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군의 휘(諱)는 예모(禮模), 자는 화언(和彥)이다. 우리 진양 정씨(晉陽鄭氏)는 여말의 어사대부(御史大夫) 휘 택(澤)이 그 시조이니, 이분이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을 때 자신의 아들 휘 의생(義生)을 상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의생은 부사(府使)를 지냈고, 그의 아들 휘 효옹(孝翁) 또한 부사를 지냈다. 대대로 유자(儒者)의 행실로 서로 전해지다가 대총재(大冢宰) 문장공(文莊公) 휘 경세(經世)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드러났으니 부군에게 5대조이다. 고조 휘 심(杺)은 내한(內翰)을 지냈고, 증조 휘 도응(道應)은 자의(咨議)를 지냈으며, 조부 휘 석교(錫僑)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부친 휘 주원(胄源)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비(妣)는 옥산 장씨(玉山張氏)이니,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선생 휘 현광(顯光)의 후손이고, 통덕랑(通德郞) 대유(大猷)의 따님이다. 숙종 계사년(1713, 숙종39) 10월 19일에 부군을 낳았다.
부군은 풍채와 거동이 준수하고 비범하여 어릴 적부터 사람들이 모두 공경(公卿)과 목백(牧伯)이 될 그릇이라고 칭송하였다. 다만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해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임천(林泉)에서 삶을 마쳤지만, 평생 실천한 대략은 타인을 넘어서는 점이 많았다. 부친 침랑공(寢郞公)이 오랫동안 병을 앓았을 때 정성을 다해 곁에서 모시며 간호하였고, 상(喪)을 당하자 조금의 물도 마시지 않고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곡한 것이 사흘이었지만 하루같이 여기며 행하였다. 이에 앞서 당시 조부 지현공(知縣公)이 문장공(文莊公)의 신도비를 새겨 두기만 하고 세울 겨를이 없어 침랑공이 늘 이 점을 근심하였는데, 부군이 조부의 유지(遺旨)를 잘 체행하여 상(喪)을 지내자마자 묘 아래에서 재물을 거두고 사림들을 모아 비석을 세웠다.
부군은 숙부 처사공(處士公)을 효심과 공경으로 섬겼다. 마침 인접하여 살았을 때, 맛난 음식을 드리고 가르침에 순응하여 감히 행여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처사공이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겨 “비록 나의 죽은 맏아들이라 해도 어찌 이보다 더 잘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숙부의 맏아들이 어버이를 잘 섬겨 칭송받았었기 때문이다.
병자년(1756, 영조32)에 부친 침랑공이 돌아가신 뒤 중부(仲父)와 선군(先君)이 잇달아 세상을 떠났으며, 이때 또 거듭된 기근으로 먹여 살릴 많은 식구들이 모두 굶주리게 되자 부군이 홀로 이를 감당하였다. 장례를 치르는 일과 앞으로 살아갈 방도와 관계된 모든 것에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은 바가 없었고, 자신의 전택(田宅)을 팔아 종가(宗家)의 묵은 빚을 갚아 주기까지 하였다. 평소 사용하는 온갖 물건들은 나올 데가 없었고 의지할 것은 오직 우산(愚山) 골짝의 소나무 뿐이었으나 그 재산도 넉넉하지 못하여 또한 조금도 개인적으로 보관해 둔 것이 없었다. 소자(小子)가 혼인을 하자 곧 종사(宗事)를 맡기고서 자녀들을 데리고 촌사(村舍)로 나와 거주하였다. 처사공 또한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겼고, 부군의 자형(姊兄) 유공(柳公) 또한 “그가 일을 처리해 내는 것은 비록 고인이라 해도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산(愚山) 이십경(二十景) 별업(別業)을 침랑공이 종가(宗家)로 모두 귀속시켜서 이를 분배하여 지파(支派)의 소유로 삼지 않도록 한 적이 있었다. 부군은 유지(遺旨)를 따라 침랑공이 돌아가시고 3년이 지난 뒤에 온 가문이 일제히 모여 분가하던 날에 종족들과 논의하여 침랑공의 유지가 변치 않게 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또 백성들을 모아 산내(山內)의 황폐한 밭을 개간하여 조세를 거두어 종가의 쓰임에 보태었고, 아울러 퇴락한 문장공(文莊公)의 서실(書室)을 한꺼번에 중수하였다.
부군은 천성이 넓고 너그러워서 마음에 불가한 것이 있어서 참을 수 없을 듯한 일이 있다가도 곧장 마음을 확 열었으니, 잠깐 사이에 우레 같은 위엄이 봄바람으로 변하였다. 고을 사람 가운데 뜻밖의 상황에서 불선한 행동을 하는 자에게는 다만 한번 웃어 줄 뿐 서로 따지려는 뜻을 둔 적이 없었으니, 식자들이 모두 부군의 너른 인품에 감복하여 대가(大家)의 풍도가 있다고 하였다. 평소 위엄 있는 결단이 보통을 넘어섰다. 애꾸눈을 지닌 여종을 몹시 아꼈었는데, 여종이 죄를 짓자 그 즉시 쫓아내어 가까운 곳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고, 고용된 하인이 혹 한 번이라도 죄를 지으면 또한 조금도 용서해 주지 않았다.
부군은 침랑공의 명으로 한 풍수가를 맞이해 온 적이 있었으니, 곧 당시의 고승(高僧)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맞이해 올 수 없었지만 부군은 탁월한 논변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마침내 함께 오게 되었다. 부군이 이르는 곳마다 감화시키는 위력이 사람들에게 젖어들 때면, 모두들 부군의 말에 경도되었기 때문에 침랑공이 일을 주관하는 재주로 부군을 허여했었던 것인데, 다만 시행해 볼 길이 없었다.
편지글은 간결하면서도 도리에 합당하여 사람들이 혹 입으로 외어 전하며 자신의 자제들을 면려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책 보는 것을 좋아하였고 문장공의 유집(遺集)에 더욱 잠심하여 항상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서 한가롭게 수양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성건당(省愆堂)이라 자호하였다. 비록 70여 세의 나이에도 봄빛 같은 기상이 쇠하지 않아 바라볼수록 신선 같았다. 향년 76세로 건릉(健陵 정조) 무신년(1788, 정조12) 5월 1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아, 슬프도다!
소자는 어릴 적부터 부군에게 은혜와 보살핌을 입었다. 소자가 심한 전염병에 걸려 죽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부군이 직접 치료해 주시며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여러 날이었다. 그 외에 소자를 보호해 주어 온전하고 편안하게 해 주신 것들을 다 기록할 수 없건만, 다만 불초자는 그 만의 하나도 갚지 못했으니 노년에 이르러 이를 수 없는 애통함만이 더욱 간절하다. 이에 감히 대략 유사(遺事)를 기록하여 자손들이 살펴볼 자료로 삼지만, 또한 어찌 나의 작은 정성을 바칠 바탕이 되겠는가.
부군은 모두 두 번 장가들었다. 전배(前配)는 고성 이씨(固城李氏)이니, 문정공(文貞公) 암(嵒)의 후손이고 원유(元愈)의 따님이다. 3남이 있으니, 첫째와 둘째는 모두 장가들지 못한 채 요절하였고, 셋째는 성로(成魯)이다. 2녀는 봉사(奉事) 오염(吳琰)과 김원진(金原進)에게 각각 시집갔다. 서녀는 오성권(吳成權)에게 시집갔다. 후배(後配)는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니, 충암(冲庵) 정(淨)의 후손 아무개의 따님이고, 자식이 없다. 성로는 참봉(參奉)을 지낸 광릉(廣陵) 이달중(李達中)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아들이 없어서 종로의 계자(季子) 상관(象觀)을 후사로 삼았으니,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2녀가 있으니 장녀는 이택운(李宅運)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오염은 1녀가 있으니, 진사(進士) 신도수(申道洙)에게 시집갔다. 김원진은 1남이 있으니 어리고, 4녀가 있으니 한 딸은 이휘(李彙)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부군의 묘는 이계(泥溪) 묘향(卯向) 언덕에 있다.
[주-D001] 우산(愚山) 이십경(二十景) : 우복 정경세가 상주에서 거주할 때 거닐며 흥취를 돋우던 20경을 말한다. 서실(書室), 회원대(懷遠臺), 오봉당(五峯塘), 산영담(山影潭), 오로대(五老臺), 우화암(羽化巖), 어풍대(御風臺), 오주석(鰲柱石), 상봉대(翔鳳臺), 만송주(萬松洲), 계정(溪亭), 수륜석(垂綸石), 선암(船巖), 화서(花潊), 쌍벽단(雙壁壇), 운금석(雲錦石), 청산촌(靑山村), 화도암(畫圖巖), 공선봉(拱仙峯), 수회동(水回洞)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愚伏集 卷1 愚谷雜詠二十絶》 《立齋集 卷3 敬次先祖愚山二十景韻》[주-D002] 문정공(文貞公) 암(嵒) : 이암(李嵒, 1297~1364)으로,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 시호는 문정이다. 고려 충선왕(忠宣王)ㆍ충혜왕(忠惠王)ㆍ충목왕(忠穆王)ㆍ충정왕(忠定王) 등의 신임을 받았으며,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으로서 도원수를 맡았고 안동까지 왕을 호종하여 공신에 봉해졌다.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렸다.[주-D003] 충암(冲庵) 정(淨) : 김정(金淨, 1486~1521)으로,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이다. 1514년에 왕후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報恩)에 유배되었고, 1519년 기묘사화로 극형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유배되었으며, 1521년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들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賜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