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휘가 경항(慶恒)이고 자는 사상(士常)이요, 성은 이씨(李氏)이며 관향은 우계(羽溪)이다. 시조 이구(李球)는 원(元) 나라에 들어가 제과(制科 임금이 친히 문제를 내어 시험하던 중국의 과거제)에 합격하고 고려(高麗)에 벼슬하여 예빈경 동정(禮賓卿同正)에 이르렀고, 후세에 이의(李薿)는 태조(太祖)의 공신이었는데, 그 내용이 국사(國史)에 있다. 5세(世)에 동지돈녕부사인 이지방(李之芳)은 변방 군사를 거느리고 오랑캐를 친 공으로 귀하게 되고, 동지돈녕부사가 참판 이광식(李光軾)을 낳고, 참판이 대사헌 이감(李戡)을 낳고, 대사헌이 주서 이성헌(李成憲)을 낳고, 주서가 선무랑(宣務郞) 이길남(李吉男)을 낳고, 선무랑이 공(公)을 낳았다.
어머니 정씨(鄭氏)는 관서도 도사(關西道都事) 정욱(鄭彧)의 딸이고, 세조(世祖) 때의 재상 정인지(鄭麟趾)의 4세손이다. 만력(萬曆) 29년(1601, 선조34) 정월 12일에 공이 태어났다.
재주 있고 총명하여 기송(記誦)을 잘하였는데, 학사(學士) 소암(疏庵) 임숙영(任叔英)에게서 수학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세에 박사 제자(博士弟子)에 뽑히고 27세에 명경(明經)으로 발탁되어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임관되고, 이듬해에 전적(典籍)에 올랐다. 때마침 붕당(朋黨)이 만연하여 온 세상이 너도나도 휩쓸렸으나, 공은 정직하고 성실한 것을 좋아하여 세속을 따르려들지 않았으며, 덮어놓고 남을 따르며 헤매는 데 뜻을 두지 않았다. 사헌부 감찰, 형조ㆍ공조의 좌랑ㆍ정랑, 군기시ㆍ사복시의 첨정, 종묘서 영(宗廟署令)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신계 현령(新溪縣令), 예안(禮安)ㆍ결성(結城)의 현감(縣監), 영남(嶺南)ㆍ북관(北關)의 도사(都事)에 보임되었다. 어떤 사람이,
“온 세상이 명예를 다투고 세력을 좇으니 성세(聲勢)를 얻은 자는 모두 이러한데, 무엇 때문에 우물쭈물하다가 용납되지 못하고 이같이 버려졌소?”
하니, 공이 이렇게 말하였다.
“천성이 할 수도 없지만, 하고 싶지도 않소.”
임오년(1642, 인조20)에 선부인(先夫人 돌아가신 어머니의 존칭)이 돌아가시자, 공은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지고 병이 쌓여 이듬해인 계미년(1643)에 세상을 뜨니, 나이 43세였다.
공은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순후하고 독실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반드시 뜻을 받들어 순종하며 한결같이 부모의 마음을 위주로 하여 벼슬길이 멀면 부임하지 않기도 하고 부임했다가 되돌아오기도 하여 관직에 오래 머문 적이 없었으니, 모두 부모가 연로했기 때문이다. 젊어서 과부 된 백모(伯母)가 소생도 없자 공이 부모처럼 섬겼으며, 종형(從兄)은 벌써 죽고, 가난하여 어렵게 지내는 두 서녀(庶女)가 있었는데, 모두 비용을 대서 출가(出嫁)시켰다. 친척 중에 가난하여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도 모두 보살펴 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지극한 성품이 이와 같았다. 신중하고 검약하여 벼슬살이 20년에 담박하기가 가난한 선비 같았고, 오락을 좋아하지 않고 책 읽기를 즐겨서 일이 없으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선무공(宣務公)이 90세 연세에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공이 죽으면서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거의 숨 넘어가는 순간에도 여러 번 말하려 하다가 다 말하지 못하였다.
숙인(淑人) 이씨(李氏)는 태종(太宗)의 별자(別子)인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호서 수군절도사(湖西水軍節度使) 이경유(李慶裕)고, 할아버지는 온양 군수(溫陽郡守) 이간(李幹)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풍덕 군수(豊德郡守) 이광윤(李光胤)이며 어머니 박씨(朴氏)는 병절교위(秉節校尉) 박문좌(朴文佐)의 따님이다. 숙인은 시부모를 잘 섬기므로 시어머니 정부인은 며느리를 칭찬하여,
“우리 며느리는 20년 동안을 지성으로 나를 섬기면서 유순하고 온화한 몸가짐이 있었다.”
하였다. 비복(婢僕)들에게 과실이 있으면 조용히 꾸짖어 타이르며 ‘채찍질하는 것은 부인으로 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여종 하나가 있었는데, 서출(庶出) 동생이 사통(私通)하여 자식 몇을 낳았으나 가난해서 속전(贖錢)을 내지 못하자 곧 가지고 있던 노비 문서를 주었다. 이웃에서 돈을 빌리는 일이 있어도 인색하지도 않고 갚기를 독촉하지도 않았다. 천성이 어질고 후하기가 이와 같았다. 숙인은 공보다 1년 위로 67세에 세상을 떴다. 공은 처음에 광주(廣州) 관아 남쪽 대장리(臺藏里) 선영(先塋) 아래에 장사 지냈다가, 이때 같은 고을 언주리(彦州里)에 있는 동지돈녕부사의 산소 왼쪽 언덕에 개장(改葬)하고, 숙부인은 왼편에 부장(祔葬)했다.
3남 2녀 중 아들은 이덕우(李德雨), 이가우(李嘉雨), 이서우(李瑞雨)인데, 이가우는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불행히 일찍 죽고, 이서우는 문과(文科)에 급제했으며, 사위 윤득열(尹得說)은 감사(監司)이고 이서규(李瑞圭)는 진사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공손하고 삼감이 덕이 되는 근본이요 / 恭謹者德之本
검소하고 절약함이 복이 되는 문일세 / 儉約者福之門
덕이 쌓이면 처신이 순박하고 / 善積者行淳
복이 넉넉하면 의리가 돈후하나니 / 福厚者理惇
하늘의 보답이 반드시 후손에게 있으리 / 天道之報可必於後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