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덩이
손주희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고개 끄덕임으로 숫자를 센다. 큰딸 아래로 동생이 넷이다. 동생들과 함께 뒷 자석에 앉은 큰딸이 밖을 내다보다가 버스 속 낯선 이들의 눈길과 부딪힌다. 버스 안의 사람들이 둘, 넷, 다섯. 손가락으로 점을 찍고 스케치하듯이 한다. 가족이 외출하여 신호등에 멈출 때 마주하는 버스 안의 풍경이다. 귀여운 동생이 태어날 때마다 빨리 보고 싶어 학교에서 집까지 쉬지 않고 뛰어왔다. 헉헉거리면서 상기된 얼굴로 환하게 웃던 딸이 사춘기가 되면서 가족들과 함께 외출하지 않으려 했다.
“다 같이 가면 나는 안 가.”
점점 더 가족과 함께 하지 않고 돌아섰다. 맏이와 함께하기 위해 방학이 될 때마다 좁은 승용차 대신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에 올라갔다.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에 가서도 같은 차를 타고 다니는 일행들이 한마디씩 건넸다.
"동생들 잘 챙겨라."
"엄마가 힘들겠다. 엄마한테 잘해라."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치명타를 당한다는 속담이 있다. 한마디씩 하는 말이 딱딱한 고드름처럼 뾰족한 돌덩이가 되어 딸의 가슴에 꽂혔다. 큰애는 방학마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 여행을 몇번 다닌 뒤 부터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것 같다. 유럽의 여러나라를 여행하면서 딸이 오롯이 즐기는 듯 행복해 보여서 나는 안도했었다.
서른을 넘긴 딸이 마음 한 구석에 먼지로 뒤덮힌 옹이를 내민다. 잘하고 있는 딸에게 습관적으로 채찍을 가했다.
“엄마가 맨날 말했잖아. 니가 잘해야 동생들이 따라한다. 니가 똑바로 해야 동생들이 보고 배운다. 애들이 잘못하거나 함부로 행동해도 가만히 힜는 내가 혼나고•••.”
어릴 때 뇌리에 박혀 아팠다며 딸이 울먹인다.
“학교에 갔다와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기분 좋게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내 몫이 없을 때 가장 억울하고 속상해서 동생들을 괴롭히기도 했어.”
처음으로 하는 이야기라며 분수처럼 솟구치는 눈물이 전화기를 적신다.
또한, 사춘기 시절 4층 옥상에서 죽음을 생각했단다. 자살은 보험이 안 나오니 엄마 아빠가 보험을 탈 수 있는 사고사를 연구했다고 한다. 아뿔사! 살던 상가를 팔고 잔금 받아 아파트로 이사 갈 계획이었다. 세입자의 방해가 잔금대신 계약취소로 우리집은 쑥대밭이 되었다. 뒤죽박죽 얽힌 자금문제를 딸이 알아챈 것 같다. 쓰나미가 덮쳤다. 내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순식간에 장대비같이 쏟아진 화살로 고슴도치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충분히 상상이 된다. 언제나 큰 애는 철이 들어 이해할 거라고 내 맘대로 믿었다.
맞벌이로 큰애를 친정엄마가 양육했다. 돌 지나고 편찮으신 엄마 대신 시골에 계신 시어머님이 맡았다. 딸이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떨어져 지냈다. 게다가 시동생 가족이 시댁에 살면서 한 살 어린 동생에게 늘 양보하고 눈치 보며 많이 울었다. 얼굴에 난 잦은 손톱자국이 내 심장엔 흉터로 남았다. 좋아하던 토마토를 사 가면 사촌동생에게 뺏길까 봐 구석에서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웠다. 주말마다 엄마 아빠 따라간다고 우는 딸을 억지로 떼어놓았다. 잠들 때까지 남편이랑 시댁 문밖을 지키며 몇 시간씩 소리죽여 눈물을 삼켰다.
중학생 때 수학 선생이 되고 싶다던 애는 결국 대학은 싱가폴에서 이과를 졸업했다. 어려운 영어로 인해 힘들었던 유학시절을 보냈다. 첫 직장은 싱가폴 회사인데 매일매일 한숨을 삼키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2년 반 동안 언어의 벽에 부딪혔다. 타고난 이과생이라 그런지 한국어도 매끄럽진 않다. 딸은 덤덤히 말을 이어 갔다.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현실을 직시하니 밑바닥인데 더 내려갈게 있겠어? 나는 그때 죽었다. 예전에 이미 죽었으니 지금 해보고 정 안 되면 그때는 죽기밖에 더 하겠어, 하는 마인드로 견뎠어.”
첫 직장에서 실력으로 인정받고 지금 다니는 연구소에서도 성실함에 더한 기발한 아이디어로 지혜를 발휘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딸은 서른살이 될 때까지 가슴아픈 일 들이 많았다. 돌도 안 된 딸이 두 번의 장중첩으로 치료 받았다. 어른 세 명이 팔 , 다리, 머리를 두 손으로 꽉 붙잡아도 감당 못 할 정도의 괴력으로 몸부림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힘들어하는 딸에게 내가 준 글은『표풍부종조(飄風不終朝) 취우부종일(驟雨不終日)』'회오리바람이 아침 내내 부는 것도 아니고 소나기가 종일 내리는 것도 아니다. (노자, 도덕경23장) 아무리 강한 태풍도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고 하늘에서 몰아치는 소낙비도 하루 종일 내리지는 못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듯이 몇 년 동안 딸을 위로하고 달래며 씨를 뿌렸다. 직장동료와 상사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지난날 삶을 포기하지 않은 선택과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스스로 칭찬했다.
"엄마, 처음에는 돌덩이를 떨쳐버리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돌덩이를 안고 갈 마음의 준비를 조금씩 하고 있었던 것 같애. 이제는 돌덩이를 품고 나아 갈 수 있을 것 같아."
전화기 속 딸의 목소리가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