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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에 용주(龍洲) 조 선생(趙先生)만큼 인물에 대한 품평을 잘하는 이는 없다. 선생이 찬한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 남 상공(南相公)의 신도비(神道碑) 비문은 가장(家狀)에 얽매이지 않고 평소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스스로 기술하여 분명하게 드러낸 실제의 자취가 마치 눈앞의 일인 듯하다. 그 글에 이르기를,
“공은 미목(眉目)이 서글서글하고 정신이 겉으로 드러났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서울에서 노닐었는데 사람들이 풍진 밖의 인물이라고 하였다. 이윽고 명성에 떠밀려 조정에 들어가 높은 벼슬을 하였으니, 이는 공이 평소 좋아하던 바가 아니었다. 계해반정(癸亥反正 인조반정) 초기에 훈구 대신이 요직에 등용되니, 공은 지향이 서로 다른 탓에 천거를 받을 길이 없었고, 성미 또한 바른말을 잘해서 고깝게 보는 이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스스로 임금과 결속하였던 것으로 인하여 내외의 관직을 넘나들어 정승의 벼슬에 이르렀으니, 충실(忠實)한 마음은 쇠와 돌도 녹일 수 있다.”
하였다. 아, 이 글이 민멸되지 않고 후세에 전해지기에 넉넉하니, 후생(後生)이 어찌 췌언을 덧붙이겠는가.
지금 공의 후손들이 무덤 남쪽에 지석을 묻으려고 계획하여 나에게 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다만 연보에 의거하여 벼슬했던 이력을 기술하여 조 선생의 뒤를 이었으니, 또한 영광스러운 일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남씨의 선대는 의령(宜寧)의 세가(世家)이니, 신라(新羅)의 영의공(英毅公) 민(敏)이 바로 그 비조이다. 고려를 지나고 성조(聖朝)에 들어와서 고관대작이 대대로 끊긴 적이 없었다. 부친은 주부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휘 위(瑋)요, 조부는 예조 참판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된 휘 응운(應雲)이니, 세상에서 문무를 겸전한 재목으로 일컫고 있으며, 증조는 예조 참판을 지낸 휘 세건(世健)이다. 모친 정부인(貞夫人)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확(確)의 후손이다.
만력(萬曆) 을해년(1575, 선조8) 봄 3월 25일에 공이 태어났다. 선부인(先夫人)이 회임했을 때에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영웅(英雄)이라 하라.” 하였고, 출산할 때에 천군만마가 집을 둘러싸서 호위하는 꿈을 꾸었으므로 휘를 이웅(以雄)이라 하고 자를 적만(敵萬)이라 하였으니, 꿈을 따른 것이다.
신사년(1581)에 선고(先考)의 병환이 심해지자 선부인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받아 올렸는데, 후에 공은 선부인의 손가락을 볼 때마다 오열을 참지 못하였다. 16세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흥부원군(宜興府院君)에 봉군된 종숙부(從叔父) 휘 대우(大佑)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으니, 조부는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翰林)을 지낸 휘 연경(延慶)이고, 증조는 안성 군수(安城郡守)를 지낸 휘 세칭(世秤)으로 군수공(郡守公)은 본생가의 증조인 참판공(參判公)과 친형제간이다. 모친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생원 태형(泰亨)의 따님이다.
병오년(1606)에 공이 진사시에 1등으로 입격하였다. 입격한 이들이 모여 연회를 베풀 때에 - 세속에서 제마수회(齊馬首會)라고 일컫는다. - 선조(宣祖)께서 소식을 듣고는 중사(中使)를 보내 향온(香醞)과 화촉(花燭)을 내리면서 유시하기를, “반드시 남 장원(南壯元)이 기쁨을 만끽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이듬해에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으니, 당시 엄선하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듬해에 선묘(宣廟)께서 승하하시니 공은 즉시 벼슬을 내놓았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다. 임자년(1612)에 시직(侍直)으로 있다가 부솔(副率)로 옮겼다. 당시에 국옥(鞫獄)이 연이어 일어나 진신(搢紳)들이 많이 죄망에 빠졌는데, 파양군(坡陽君) 윤안성(尹安性)이 체포되었다. 공이 그 억울함을 알고 교외로 나가 그를 맞이하여 금오문(金吾門)까지 걸어가서 손을 잡고 울며 이별하니, 나졸이 의롭다 하여 막지 않았다. 이듬해에 공조와 형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이해 10월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의 낭관으로 있다가 재차 사간원에 들어가 정언이 되었다. 당시에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을 장악하고 농락하고자 하였으나 공이 굽히지 않으니, 이이첨이 노하여 버려 둔 채 기용하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을묘년(1615)에 비로소 병조 좌랑이 되었다. 당시 총애를 받던 액례(掖隷)가 위협하여 다량의 조운미(漕運米)를 빼앗았는데, 공이 그 어미를 가두고서 독촉하여 반환하게 하였다. 이듬해에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이 되었다. 수년 사이에 교리에서 응교로 승진하였다. 적신(賊臣) 이이첨이 폐모론(廢母論)을 주창하여 백료들을 위협해 정청(廷請)하게 하였는데, 마침 영건(營建)하는 일이 시급하여 공이 공역을 감독하는 직임에 차임되었다. 그 일만 전임하고 다른 일은 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공은 여러 사람들의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공역을 마치자 규례대로 품계가 통정대부로 올랐다. 얼마 뒤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상기를 마쳤을 때는 바로 인조 즉위 원년이었다. 해서관향사 겸 안악군수(海西管餉使兼安岳郡守)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혼조(昏朝)에서 받은 관자(官資)를 바로잡아 통훈대부로 품계가 내려갔으나 상이 특별히 명하여 그 자급을 돌려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제수되었는데 체부(體府)가 관향(管餉)의 일을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도로 군수의 직임을 맡게 되었다.
갑자년(1624, 인조2)에 서수(西帥) 이괄(李适)이 반역하였다. 거병하여 서울로 향하였는데, 황주(黃州)는 역도들이 지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이 공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동하여 황주성(黃州城)에 들어가 지키게 하였다. 적도들이, 공이 방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길을 우회하여 곧장 경사(京師)를 범하니, 공이 원수와 함께 그 뒤를 바짝 추격하였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군중에 양식이 없었는데, 공이 마음을 다해 주선하여 군향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역도가 평정되자 논공(論功)으로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오르고, 진무 공신(振武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춘성군(春城君)에 봉해졌다. 가을에 양서 관향사(兩西管餉使)에 제수되어 평양(平壤)에 개부(開府)하고 찬획사(贊畫使)를 겸하게 되었다. 당시 공의 종제인 의춘군(宜春君) 이흥(以興) 역시 진무 공신으로서 관서(關西)의 절도사를 맡고 있었으므로, 형제가 일방(一方)의 군대를 총괄한다는 혐의가 있어 간곡히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병인년(1626, 인조4)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여름에 바다를 항해하여 조천(朝天)하였다. 나라가 침략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병부(兵部)에 호소하여 군사를 출동하여 가서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얼마 뒤에 또 강화(講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침내 그만두었다. 돌아온 뒤에 호조 참판으로 있다가 경기 감사로 옮겼다. 또 충청 감사에 제수되었다. 임기가 차서 조정으로 돌아왔다.
공은 평소 영동의 산수를 좋아하였다. 신미년(1631)에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었다가 마침내 영남 관찰사로 옮기게 되었으나 공을 미워하는 자가 있어 부임하지 않고 돌아왔다. 이듬해 여름 6월에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승하하여 공이 수릉(守陵)하라는 명을 받들었으니, 고례가 아니다. 살펴보건대, 후비(后妃)의 상에는 신하들이 종복(從服)을 입고 상기는 기년(期年)으로 그친다. 그러나 국조(國朝)의 구례는, 특별히 중신에게 명하여 산릉을 지키게 함으로써 끝까지 효도를 다한다. 공은 즉시 임금의 뜻을 받들어 행하면서 과실이 없었다. 연제(練祭)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고 상제(祥祭)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으니, 이 또한 규례이다. 조정으로 돌아온 뒤에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을해년(1635)에 외직인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제수되었는데 1년 만에 파직되었다. 이듬해 겨울에 어가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품계가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올라 좌참찬 겸 세자빈객에 제수되었다.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배행하여 심양(瀋陽)에 들어갔다.
무인년(1638)에 특별히 명하여 소환하였으니, 그 연로함을 염려해서였다. 우참찬으로 옮겼다가 얼마 뒤에 대사헌에 제수되어 신속하게 경외(京外)의 음사(淫祠)를 훼철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키는 요무(妖巫)를 장살(杖殺)하니, 도하(都下)가 두려움에 떨었다. 한성 판윤(漢城判尹)과 예조 판서를 거쳐 이조 판서로 옮겼다. 공이 세상에 드문 크나큰 지우를 입어 벼슬이 날로 높아지니, 기다렸다는 듯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교대로 소장을 올려 험담하였다. 상이 그 속셈을 아시고 처음에는 이르기를, “사람들이 스스로 괴이한 짓을 하니 경에게야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하였고, 마지막에는 또 “자리를 잃을까 걱정하여 권력을 다투는 추태를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하고는 마침내 험담한 사람을 내치고 공을 권면하였다. 공은 특별한 은우(恩遇)에 감격하여 마지못해 나와 일을 보았으니, 전후에 걸쳐 도헌(都憲)을 맡은 것이 열두 번이고, 동전(東銓)에 들어간 것이 세 번이었다. 이 밖에 한가한 관서는 기록하지 않는다.
병술년(1646, 인조24) 봄에 우의정에 제수되고 부원군에 봉해졌으나 끝내 사직하였다. 다음 해에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공이 〈십사소(十思疏)〉를 올려 시무(時務)를 진달하기를 고인(古人)의 〈십점소(十漸疏)〉처럼 하니, 비답에 이르기를, “진달한 내용은 모두 약석(藥石)과 같은 말이다. 내가 마땅히 힘써 행할 것이니, 경 또한 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힘써 달라.” 하였으므로, 공은 어쩔 수 없이 나가 사은하였다.
무자년(1648)에 병이 심해지자, 어의(御醫)가 집에 이르렀고 약물이 빈번히 내려졌다. 6월 18일에 정침(正寢)에서 고종명(考終命)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몹시 슬퍼하고 조제(弔祭)를 규례대로 내렸다. 공산(公山) 반포(反浦) 초동(草洞)의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유명(遺命)으로 시호를 청하지 않았다.
공은 성품이 호방하고 기절(氣節)을 숭상하여 시속이 좋아하는 명성과 이익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일찍이 과거를 보려고 과장으로 가려 하였는데, 비가 조금 내리자 편안하게 누운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집안에서의 효성과 우애는 남들이 미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곤궁한 벗들은 자연스럽게 공에게 의탁하였으며, 부모를 여읜 딸들을 거두어 길러 주고 제때에 혼인시켜 주었다. 교유하는 이들을 만나면 마음을 다해 즐겁게 대하여 그 귀천을 잊었다. 매우 높은 지위에 이르렀지만 문에는 잡된 빈객이 찾아오지 않았다. 관에서 지급하는 물품을 규례대로 보내오면 곳간으로 들이지 않고 궁핍한 이들을 두루 구휼하였다. 별세하였을 때에 곳간에 남아 있는 재물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이에 평소 말과 행동이 부합했다는 것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남평 조씨(南平曺氏)는 학생(學生) 경남(慶男)의 따님이요, 이조 참판 유인(由仁)의 후손이다. 만력(萬曆) 갑술년(1574, 선조7) 9월 26일에 태어나, 공보다 3년 앞선 을유년(1645, 인조23) 4월 28일에 별세하였다. 무덤은 공과 같이 썼다.
부인은 내행(內行)이 공순하고 훌륭하였다. 시대가 멀어 징험할 만한 근거가 없기는 하지만, 용주 선생께서 직접 보고 기억한 것을 가지고 지성스레 칭탄하였으니, 그 믿을 만한 것이 이와 같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요절하였다. 만년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두상(斗相)이다. 금화사 별좌(禁火司別坐) 벼슬을 하였다. 두 번 장가들었으나 후사가 없었고 공보다 16년 앞서 죽었는데, 부부가 모두 단명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중형(仲兄)인 사간공(司諫公)의 손자 중소(重召)를 별좌의 후사로 삼았다.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보았으니, 아들 두림(斗臨)은 만호 벼슬을 하였고, 딸은 이관악(李冠岳)에게 시집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대대로 훌륭한 덕을 갖춘 이가 나와 / 世有長德
시속의 모범이 되었다고 일컬어졌으며 / 人稱範俗
또한 훌륭한 명망이 있어 / 亦維偉望
나라의 동량이 되었다네 / 作楨厥國
지위가 높은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으되 / 位崇匪心
신하를 알아주는 훌륭한 임금이 계셨다네 / 知臣有聖
임금께서 말씀하셨네 ‘너는 직임을 공경히 수행하라 / 聖曰汝欽
나의 보필은 이미 정해졌노라’ / 吾相已定
그러니 저 수군거리는 자들이 / 彼噂𠴲者
어찌 제멋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 / 云胡自逞
인물을 평하는 데에는 원칙이 있으니 / 評隲有道
반드시 문헌으로 징험해야 한다네 / 必徵文獻
그러나 선철(先哲)의 정론이 있으니 / 往哲論定
그 말은 언제나 미더운 법이라네 / 其言必信
사람들이 피하는 곳이건만 / 人之所避
공은 그곳으로 나아갔으니 / 公則就之
의를 좋아하기를 기갈이 든 것처럼 하였으며 / 嗜義如渴
험로를 가기를 마치 평지를 가듯 하였다네 / 履險若夷
대체를 살펴볼 수 있으니 / 大體可監
사소한 것을 어찌 따지리오 / 疏節奚數
행적이 신도비에 새겨져 있어 / 鐫在龜趺
길 가는 이들이 우러러본다네 / 行路仰覩
지석(誌石)을 무덤 앞에 묻었으니 / 掩諸幽竁
후인들이 고인과 벗할 수 있으리 / 後士尙友
[주-D001] 제마수회(齊馬首會) : 국조(國朝) 고사에 매번 생원, 진사가 새로 뽑힐 때마다 반드시 그 가운데 집안 형편이 넉넉한 사람을 택하여 함께 급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하였는데, 거리를 나설 때에 장원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가게 하였으므로 이렇게 일컬었다. 《不憂軒集 卷1 寄泰仁諸儒》[주-D002] 당시에 …… 체포되었다 : 국옥(鞫獄)은 대북파(大北派)가 소북파(小北派)를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을 가리킨다. 이때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있던 윤안성(尹安性)이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윤안성(1542~1615)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계초(季初), 호는 명관(冥觀)이다. 1615년(광해군7) 광해군의 시기를 받던 능창군(陵昌君) 전(佺)의 추대 사건에 관련한 혐의로 사형을 받았다. 저서로는 《명관유고집(冥觀遺稿集)》이 있다.[주-D003] 서수(西帥) : 평안도 병마절도사의 이칭이다. 당시 이괄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있었다.[주-D004] 고인(古人)의 십점소(十漸疏) : 당 태종(唐太宗) 때의 명신 위징(魏徵)이 올린 상소를 말한다. 태종의 수신(修身)과 정치가 점점 태만해지자 임금의 태만해지는 열 가지의 조짐을 열거하여, 태종을 경계한 내용이다. 《新唐書 卷97 魏徵列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