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순례지 개요
정찬문 안토니오 복자는 진주시 사봉면 출신으로 신자였던 아내의 권면으로 입교 영세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정찬문은 포졸에게 잡혀 진주 감옥에 갇혔다. 여러 번 심한 문초와 고문을 받았지만 배교하지 안았다. 특히 그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아기를 등에 업고 주먹밥을 나르던 부인 윤씨의 격려는 그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월계관을 쓰기까지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결국 이듬해인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 정찬문은 매를 많이 맞은 끝에 진주 옥에서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주은 뒤 그의 일가들이 정찬문의 시신을 모셔 왔는데, 머리를 가져오지 못한 채 하체(下體)만 장사 지냈다고 한다. 어찌하여 머리를 가져오지 못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순교자의 무덤에 머리가 없다는 사실이 신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면서 무두묘(無頭墓)라 불리게 되었다.
그 후 1946년에 문산 성당에 부임한 벨라도 신부는 정찬문과 무두묘 이야기를 듣고 무덤을 찾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3월 29일 신자들과 정씨 문중 사람들의 노력으로 무덤을 찾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166쪽)(순례확인도장: 초봉헌대 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