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충成忠(?-656년)
요약 백제 의자왕때의 충신. 656년 좌평으로서 의자왕이 신라에 대한 성공적 공략에 도취되어 음란과 향락에 빠지자 이에 적극적으로 간했으나 옥에 갇혔다. 옥에서 죽기 전에 글을 올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한마디 하고 죽겠다. 시국의 사변들을 보건대 반드시 전쟁이 있을 듯한데, 반드시 상류에서 대적을 맞이해야 보전할 수 있다. 만약 다른 나라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험준한 곳에 의존하여 적을 막아야 가능하다"고 했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자 흥수가 다시 한번 이 방책을 권했으나, 의자왕은 듣지 않고 다른 곳에서 적군을 맞은 결과 패배하여 도성이 위급해졌다. 결국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지경이 된 것을 후회하며 웅진성으로 피난하고, 둘째 아들 태(泰)가 자립하여 왕이 되어 저항했으나 사비성은 함락되었다. 이에 의자왕이 소정방(蘇定方)의 당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했다. 부여의 삼충사에 계백·흥수와 함께 성충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출처 : 다음 백과
일명 ‘정충(淨忠)’이라고도 한다. 656년 좌평(佐平)으로 있을 때 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승하여 자만과 주색에 빠지자 국운이 위태로워짐을 극간하다가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죽으면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신이 항상 시세의 흐름을 볼 적에 멀지않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때 군대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그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하여야 하는데, 강 상류에서 적병을 맞이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에 못 들어오게 한 뒤,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싸우면 틀림없이 이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660년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수도 사비(泗沘)로 쳐들어오고, 당나라 군대도 기벌포를 지나 사비성으로 쳐들어와 백제는 멸망하였다. 왕은 그때서야 성충의 충언을 따르지 아니한 것을 후회하였다. 현재 부여에서는 그를 흥수(興首)·계백(階伯)과 함께 삼충사(三忠祠)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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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남도지(忠淸南道誌)』 하(下)(충청남도, 1979)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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