 먼저는 허적의 충근(忠勤)을 서술하고 뒤에는 죄없이 억울하게 죄에 빠진 것을 변명하였다. 이 원정문을 보신 상은 무릎을 치며 훌륭한 문장이라 칭찬하시고, 드디어 은명(恩命)을 내리셨다. 공도 오래지 않아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공의 문장이 상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았다.
복암이 일찍이 선중씨(先仲氏) 집에서 캄캄한 방에 문구멍을 뚫어 유리를 붙여 놓고서 거꾸로 비치는 그림자를 취하여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밖에 앉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초상을 그릴 수가 없는데 공은 뜰에 설치한 의자에 해를 향해 앉아 마치 흙으로 만든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오래도록 있었으니, 이 역시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바였다.
선중씨가 일찍이 충주(忠州)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나 단천초옥(丹川草屋) 이천(利川)에 있다. 으로 공을 방문하니 공이 집에 없었다. 동자(童子)에게 물어 그 동자와 함께 그가 갔다는 이웃집으로 갔더니, 다 쓰러져가는 한 칸의 초가집에 비가 새어 부엌에 흙탕물이 가득하였다. 공은 그 부엌에 솥을 걸어놓고 미음을 끓이는데 나무가 물에 젖어 타지 않으니 다 망가진 부채로 부치느라 애쓰고 있었다. 중씨께서 무엇하느냐고 묻자, 복암은 인사할 것 없다 하고는 조금 뒤 미음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귀신 꼴을 한 노파가 알몸으로 누워 있었는데 똥 오줌을 마구 싸대어 악취(惡臭)를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복암은 그 노파를 부축해 일으켜 미음을 먹이며 좋은 말로 위로하니 노파는 한숨을 내쉬어가며 팔자 타령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복암은 노파를 달래고 비위를 맞추어 끝내 그 미음을 다 먹인 다음 자리에 눕히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중씨가 어떤 노파냐고 물으니, 복암이,
“나는 본래 종이 없으므로 내가 병이 생겼을 적에 이 노파 덕으로 살아났다. 그런데 이 노파에게는 자녀도 친척도 없으며, 또 마을이 작아 가까운 이웃도 없기 때문에 내가 돌보아 주는 것이다.”
하고는 크게 웃었다. 선중씨께서는 매양 이 일은 사람을 감복케 한다고 하였다.
복건(幅巾)은 그 제도가 잘못되어 주자(朱子)의 횡첩법(橫㡇法)과 다르기 때문에 남인(南人)들이 복건을 쓰지 않았다. 병진년(1796, 정조 20) 겨울 상(上)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한 조정에 있으면서 건복(巾服)이 다른 것은 큰 잘못이다. 채 좌상(蔡左相)ㆍ이가환ㆍ이기양ㆍ정약용 네 사람이 복건을 쓰면 모든 남인들이 다 복건을 쓸 것이다. 마침 내일이 네 사람이 모두 입궐(入闕)하는 날이니 모두 복건을 쓰고 입궐하여 금호문(金虎門) 밖에 와서 벗게 하라.”
하셨다. 이에 네 집안에서는 밤에 검은 비단을 사다가 복건을 만들려 하였으나 부인들이 만드는 법을 알지 못하므로 급히 편지를 보내 서인(西人)의 복건을 빌려다가 밤새워 만들어 쓰고 입궐하였으니, 이 역시 성세(盛世)의 일이었다. 이때 노론(老論)은 반드시 홑복건을 쓰고 소론(少論)은 겹복건을 썼는데, 내가 정원(政院)에 가니 여러 남인이 홑과 겹 어느 쪽을 택해야 하겠느냐고 묻기에, 내가 웃으며,
“속담에, 이왕 물릴 바에야 큰 호랑이에게 물리라고 하였다.”
하였다. 네 사람이 모두 홑복건을 쓰니 노론들이 매우 좋아하였다. 겹복건은 소론의 제도이고 홑복건은 노론이 썼다.
[주-D001] 영장(郢匠)이……같았다 : 영인(郢人)과 장석(匠石)의 고사로 기예에 능하다는 뜻. 영인이 자기의 코에 진흙을 엷게 바르고서 장석으로 하여금 그 진흙을 깎아내게 하였는데, 장석이 자귀를 움직이자 바람이 일고, 그 진흙을 다 깎아내었으나 코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莊子 徐無鬼》[주-D002] 노점[虛勞] : 한의학(韓醫學)에서 폐결핵(肺結核)을 일컫는 명칭. 부족증(不足症).[주-D003] 황극(皇極) :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도(道). 나라를 다스리는 지중지정(至中至正)한 대도(大道).[주-D004] 김재찬(金載瓚) : 자는 국보(國寶), 호는 해석(海石). 정조 23년에 진하사(進賀使)로 중국에 다녀왔고, 순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주-D005] 삼영문(三營門) : 훈련도감(訓鍊都監)ㆍ금위영(禁衛營)ㆍ어영청(御營廳)의 세 군문(軍門).[주-D006] 문익점(文益漸)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사신으로 원(元) 나라에 가서 목화씨를 구하여 붓자루 속에 넣어 가지고 왔다.[주-D007] 사화(士禍) : 정론(正論)을 주장하는 선비들이 간신의 모함으로 입는 화(禍).[주-D008] 구천 현녀(九天玄女) : 옛날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싸울 때 황제에게 병법(兵法)을 내려주었다는 선녀(仙女).[주-D009] 숙속지문(菽粟之文) : 세상에 널리 쓰이는 아주 쉬운 글.[주-D010] 복건(幅巾) : 도복(道服)에 갖추어 머리에 쓰는 건(巾). 검은 헝겊으로 위는 둥글고 삐죽하게 하고, 뒤는 넓고 긴 자락을 늘어뜨리고, 양 옆에 끈을 달아 뒤로 돌려 매게 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