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살펴보건대, 박씨의 선계는 무안(務安)에서 나와 먼 조상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보첩이 있다. 고려를 지나 조선에 들어와 벼슬이 이어진 것이 7백여 년이었다. 초정(草亭) 선생 휘 응선(應善)에 이르러 유술(儒術)로 유명했는데 사직이 진정된 처음에 포의(布衣)로 발탁되고 곧 현감에 임명되어 관직이 단양 군수 증 집의에 이르렀으니,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규(䅅)이니 형조 좌랑 증 이조 참의이다. 조부의 휘는 창하(昌夏)이니 가선대부 부호군 증 이조 참판이다. 부친의 휘는 징(澄)이니 한성부 우윤이다. 모친은 증 정부인 사천목씨(泗川睦氏)이니 목사 임형(林馨)의 따님인데, 숭릉(崇陵) 경술년(1670, 현종 11) 10월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진문(震文), 자는 계명(啓明)이다. 평소의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지조가 근엄하고 결백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좌우로 두루 봉양하여 자식의 직분을 다하기에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하여, 오직 순순히 어버이의 마음에 맞게 하는 데 뜻을 두었다. 임신년(1692, 숙종 18)에 모친상을 당하여 집상을 예법대로 하였다. 신해년(1731, 영조 7)에 부친 우윤공께서 돌아가셨을 때 공의 나이가 예순이 넘었으나 상복을 벗지 않고 곡읍을 폐하지 않아 집상의 모든 절차를 한결같이 모친상처럼 하여 늙었다고 조금이라도 덜하지 않았다. 제사의 의식은 한결같이 선대에 정한 전범을 준수하고, 제수와 제기는 제사가 있기 전에 마련하여 일찍이 부족하여 빌리는 걱정이 없었다.
두 아우, 한 누님과 우애가 매우 지극했는데, 한 여동생이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식도 없이 요절하니, 차마 시댁으로 신주를 돌려보내지 못하고 30년 동안 제사를 지낸 뒤, 나중에 양자로 들어온 사람이 신주를 맞이하여 돌아갔다. 형제들과 재산을 가를 때 자신은 척박한 전답과 늙은 종을 취하고 좋은 것은 다른 형제들에게 주면서 “나는 종가로서 오히려 제전(祭田)이 있으나 다른 형제들은 궁핍하니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연이어 동기간의 죽음을 당해서는 형제의 죽음을 슬퍼하는 심회가 매우 애통스러워 마치 스스로 살 수 없을 듯하였다.
대대로 청빈하여 우윤공이 여러 차례 주군을 맡아 다스렸으나 청렴 결백을 스스로 힘써서 전원이 척촌(尺寸)이라도 증가됨이 없었기 때문에 세입(歲入)이 항상 부족하였다. 공은 소비를 절약하고 신중히 하며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여 크고 작은 일에 있어서 처리함이 모두 조리가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아무리 죽을 자주 차리더라도 경계(庚癸)를 찾음이 없었다.
자형 이공(李公) 석인(錫仁)이 완산(完山) 통판으로 있을 때 우윤공에게 종립(鬃笠)을 보냈는데, 우윤공은 그것이 화려하다는 이유로 일찍이 한 번도 쓰지 않고 갑째 보관한 것이 여러 해였다. 뒤에 누님이 살기가 곤궁하자 공은 그 종립을 돌려보내서 가난한 살림을 도왔다. 이것은 비록 작은 일이지만 또한 공의 행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갑자년(1744, 영조 20)에 우거해오던 동강(桐江)에서 태봉(胎峰)의 선영 아래로 옮겨 살았다. 기사년(1749, 영조 25)에 조정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풀어 통정대부에 승진시키고, 송서(送西)하여 절충장군 부호군 직함을 붙였다.
신미년(1751, 영조 27) 윤5월 23일에 임종하니 향년이 82세였다. 이 해 7월에 첨지에 임명되었으니, 이는 전관(銓官)이 상고(喪故)를 듣지 못했던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후에 받은 직첩을 고유하고 명정을 고쳤다 한다. 모월 모일에 광주 경안면 태봉 석수암(石秀巖) 곤좌(坤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전배는 증 숙부인 풍산홍씨(豊山洪氏)이니 지평 중정(重鼎)의 따님이고 모당(慕堂) 이상(履祥)의 5대손이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고, 병인년(1686, 숙종 12)에 공에게 시집오고, 임인년(1722, 경종 2) 7월 28일에 돌아가셨다. 태봉 선영에 임시로 장사지냈다가 신미년(1751, 영조 27)에 옮겨서 공의 무덤 오른쪽에 합장하였다. 부인은 유순하고 온화하여 부덕이 있었는데 부모에게 효도하는 정성을 시부모에게 옮기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동서간에 화목하니, 규문 안에서 사람들이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후배는 숙부인 장흥고씨(長興高氏)이니 학생 세정(世貞)의 따님이고 임진란에 순절한 학유 증 영의정 의열공 인후(因厚)의 현손이고 참의 증 찬성 충렬공 제봉(霽峰) 경명(敬命)의 5대손이다. 명릉(明陵) 기묘년(1699, 숙종 25)에 태어나고, 계묘년(1723, 경종 3)에 공에게 시집오고, 병술년(1766, 영조 42) 1월 15일에 천안의 장사(庄舍)에서 돌아가셨다. 1년 동안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정해년(1767, 영조 43) 봄에 반장하여 공의 무덤 왼쪽에 합장하였다. 부인은 성품이 민첩하고 근검하여 효경과 자혜가 갖추어졌고 규문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길쌈 등의 일에는 반드시 남보다 배로 능하였으니, 살림을 맡은 40년 동안 대소 길흉에 쓰이는 베가 부인의 손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고, 자신의 사후에 쓰일 수의와 이불 등도 몸소 마련하여 손수 재봉하여 상자에 간직해서 하나도 빠뜨림이 없었다. 이에 종당과 고을에서는 ‘훌륭한 부인’이라고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다.
전부인이 나이가 지나도록 자녀가 없어 공의 중씨인 장령공의 아들 사정(思正)을 취하여 뒤를 이었고, 후부인에게도 또한 자녀가 없었다. 사정은 통덕랑이고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처순(處順)과 처현(處顯)이고, 장녀는 광주(廣州) 안정록(安鼎祿)에게 출가했으니 곧 나의 아우이고 차녀는 안동(安東) 김령(金坽)에게 출가했다. 처순은 자녀가 없다. 처현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안정록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경연(景淵), 경하(景夏) 그리고 하나는 어리고, 딸은 창녕(昌寧) 성효철(成孝喆), 청주(淸州) 한수운(韓秀運), 광주(廣州) 이명억(李命億)에게 출가했다. 김령은 세기(世箕)를 양자로 들였다.
내가 공의 집과는 척의(戚誼)가 있는데 다행히 한 고을에 살았기 때문에 자주 자리 아래 나아가 절할 때마다 공의 청수(淸修)한 고절(苦節)을 보고 나도 모르는 결에 마음의 때가 절로 사라지는 듯하였다. 옛일을 생각해보건대, 무진년(1748, 영조 24) 겨울에 내가 공에게 가서 문후했는데, 아들 통덕군(通德君)이 마침 집에 없었다. 공이 의관을 정제하고 지팡이를 잡고 나오시기에 드디어 길 왼쪽에서 절하고, 공이 가시는 곳을 물으니 대개 장차 성묘를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때 공의 연세는 여든에 가까웠는데 쌓인 눈이 아직 녹지 않았기에 나는 공을 모시고 갈 사람이 없음을 민망하게 생각했다. 이에 뒤따라 가서 공손히 산 아래서 기다렸는데, 공은 두루 성묘를 다하고 돌아왔다. 지금에 이르러 당시의 일을 생각해보니 마치 엊그제 일과 같다. 이제 통덕군이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니, 어찌 감히 문장을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음에 명을 붙인다.
면성의 어진 주손이여 / 綿城賢胄
능히 선대의 덕을 이었네 / 克紹先德
효성과 우애로 가정을 다스리고 / 孝友爲政
공경과 근엄으로 자신을 가다듬었네 / 敬謹自勅
선에 대한 복의 보답으로 / 福善之報
만년에 천작을 누렸네 / 晩享天爵
두 부인이 현숙하니 / 二配賢淑
아름다움을 짝하였네 / 儷美匹休
규문의 일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 壺政無違
지아비가 시름을 잊었다네 / 夫子忘憂
한 무덤에 나란히 묻히니 / 同阡幷祔
하늘이 맺은 좋은 짝일세 / 天作好逑
빛을 잠그고 덕을 숨기니 / 潛光隱德
뉘라서 능히 발양할 것인가 / 誰能發揚
내가 명을 지어 수식하여 / 我名以文
무덤에 기록하여 묻노라 / 用誌幽堂
[주-D001] 경계(庚癸) : 《춘추 좌전》 애공(哀公) 13년 조에 있는 말로서 원래는 군량(軍糧)의 은어(隱語)인데,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음식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됨.[주-D002] 천작 : 인의충신(仁義忠信)과 같이 인간 본연의 귀한 것을 말함. 이에 반하여 인작(人爵)은 공경대부(公卿大夫)와 같이 세속적인 작위를 말함. 《孟子 告子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