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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쌍수(定慧雙修)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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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염송] 중에서.. (145편) 20230626
제목 : 불법대의(佛法大意)
충 국사에게 어떤 중이 묻되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하니 국사가 대답호대 "문수당 안에 만 보살이니라" 하였다. 중이 다시 말호대 "학인이 잘 모르겠습니다." 하니, 국사가 대답호대 "대비 보살은 천 개의 눈과 손이니라" 하였다.
(한문 원본)
忠國師因僧問 如何是佛法大意 師曰 文殊堂裏萬菩薩 僧云 學人不會 師曰 大悲千手眼
(또 다른 번역본)
충국사가, 중이 묻되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함으로 인해 국사가 가로되 문수당(文殊堂裏) 속의 만 보살이다. 중이 이르되 학인(學人)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국사가 가로되 대비천수안(大悲千手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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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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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뭣고]의 곁가지 김태현입니다. 😄🙏
한 주일 잘 보내셨지요.. 😄
※ 이 글은 주로 수행을 처음 하시는 분들을 위주로 쓰이고 있답니다.
오래도록 공부를 해오신 분들에게는 글이 길어서 좀 지루할 수 있답니다. ^^
ㅡ♡
(본문 해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내용을 단 한마디로 표현하면 [부처님 마음은 대자대비하다]라는 뜻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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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용은 전 편(144편)과 같은 내용인데요.
전편에서는 부처님의 마음은 (정)과 (사랑)과 (자비)가 풍부하다는 뜻으로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으로 부처님 마음을 표현했다면..
오늘은 부처님 마음을 대비천수안(大悲千手眼)의 비유로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 한 마음을 표현한 내용이랍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사전적 의미는 [그지 없이 넓고 큰 자비로움]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요.
대자대비 뜻의 주석(註釋)에는?
[부처님이 중생을 사랑하는 모습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입니다. 끝없이 사랑하고 끝없이 슬퍼한다는 뜻인데, 왜 슬퍼할까요?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겨 슬퍼하는 것이죠. 일반적으로는 줄여서 자비(慈悲)라고 씁니다. ‘자비롭다’처럼 말이죠.]
라고 해석되어 있었답니다.
쉽게 말해 부처님의 마음은 전편과 같이 아주 큰 사랑과 자비가 넘쳐흐른다는 뜻이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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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답니다.
충 국사에게 어떤 중이 와서 묻되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大義)입니까?" 하고 물으니
여기서 말하는 대의(大義)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큰 도리]라는 뜻인데요.
쉽게 말해
"어떤 것이 불법이 지키고 행하여야 할 큰 도리(道理)입니까?"
하고 어떤 중이 충 국사에게 묻는 거랍니다.
그랬더니 충 국사가 대답하길..
"문수당 안에 있는 만 보살이니라" 했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문수당(文殊堂)이란 중국 자료를 찾아보니까 당나라 때(824년) 장경 4년 오대산에 지어졌다가 소실되었던 것을 원나라 때 다시 지어졌다고 되어 있었는데요.
원나라 때에는 "문수전"이라고도 불리며 주로 문수보살을 모신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답니다.
쉽게 말해
"문수당 안에 만 보살이니라"라는 말은?
보살이 한 명도 아니고 만 명이나 되는 보살들이 사랑과 자비를 베푸니 그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크겠느냐?라는 뜻이랍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마음은 만 명이나 되는 보살들이 행하는 것만큼 큰 도리(道理)로 중생들을 보살핀다는 뜻이랍니다.
그랬더니 다시 중이 이 말을 못 알아듣고..?
"학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니까 다시 이렇게 답변을 해주고 있네요. ^^
"대비보살은 천 개의 눈과 손이니라"
라고 말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천 개의 눈과 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
(여기서 한 번 상념(想念)을 해 보시고 다음 글을 읽어 보시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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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톱! 아래 글로 바로 넘어가지 마시고 상념(想念)을 해보십시오..^^
[천 개의 눈과 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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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표현이라 좀 어렵지요.?^^
여기서 말하는 [천 개의 눈과 손]이란?
부처님이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으로 중생들을 보살펴 주신다는 뜻글자랍니다.
중국 글은 형용사나 감탄사 등을 표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인데요.
그만큼 부처님이 중생들을 향한 사랑과 자비는 크고 넓다는 뜻이랍니다.
하나도 아니고 천 개 식이나 되는 눈으로 지켜봐 주시고 천개식이나 되는 손으로 보살펴 주시니 부처님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크겠느냐? 하는 뜻이랍니다.
이렇게 큰 사랑과 자비가 부처님의 도리(道理)라는 뜻입니다..
부처님 법을 깨닫고 증득했다고 하시는 분들도 당연히 이러한 도리를 행하여야 하는 것이고요..
오늘 본문 내용은 이것이 다랍니다. 😄🙏
~♡
《참고자료 : 천수안》
(아래의 링크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m.search.daum.net/search?w=img&q=%EC%B2%9C%EC%88%98%EC%95%88&DA=IIM&vimg=68R4kDZh3W0GCA-J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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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들은 초보자분들을 위한 보충 설명이랍니다. 오래 공부하신 분들은 페스 하셔도 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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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앞전에 (144편)에서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요. ^^
거기서 유정(有情)이란 정과 사랑과 자비가 많다는 뜻이라 했잖아요? ^^
그런데 혹시 중국에 가서 유정(有情) 이란 말을 하면 안 된답니다. ^^
우리는 흔히 인사치레로 "정이 많아 보인다?" 또는 "정이 많다" 또는 "정이 많아 좋습니다" 하는 말들을 곧잘 쓰잖아요?
그러나 중국에 가서는 절대로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답니다.
특히 여성분들에게 했다간 잘못하면 얼굴에 오선지가 생길지도 모른답니다? ^^
왜냐하면 중국에서 "정이 많다"라는 의미는
"당신은 몸이 헤프다"라는 뜻으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몸을 파는 창녀라는 의미도 있으니까요.
중국에서는 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들은 성관계를 뜻하는 의미이거든요.
제 경우도 초기에 비즈니스 자리에서 한족 파트너의 부인에게 우리 식으로
"부인은 참 정이 많아 보이십니다"
했다가 다들 웃음바다가 터진 적이 있었는데요. ^^
저는 처음에 이 사람들이 왜 웃지? 했답니다? ^^
다들 배운 사람들이라 내가 중국어가 서툰 것을 알고 그런 이야기는 중국에서 하면 안 된다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해 주더라고요.
지금은 다들 친한 친구들이지만 당시에는 씨끕 했답니다. ^^"
저도 이번에 중국 자료를 찾아보고 알게 된 사실인데요.
당시에는 실수를 했지만 이번에 보니까?
당나라 때에는 유정(有情)이라는 뜻이 '지금 우리와 같은 뜻으로 쓰였구나' 하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요.
이렇게 같은 한문이라도 시대와 배경에 따라서 뜻이 전혀 다르게 쓰인다는 것을 이번에도 새삼 느끼게 되었는데요.
특히 옛날식 표현이나 불교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이야기들은 꼼꼼히 중국 자료들을 찾아보고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도 새삼 느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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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는 부처님 마음은 유정(有情)이 풍부하다는 내용이었다면,
오늘을 부처님 마음은 대자대비하다는 뜻으로 충 국사가 말씀하셨는데요.
오늘 내용도 아주 합당한 말씀이랍니다.
왜냐하면 성문사과(聲聞四果) 정도만 되더라도 정과 사랑과 자비는 물론이고 대자대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비의 마음은 넘치는데 부처님 같은 경우는 오죽할까요?
앞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본성을 증득하게 되면 마음이 본성의 마음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는데요.
이 마음은 실로 엄청나게 고요하고 아주 안정된 마음으로 바뀌게 된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아주 풍요로워진답니다.
그래서 자비가 있는 것이고요.
물론 자비의 크기는 도력(마음의 힘)에 따라 다르지만 부처님 같은 경우는
만 명의 보살들의 자비를 다 합쳐도 부처님의 자비가 더 크고
천 개의 눈과 천개의 손만큼 부처님 자비의 손길은 대자대비하다는 뜻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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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 혹시 [부처님 발바닥] 또는 [부처님 귀] 혹은 오늘처럼 [부처님 눈]이나 [손] 그러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시나요?^^
이러한 비유는 모두가 행(行)을 뜻하는 의미랍니다.
지금처럼 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집안에만 앉아서 입으로만 불법이 이러네? 저러네? 하는 것이 아니라 원효스님처럼 직접 중생들 속으로 들어가 중생들을 위해 법을 펼치는 것이랍니다.
[부처님 발바닥] 을 뜻하는 것도 부처님은 맨발로 다니면서 불법을 널리 펼쳤다는 뜻이 담겨 있답니다.
왕태자의 몸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맴 몸으로 그것도 당시에는 최하층 들이나 맨발로 다녔었는데 부처님 스스로가 최하층으로 내려가셔서 맨발로 다니시면서 널리 불법을 펼치신 분이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발바닥을 크게 묘사한 것이고요.
[부처님 귀]도 마찬가지랍니다.
부처님 귀의 뜻은 중생들의 목소리를 넓고 깊게 들어주셨다는 뜻을 담고 있답니다.
그래서 부처님 귀를 크게 묘사해 둔 것이고요.
이렇게 상형문자는 놓인 순서나 위치나 크기나 상태에 따라서 그 뜻이 모두 다르답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난한 중생들은 물로이고 부유한 상인이나 왕이나 귀족들은 물론이고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중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셨답니다.
그리고 현재 출가자들도 이런 면들을 본받아 행해야 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선지식인이라 하는 최고 어른들이 그런 짓들을 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부처님 말씀대로 말이 안 되지요?
참으로 부끄러운 한국 불교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제발들 좀 그러지들 마시고 한국 불교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길 빌 뿐인데요.
아무튼
이렇게 부처님 발과 귀를 크게 묘사해 둔 것은 옛날 사람들은 모두 상형 문자로 그 뜻을 나타냈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 발과 귀도 크게 묘사해 둔 거랍니다.
그만큼 크게 듣고 넓게 펼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
그리고 오늘 내용의 [부처님 눈]과 [손]도 마찬가지랍니다.
그것도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으로 중생들을 보살피시니 그 사랑과 자비는 이루 말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한문식 표현으로 대자대비(大慈大悲)라고 표현을 하는 거랍니다.
살아생전에 [부처님의 눈]을 통해 중생들의 고달푼 마음들을 알아차리시고 [부처님의 손]으로 중생들의 마음들을 보살펴 주셨다는 뜻이랍니다.
그것도 천 개나 되는 눈과 손으로 말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대자대비한 마음] 이겠어요?
이렇게 본래 불교의 참 가르침은 자비로운 [눈]과 [손]으로 불자들을 대하고 중생들을 대해야 한답니다.
지금처럼 권위를 내세우고 중생들의 윗자리에 앉으려 하는 모습들은 절대로 하셔서는 안된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자신부터가 맨발로 탁발을 다니셨고 남는 음식들조차 다음날로 가지고 가시지 않고 바로 그날로 들짐승들에게 나누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불법을 깨닫고 평생을 낮은 자리에서 불법을 펼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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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용은 모든 불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대중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라면..
불교는 대중들에게 [대자대비한 마음]을 가르치는 종교라 그렇답니다.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만..
특히 모든 출가자분들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위치에 계시는 어른들은 특별히 더 오늘 내용을 귀담아들으셔야 한답니다.
[부처님 손]으로 중생들의 마음을 보살피듯 보살펴 주셔야 한답니다.
지금처럼 친견비라 해서 더러운 돈들을 요구해서는 절대로 안 된답니다.
"중생을 재도한다"라는 뜻은 중생들이 불성의 마음을 증득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뜻인데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스승들은 물론이고 모든 출가자 분들은 수행을 하는 모습들을 대중들에게 보이셔야 한답니다.
그래야 대중들도 수행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참된 중생 재도랍니다.
출가자들이 수행을 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지 못하는데 어떻게 대중들이 수행을 하려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한국 불교가 이렇게 가서는 안된답니다.
오늘 내용처럼 대자대비의 마음은 아니더라도 사랑과 자비 정도는 대중들에게 보이셔야 한답니다.
그리고 모든 큰 어른들은 모든 출가자들의 살림살이들을 [부처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부처의 손]으로 보살펴 주셔야 한답니다.
젊은 출가자들이나 학인들 이..
배는 혹시 굶고 있지는 않은지?
냉골에 잠을 자고 있지는 않은지?
수행을 하는데 애로점은 없는지?
수행들은 잘 하고는 있는지?
공부들은 잘 하고는 있는지?
혹시 보살들과 나쁜 짓들? 은 하고 있지 않은지?
이러한 행(行)들이 모두 [자비의 눈]이고 [자비의 손]이고 [자비의 발]이고 [자비의 귀]랍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모두들 꼭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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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법에 대한 내용, 질문이 있는 경우 질문 내용
이 란은 우리들의 란인데요.
질문이나 세상살이 이야기 등을 자유롭게 나누는 란이랍니다.
그리고 내용 끝에 (진실)이라는 표시는 제가 체험한 내용들과 마음에 느끼고 있는 것들에 대한 [동의] 표시랍니다.
오늘도 한 카페에서 올라온 질문 내용인데요.
같이 공유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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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내용 1)
관세음 보살..()
안녕하셨지요.^^
지난번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에 대한 답변은 진심으로 잘 받아보았습니다.
한거번에 질문 드리면 힘드실것 같아 제가 그동안 공부하면서 궁금했던 것들을 질문 드립니다.
오늘은 정혜쌍수(定慧雙修)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듣기로는 선정과 지혜를 같이 닦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몰라서 질문을 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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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아이고^^ 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렇잖아도 공간이 좁아서 다른 질문이나 법담들도 답장만 보내드리고 여기에는 못 올리고 있었는데요.
그래도 님께서 올려주시는 질문 내용이 좋아 매번 즐겁게 올려드리고 있답니다.^^
언제든 좋으니 부담 갔지 마시고 지금처럼 나누어서 계속 올려주시면 최선을 다해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공간이 좁으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
정혜쌍수(定慧雙修)란 선정과 지혜를 말하는 건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선정이 있는 곳에 지혜는 자동으로 같이 간다]는 뜻이랍니다.
'바늘 가는 곳에 실도 간다'라는 뜻과 같은 뜻이랍니다.
'선정에 들어서 지혜를 쓴다는 뜻'입니다.
(왜 그런지는 뒤에 지혜 부분에서 같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듣기로는 선정과 지혜를 같이 닦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
라는 말은 잘못된 말씀이랍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네이버 사전에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것]이라고 되어 있어서 일 건데요?
<참고 네이버 사전>
(아래 링크를 클릭 또는 복사)
https://ko.dict.naver.com/#/entry/koko/78c8cdd85ce24faea4ed12cac4b84bb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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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해석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랍니다.
깨닫지 못하신 분들이 해석을 하다 보니까 이런 해석들이 나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지혜는 닦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쓰는 것이라 그렇답니다.
(왜 그런지는 뒤에 지혜 부분에서 같이 설명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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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부터 말씀드리면..
선정도 닦는 것이 아니랍니다.
선정을 어떻게 닦을 수 있을까요?
선정이란 곧 본성 상태를 이르는 말인데요.
본성은 이미 닦여 있기 때문에 이미 공(空)이기 때문에 닦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그런 거랍니다.
그냥 찾아서 쓰면 되는 것이랍니다.
굳이 말을 하면 "선정 속으로 들어간다." "선정에 든다"라고 말은 할 수 있지만 "선정을 닦는다"라는 말은 맞지를 않는답니다.
왜냐하면 선정은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닦는다" 란 표현은 오직 마음 하나 박에는 없답니다.
"도를 닦는다" "수행을 연마(硏磨/갈고닦는다) 한다"다)한다" 등은 모두가 마음자리를 갈고 닦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그리고 마음이 닦여 있지 않으면 선정이고 지혜고 모두 어러운 것이랍니다.
마음이 닦여있지 않은데 어떻게 선정에 들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중생들 마음은 더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더러운 마음들을 갈고닦아내야 하는 것이랍니다.
마음을 갈고닦아서 완전히 공(空)이 되어 있어야 비로소 선정에 들 수가 있는 거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좌선을 하고 마음만 고요하면 그것을 선정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대단히 잘못 알고 계시는 거랍니다.
왜냐하면 선정이란 본성 자리를 깨닫고 그 본성 자리에 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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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닦는다" 란 어원은 청소를 하는 모습에서 따온 것인데요.
걸레질이나 빗자루질을 할 때 보면 왔다 갔다 반복을 하면서 닦잖아요?
이렇게 수행은 반복을 하면서 닦는 거란 의미랍니다.
거울을 닦거나 방 청소처럼 마음이 완전히 깨끗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닦아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행이란 깨닫기 전이나 깨닫고 나서나, 간화선이나, 조사선이나, 위파사나나 최종 목적지는 반복을 하면서 마음을 깨끗이 닦아 내는데 그 목적이 있답니다.
한두 번 청소하고 끝내는 그런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될 때까지는 끊임없이 렌즈를 아주 맑고 깨끗하게 갈아서 연마를 하듯이 내 마음을 반복하면서 갈고닦는 것이 수행이랍니다.
아무리 아라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완전한 부처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방심을 하지 말고 마음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집 안에 방들도 아무리 깨끗하게 쓸고 닦아도 며칠 지나면 또 먼지가 끼듯이 우리들 마음도 조금만 방심하면 여지없이 더러운 오물들로 가득 찬답니다.
중생들 마음은 늘 이런 식이기 때문에 마음을 늘 쓸고 닦아내야 한답니다.
그래야 비로소 선정에 들 수 있는 거랍니다.
이렇게 선정에 들 수 있을 때 비로소 지혜바라밀도 극대화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깨닫고 증득을 하게 되면 그 자체가 곧 선정 상태라고 보시면 된답니다.
그래서 정혜쌍수(定慧雙修)가 가능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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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선정(禪定)이란 단어도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면[한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하여 마음이 하나의 경지에 정지하여 흐트러짐이 없음.]라고 해석되어 있을 건데요.
<참고 네이버 사전>
(아래 링크를 클릭 또는 복사)
https://ko.dict.naver.com/#/entry/koko/313ef6b93d264bf5a9043952b351d4bc
이 해석도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랍니다.
왜냐하면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선(禪)이란 "사물을 생각하라"라는 선(禪)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선(禪)은 생각하는 순간 바로 어긋날 수 박에 없답니다.
왜냐하면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선(禪)이란 오로지 의문(疑問)으로 들어가는 선(禪)이기 때문에 선종(禪宗)이라 하는 거랍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선종(禪宗) 내에서 이러한 해석들을 알아 자릴 만한 분들이 안 계시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 할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선정(禪定)이라는 단어는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선(禪)인데 이 선(禪)을 [한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하여]라는 해석 자체가 말이 안 되는 해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선정(禪定)이란 본성 자리를 깨닫고 증득한 상태에서 본성 자리에 들어가 있는 상태를 말하는 거랍니다.
보통 "부처님이 선정에 드셨다."라는 말은 "부처님이 본성(불성) 자리에 드셨다"라는 뜻이랍니다.
그리고 선정은 어디까지나 깨닫고 증득한 사람들의 영역이랍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본성 자리를 먼저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는 것이고요.
본성 자리를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견성(見性)이라 하는 것이고요.
왜냐하면 오늘 내용인 [지혜]는 물론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육신통도 물론이고 일단은 본성 자리를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깨닫고 증득한 사람들은 꼭 좌선 같은 것들을 안 하더라도 그 마음 자체가 선정 상태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지혜를 쓸 수 있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깨닫고 증득한 사람들은 선정과 함게 지혜가 같이 한답니다.
그래서 정혜쌍수(定慧雙修)라 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정(定)이 없는 혜(慧)는 있을 수 없다" 하는 거랍니다.
쉽게 말해 "선정이 없으면 지혜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혜쌍수(定慧雙修)라 한답니다.
[선정]에는 [지혜]가 늘 함게 한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일반 사람들도 선정에 드는 방법이 있답니다.
그 방법이 [의식이 깨어서 현재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 이랍니다. (※)
왜냐하면 의식이 깨어있는 바로 그 상태가 본성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앞전에 경허선사도 그랬고 부처님도 이렇게 깨어있는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해 보라 하신 거랍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계속 깨어서 보다 보면 문득 본성을 알아차리게 되어 있답니다.
그래서 경허선사도 지난주 경허선사 편에서 일주일씩 기다릴 필요도 없이 하루나 이틀이면 깨닫는다고 하신 것이고요.
부처님은 이것을 [알아차림의 확립]이라고 표현하셨답니다.
[알아차림의 확립]이란 의식이 깨어서 알아차리는 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보라는 뜻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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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정혜쌍수(定慧雙修) 중에서 혜(慧)에 해당하는 지혜(智慧/知慧)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여러 불들이 아셔야 할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智慧/知慧)는 일반적으로 알고 계시는 머리에서 나오는 그런 지혜가 아니랍니다.
머리에서 나오는 것은 [지식] 이지 [지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머리에서는 지혜가 일어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머리로는 기억해 내는 것은 할 수 있어도 알아차리고 결정하는 기능은 없답니다.
머리로 기억해 낸 것을 알아차리고 결정하는 기능은 오로지 본성의 영역이랍니다.
머리의 기능과 본성의 기능이 동시에 같이 작동하다 보니까 헷갈려 하시는 거랍니다.
이러한 것은 자신을 잘 관찰해 보시면 금방 알 수가 있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주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순간적으로 어떤 새로운 지혜(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을 겁니다.
이때 자신의 머리와 마음을 분리해서 잘 관찰해 보십시오.
그러면 머리는 완전히 정지된 상태에 있을 것이고 순간적으로 어떤 알아차림(지혜/아이디어)이 마음에서 일어남을 알 수 있답니다. (진실)
이때 이 알아차림은 절대로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답니다.
지혜(아이디어)는 머리가 작동하는 순간 정지가 된답니다.
머리가 정지되면 지혜는 작동하게 되는 것이고요.
머리의 기능은 그저 기억하고 저장하고, 기억한 것을 기억해 내고, 계산하고, 분석하고 추리하는 등의 기능이 있을 뿐이지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는 그런 기능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를 두고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고요.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이런 이치를 모르고 있어서 문제인 것이지요.
지혜는 순수한 본성(불성/성령/마음)의 영역이랍니다.
머리의 기능은 그저 기억하고 저장하고, 기억한 것을 기억해 내고, 계산하고, 분석하는 기능 등을 통해 본성이 알아차리고 결정을 하는 것이랍니다.
머리가 어떻게 결정을 내리겠습니까?
마음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지요. (진실)
그래서 옛 분들은 이를 두고 "네가 여기에 오게 한 놈" "네가 그것을 하게 한 놈" 그놈을 잘 참구해 보라 하신 것이고요.
지금 이 내용이 본성을 깨닫는 데에는 참으로 중요한 내용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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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람에게는 지식(知識)이 있고 지혜(智慧/知慧)가 있답니다.
지식(知識)은 학교나 사회에서 배우고 익히는 것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러나 지혜(智慧/知慧)는 [경험]에서 오는 거랍니다.
쉽게 말해 지식은 배우고 익히는 거라면 지혜는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을 말한답니다.
왜냐하면 본성(불성/성령/마음)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동안 수십억을 통해 경험한 것들이 그대로 본성(마음) 자리에 녹아 있기 때문에 이것을 꺼내서 쓰는 것을 지혜라 하는 거랍니다.
이 이치(理致)를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큰 도인(마음의 길)이 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것은 누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관찰해 보시면 금방 알 수가 있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가 문득 떠오를 때 머리에서 떠오른 것이지? 아니면 마음에서 떠오른 것이 한번 잘 관찰해 보십시오?
그러면 금방 알 수가 있답니다.
머리는 기억한 것들을 떠올릴 수는 있어도 한 번도 보고 듣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떠올릴 수는 없답니다.
우리의 머리는 그만큼 똑똑하지도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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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네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살아간답니다.
그 네 가지란
[몸의 기능]과
[생각의 기능]과
[의식의 기능]과
[마음의 기능] 이 그것입니다.
지식은 [의식의 기능]을 통해 [몸의 기능]과 [생각의 기능]으로 외우고 익힌 것들을 말한다면..
그러나 지혜는 [의식의 기능]을 통해 [본성/마음] 수십 억겁 동안 마음에 저장되어 있는 것들이 스스로 일어나는 것을 뜻한답니다.
[지식]은 평생 동안 30년 혹은 60년 혹은 80년 동안 살아오면서 [머리]나 [몸]으로 외우고 익힌 것을 꺼내서 쓰는 거라면
[지혜]는 수십 억겁 동안의 경험들이 본성(불성 성령 마음)에 함축되어 있는 것들을 꺼내서 쓰는 거랍니다.
예를 들어 간혹 보면 태어난 지도 얼마 안 되는 어린아이가 작곡을 하거나 피아노 등을 유능하게 치거나 하는 특별한 재능들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또는 전생을 정확히 기억하거나 한 번도 배우지 않은 영어나 그 외 외국어 등의 다른 나라 언어들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어린아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과연 머리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이런 아이들은 단 한 번 이러한 것들을 배운 적이 없는데 어떻게 머리로 기억하고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이미 전생부터 알고 있었던 것들이랍니다.
이미 전생부터 본성(불성/성령/마음)이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라 가능한 것이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들은 보통은 4세 ~ 14세까지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가 성인이 되어가면서 마음에 때가 묻으면서 점점 일반 사람들과 같아지게 되는데요.
사실은 기억을 못 하고 있어서 그렇지 누구나 4세 이전의 아이들은 의식과 본성 이외의 기능 들은 아직 모르기 때문에 본성이 열려있다고 보시면 된답니다.
4세 이전에는 누구나 깨어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차차 머리가 발달하고 교육을 받으면서 머리의 역할은 확대되고 본성의 역활은 축소되어서 그렇지요.
그래서 수행의 목적은 다시 머리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본성의 역할을 확대 시키는 훈련을 말한답니다.
이렇게 본성의 역할이 확대되고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선정(禪定)은 자동으로 깊어지고 지혜(智慧/知慧) 또한 자동으로 일어나게 되는 거랍니다.
여기서 아셔야 할 것은 우리의 육체로는 그 어떠한 것도 본성을 컨트롤할 수가 없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본성(불성/성령/마음)은 태초 이전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고 스스로 알아차리고 스스로 운영(運營) 하고 있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그저 우리의 육체 입장에서는 본성의 운영을 알아차리고 본성에 의지해서 그대로 따르는 것뿐이지요.
이것도 최소한은 깨달아야 가능한 것이고요.
그리고 이 알아차림은 일반적인 그런 알아차림이 아니라 우주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범위가 엄청나다는 것인데요.
저희 같은 사람들은 솔직히 아직은 많이 부족한 경우이지만 부처님 같은 경우는 삼천대천세계를 즉 전 우주를 선정에 드셔서 알아차리고 계셨는데요.
그래서 우리도 열심히 더 정진을 해야 하는 것이고요.^^
아무쪼록 님께서도 열심히 하셔서 꼭 좋은 결과를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
우리 모두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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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행자 내용
이 글은 연꽃이 활짝 피신 네 분을 위해 신설된 유마경(維摩經) 내용이랍니다. ♡
[유마경]은 [법화경]과 아울러 보살들을 가르치는 경전이랍니다.
이 말의 뜻은 깨닫고 증득한 사람들은 유마경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비교를 해 보면서 부족한 점들을 보충해 나가 보라는 뜻이 담겨 있답니다.
(아래의 사이트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youtu.be/vtL4VwXhp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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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광엄의 보리좌)
1:24:37~
그것은 무명을 비롯하여 늙음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번뇌의 유출이 전혀 없는 까닭에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좌로 삼습니다.
보리좌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온전하게 깨닫는 까닭에 온갖 번뇌를 잠재우는 것으로 좌로 삼습니다.
~1: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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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은 사성제(四聖諦)와 함게 부처님 가르침 중에서도 핵심 가르침 중에 하나인데요. ^^
이쪽 란에 계시는 분들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내용일 겁니다.^^
그래도 초보자분들도 보고 계시니 잠깐 다시 설명드리면,
십이연기법을 아주 쉽게 설명하면 많은 중생들이 무명(無明/무지無知) 때문에 여러 가지(12가지) 인연들로 역이게 되면서 결국은 고통 속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는 내용인데요.
이 내용은 깨닫고서 보면 명백한 사실이랍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처음부터 이 무명(無明)만 없애면 나머지 뒤에 오는 인연들도 자연히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인데요.
그리고 이 무명(無明)을 없애는 방법이 바로 마음을 완전히 비워서 공(空)으로 만드는 것인데요.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세상을 보면 아주 정확하게 세상을 볼 수가 있는데요.
이렇게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세상을 정확하게 보아야 무명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랍니다.
그러려면 결국은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대로 알아차림을 하셔서 알아차림의 확립까지 가셔야 하는데요.
이렇게 알아차림이 확립되셔야 비로소 마음을 비우고 버리는 것이 쉽게 된다는 뜻이랍니다.
내가 나의 마음이 어떤지?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을 비우고 버릴 수가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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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는 방법인데요.
제 경우는 십이연기법을 네 가지로 간추려서 관찰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관찰한다" 란 내가 나를 관찰하는 것을 말하는 거랍니다.
모든 수행은 이렇게 의식이 나를 향해 있어야 한답니다.
십이연기법 또한 열두 가지로 나누어서 나를 관찰해 보라는 것이지만 제 경우는 이것이 불편해서 네 가지로 줄여서 관찰하고 있는데요.
어차피 이 네 가지 안에도 다른 열두 가지 것들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인데요.
제 경우는 예전에 일을 할 때에도 복잡한 공정을 단순하게 만드는 데에는 조금 탁월한 면이 있었는데요. ^^
여기서도 그런 점들이 유용하게 쓰이게 되네요. ^^
지금 쓰고 있는 글들도 얼마든지 "판치생모(板齒生毛)"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표현을 할 수는 있는데요.
그러나 저는 중국식 방법보다는 부처님 방법이 맞는다고 보고 있답니다.
부처님 같은 경우는 오죽하면 팔만대장경 같은 말씀들을 남기셨을까요?
그만큼 말씀이 많았다는 뜻이랍니다.
한 이야기를 또 하고 한 이야기들을 또 하고 저보다는 훨씬 더 지루하게 말씀들을 늘어놓으셨는데요. ^^
저도 초기에는 부처님 말씀이 지루하게 느껴졌었는데요.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리들 마음에 각인시키기 위한 반복 말씀이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이 방법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맞는다고 보고 있답니다.
왜냐하면 인도 말도 우리와 같은 입소리 언어이고 입소리 언어를 쓰는 민족은 뜻 소리 언어문화를 쓰는 민족과는 달리 흘려서 듣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계속 반복해서 강조를 하는 거랍니다.
그러니 입소리 언어는 중국과 같은 뜻 소리 언어보다는 훨씬 더 말이 많을 수 박에 없었던 거랍니다.
그래서 팔만대장경 같은 경전이 나온 것이고요.
그래서 우리 같은 입소리 언어를 굳이 중국 말처럼 뜻 소리 언어로 배운다는 것이 더 어리석은 것이라고 저는 보고 있는데요.
제 경우는 입소리 언어든 뜻 소리 언어든 상관이 없지만 여러분들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따르잖아요?
아무튼 저는 이 네 가지로 하니까 효과가 매우 좋은 편이였는데요.
그렇다고 제가 하는 방법이 제일이라는 것은 아니고요. ^^
제게는 맞는다는 뜻이랍니다.
따라 해보시고 잘 맞으면 이렇게 해보시라는 얘기이고요. ^^
저는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누어서 저를 관찰하고 있는데요.
천째 [몸의 기능]
둘째 [생각의 기능]
셋째 [의식의 기능]
넷째 [마음의 기능]
등으로 관찰하고 있는데요.
방법은 이렇답니다.
나의 [몸]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의 [생각]은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
나의 [의식]은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
나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
또는
"어라? [생각]이 집착을 하니까 [의식]도 몽땅 그쪽으로 집착하고 있네?"
"어라? [생각]이 가니까 [의식]도 따라 가네?"
"어라? [의식]이 가니까 [몸]이 결국은 그 일을 하게 되네?"
"어라? [의식]이 가니까 [마음]도 그쪽으로 가 있네?"
"어라? [생각]이 그쪽으로 가 있으니까 [마음]도 그쪽으로 가 있네?"
하는 식으로 일단은 나의 [몸]과 [생각]과 [의식]과 [마음] 등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먼저 방향을 알아차린답니다.
그러면 뒤에 것들은 자동으로 쉽게 잠재울 수 있었답니다.
방향이 어디에 가 있는지 알아차리면 그다음은 다른 방향으로 [의식]이나 [생각]을 돌리는 방법으로 한답니다.
그러면 자동으로 다른 것들도 이어지지를 않는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지금 무엇에 집착을 하고 있다면 나의 [의식]과 [생각]과 [마음]도 같이 덩달아서 그곳에 집착을 하고 있다는 뜻이고
이 [의식]이나 [생각]이나 [마음]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 자동으로 다른 것들도 그쪽 방향으로 쏠리기 때문에 보내 있던 집착을 쉽게 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제가 마음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요.
저도 화택(火宅) 이야기에서 배운 것이랍니다. ^^
화택 이야기를 보면 아이들이 불타는 집에서 철없이 놀고 있습니다.
장자는 이를 보고 걱정이 되어 방편으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염소가 끄는 수뢰(성문승), 양이 끄는 수뢰(연각승), 소가 끄는 수뢰(보살승) 등의 장난감으로 아이들의 [의식]을 이 장난감 쪽으로 돌리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우리들도 이와 같이 하라는 뜻이랍니다.
그러면 자동으로 [생각]과 [마음]도 장난감 쪽으로 쏠리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의식]과 [생각]과 [마음]이 가 있는 방향으로 [몸]도 가게 되는 것이고요.
마치 어린아이가 그토록 가지고 싶던 장난감을 선물로 받았을 때 모든 [의식]과 [생각]과 [마음]과 [몸]이 그 장난감 쪽으로 가 있듯이 말이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
지금 집착하고 있는 쪽으로 의식이나 생각을 두지 말고 다른 쪽으로 돌리라는 뜻입니다.
수행적 관점으로 보면 화두나 알아차림 쪽으로 돌리라는 것인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답니다.
어차피 방편이기 때문에 잠시 본인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의식이나 생각을 강제로 돌려보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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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더 예를 들어 볼까요? ^^
지금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나게 되면 나의 모든 [의식]과 [생각]과 [마음]은 그 화가 나 있는 쪽으로 몰빵(집착)을 하게 되지요. ^^
그러면 [몸]에서는 심장이 벌렁거리고 힘출이 쏫구쳐 오르면서 심장은 요동을 치게 되고 모든 신경이 예민해지면서 결국은 화산이 폭발하듯이 감정이 폭발하게 되는 것이랍니다.
이때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다른 곳으로 돌려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기능]도 그쪽으로 따라가기 때문에 곧 안정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을 완전히 비우기 전까지의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라고 부처님도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러나 깨닫기 전의 사람들이나 증득하기 전의 사람들은 이런 방법 외에는 없다고 말씀을 하셨답니다.
왜냐하면 중생들은 자꾸 생각에 의지를 하고 집착을 하려 들기 때문인데요.
이러한 것들을 한 곳에 강제로 잡아두는 것이 수행이라 보시면 된답니다.
그래서 방편품과 비유품에서도 연속 적으로 말씀을 하셨던 것이고요.
해드릴 이야기는 많지만 더 하면 헷갈려 하실까 봐 이쯤에서 그만하겠습니다.^^
혹 지금 내용이 이해가 안 가시는 분들은 꼭 문자를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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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문답(禪問答)
중국 글은 뜻글자랍니다.
선문답에서는 마음을 뜻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키포인트랍니다.
모든 선문답은 그동안 공부한 내용들을 알아보는 것이랍니다.
깨닫고 증득한 것과는 크게 상관은 없답니다.
왜냐하면 우주보다 크고 넓은 이 불성(마음)의 세계를 몇 글자의 글과 말로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깨닫고 증득한 기준점은 글이나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성의 마음에서 오는 언행(言行)이 그 기준점이랍니다.
아무리 선문답을 잘 풀고 경전에 막힘이 없다 하더라도 불성의 마음이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선문답 같은 곳에 너무 집착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선문답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비교를 해보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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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선문(禪問)입니다.
[제불요집경에 말씀하시기를 "천왕여래께서 문수사리가 홀연히 불견과 법견을 일으키므로 두 철위산 사이에 빠뜨렸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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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답)
오늘 내용은 분별심(分別心)이 일어날 때에 결과인데요.
"이것이 불견이네", "저것이 법견이네", 하는 불별심이 일어나는 순간 철위산 골짜기에 빠지고 만다는 뜻이랍니다. ^^
만약에 천왕여래께서 저를 지금처럼 두 철위산 사이에 빠뜨리려 하신다면 저는 바로
[합장을 하고 모든 의식을 깨어서 현재 이 순간에 집중을 하고 현재 이 순간을 알아차릴 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무량겁 동안의 모든 부처들이 저의 법신을 감싸 주기 때문에 천왕여래 따위로는 저를 어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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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선문(禪問)입니다.
[유마거사가 수보리의 걸식하는 것을 보고 말호대 "외도육사가 그대의 스승이 되어서 그를 의지해서 출가하였고, 그들이 떨어진 곳에 그대로 떨어진 곳에 그대도 떨어져야 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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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트를 드리자면 위에 선문(禪問)에서는 두 철위산 사이 골짜기로 떨어뜨리는 내용이라면..
지금 내용은 반대로 떨어뜨리는 내용이랍니다.^^
이 물음에 합당한 답을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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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음 주 선문염송
[선문염송] 중에서.. (146편) 20230717
제목 : 무봉탑(無縫塔)
충 국사에게 숙종황제가 묻되 "스님께서 백년 뒤 열반에 드시면 무엇을 해 드리리까? 했다. 이에 국사가 대답호대 "나를 위해 무봉탑을 세워 주시오" 했다. 황제가 "그러시면 그 탑의 본을 보여주십시오." 이에 국사가 양구했다가 말호대 "아시겠습니까?" 하니 황제가 "모르겠습니다." 했다. 국사가 말호대 "이에 법을 부촉한 제자의 탐원이 있는데, 그 일을 알 것이니 그에게 물으소서" 했다. 국사가 열반에 든 뒤에 황제가 탐원을 불러 묻되 "이 뜻이 무엇이오?" 하니, 탐원이 대답호대 소상의 남쪽과 담수의 북쪽 [설두가 말호대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군" 했다.]의 복판에 황금이 있는데, 한 나라의 꽉 찼네. [설두가 말호대 "산 모양으로 된 주장자로구나" 했다.] 그림자 없는 나무 밑에서 한 배에 탔고 [설두가 말 호대 "바다가 조용하고 강이 맑구나" 했다] 유리 대궐 위에 아는 이 없어라. [설두가 말호대 "알았다" 하였다] 하였다.
(한문 원본)
忠國師 和尙百年後所須何物 師云 檀越與貧道造箇無縫塔 帝云 請師塔樣 師良久云 會麼 帝云 不會 師云 貧道有付法弟子耽源 却諳此事 請詔問之 師遷化後 帝詔耽源問 此意如何 源對云 湘之南潭之北 中有黃金充一國 無影樹下合同船 琉璃殿上無知識
(또 다른 번역본)
충국사가, 숙종제(*肅宗帝)가 묻되 백년후(*百年後; 죽은 후)에 수요(須要)하는 바가 어떤 물건입니까 함으로 인해 국사가 이르되 노승(老僧)에게 저(箇) 무봉탑(*無縫塔)을 만들어 주십시오. 황제가 가로되 스님께 탑양(塔㨾; 탑의 모양. 탑의 양식. 㨾은 樣과 같음)을 청합니다. 국사가 양구(良久; 잠시 말없이 있는 것)하고는 이르되 아시겠습니까. 황제가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국사가 이르되 나에게 부법제자(付法弟子; 법을 전한 제자)인 탐원(耽源)이 있어 도리어 이 일을 압니다. 청컨대 불러서(詔) 그에게 물으십시오. 국사가 천화(*遷化)한 후에 황제가 탐원을 불러서 묻되 이 뜻이 무엇입니까. 탐원이 이르되 상(湘)의 남쪽이며 담(潭)의 북쪽이니(*相之南譚之北) 설두가 이르되 외손바닥으론 두드려(浪) 울리지 못한다. / 가운데 황금이 있어 일국(一國)을 채운다 설두가 이르되 산형 주장자(*山形拄杖子)다/ 그림자 없는 나무 아래 배를 합동(*合同舩)하니 설두가 이르되 해안하청(海晏河淸)이다/ 유리 궁전 위에 지식(知識)이 없다 설두가 이르되 염(拈)해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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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개인별로 답을 주시거나 질문이 있으시면 메일로 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지난 글들이 필요하신 분들은 메일 주소를 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
e-mail : 119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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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법문 동영상
제목: 마음공부를 하려면 꼭 알아야 할 것 [종범스님 법문 몰아보기]
(아래의 링크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www.youtube.com/live/Z4qyJuZ2Sak?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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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함게 수행을.. 》
연세가 있으신 분들을 위해서 그동안 우리들끼리만 공유하고 있었던 [추억의 음악 캠프]인데요.
건달바(乾達婆)처럼 얼마든지 음악을 통해서도 수행을 할 수가 있답니다.
방법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중에서 귀에 의식을 집중하면서..
"지금 듣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하면서 안으로 의식을 돌려보는 것인데요.
★ 음악을 들으면서 수행하기
음악에만 끌려들어 가면 내가 지는 것이고요.
듣고 있는 [나]에게 집중해야 한답니다.^^
이것이 조견오온(照見五蘊) 법이랍니다.
같이 귀로 들어보시면서 듣고 나는 누구인가? 하면서 참구해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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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Randy Vanwarmer - Just When I Needed You Most (TRADUÇÃO) (1979)
(아래의 링크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youtu.be/LNks_1_Oz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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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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