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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개인 형편, 사회 제도 무관한 절대 자유>의 줄거리 :
개인 형편에 반응하는 것은 정욕에 끌려다니는 것이라 하십니다. 사회 제도에 반응함도 거류민이고 나그네인 산 돌들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개인 형편과 사회 제도 모두에 대해 자유함 속에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선을 행하면 됩니다. 즉 개인 형편과 사회 제도 아래서 그 것들에 반응하지 말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이지요. 그리고 이 자유는 네 가지 나의 정체성에서 비롯합니다.
개인 형편, 사회 제도 무관한 절대 자유
(베드로전서 2:9~17)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본문은 개인 형편에도 상관이 없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 제도나 정치가가 어떤 사람이냐에 대해서도 상관이 없는 절대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9절을 보면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세상 사람들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신비한 빛 안으로 끌어들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시려고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의 특권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의 네 가지 측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는 방법이 16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자유 속에서 종과 같이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라는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자유와 종은 반대의 개념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아의식을 갖게 되면 앞서 말씀드린 네 가지 특권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특권을 허락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게 하심입니다. 덕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함 속에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는 종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사도 베드로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11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곧 개인적인 형편으로부터 자유하라는 의미합니다. 개인적인 형편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모든 경우는 이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가치가 모자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부족한 형편에 마음이 매이면 세상의 가치를 찾고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정욕에 이끌려 가는 상태라 규정하며 거류민과 나그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합니다. 거류민(居留民)이란 임시로 거주하는 외국인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기업에서 일하던 사람이 미국이나 유럽 지사에 파견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일시적으로 외국에서 체류하며 일을 하게 됩니다. 유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람으로서 외국에 나가 머무는 거류민이 된 것입니다. 또한 나그네라 했습니다. 나그네는 지금의 상황을 늘 스쳐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거류민이고 나그네입니다. 이러한 거류민이나 나그네의 특징은 개인적인 형편에 모자람이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을 채우고자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모자람을 채우기 위하여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거류민이나 나그네로 살아야 하는 태도가 아니며 정욕에 이끌리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12절을 보면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거류민과 나그네다워지는 것입니다. 나의 개인적 형편이 어떠한 이유에서 모자란다고 느껴지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거류민이고 나그네라면 지금 처지를 왈가왈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학 시절 독일에서 살던 때의 일입니다. 독일에서는 날을 정해서 쓰지 않는 가구 등을 집 앞에 내놓습니다. 그럴 때 관련 업자들은 중고 가구를 수거해 고쳐서 팝니다. 유학생들도 그런 기회를 이용해서 현지인들이 버린 가구를 구해서 썼습니다. 남이 버린 가구를 쓰면서도 아쉽지 않은 이유는 거류민이었기 때문입니다. 거류민이기에 버린 가구를 쓴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며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할까?’라는 자괴감이 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류민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거나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봅니다. 캐나다에서 목회하던 시절입니다. 한 장로님이 방문하셨습니다. 그분은 기아자동차의 독일지사 사장이셨다가 캐나다로 이민을 오셨습니다. 그러다 저희 집에 오셔서 대뜸 하시는 말이 ‘목사님은 여전히 유학생 수준에 머물러서 살고 계시는군요.’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저를 비난하는 말이 아니고 좋은 뜻으로 하신 말이었습니다만 실제로 그랬습니다. 유학 생활이 끝난 지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유학생들 수준의 가구를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형편에서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할 일은 형편의 모자람을 채우려는 정욕에 이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자유함 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할 수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은 선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방인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어떻게 형편에 아랑곳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오시는 날’이란 하나님이 그 이방인들 중에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역사하시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 역사하시는 날에 우리가 형편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만을 말하고 행동할 때 이방인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됩니다. 깜깜하게 아무것도 안 보이던 상태에서 하나님께 조명이 비칩니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드러나고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13~15절을 보면 인간 사회의 모든 제도와 정치가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종이란 단순히 내가 속해있는 사회 제도나 정치 체제에 따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들을 내버려 두고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내버려 둠이 받아들임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나의 사회적 환경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종이란 수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야고보서를 살펴보며 십자가 온유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 온유함’이란 십자가에서 죽기 바빠서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 관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 신경 쓰느라고 바빠서 내가 살고 있는 사회 제도나 정치가들에 대해 자발적으로 관여할 수 없는 마음이 되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회 제도나 정치가들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며 따지고 관여하며, 사회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하고, 나름의 개선 방안을 생각하고, 정치가를 탓하게 된다면 거류민과 나그네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런 일은 거류민과 나그네의 일일 수 없습니다.
저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비지팅 스칼라로 머물 때 거류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류민의 입장에서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어도 상관할 바가 아니었고, 미국 사회 제도 문제가 불거지고, 정치가들의 이야기가 나와도 관여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거류민과 나그네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의 사회 제도나 정치가의 문제에 대해 관여해서 왈가왈부할 책임도 의무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주어진 사회 제도나 정치가들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도 마음은 그러한 일들과 무관하고 자유함으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할 수 있으면 됩니다.
내가 관여할 바는 사회 제도나 정치가에 대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시는가를 듣고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말하는 선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에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고 자랑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개인적인 형편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와 반대로 자유하지 못하다면 개인의 형편을 나아지게 하고 개선하려는 동안 결국 마음이 세상 가치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곧 정욕에 이끌리는 것이고 거류민과 나그네의 입장에 맞지 않습니다. 사회 제도나 정치가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나그네이자 거류민의 입장에 맞지 않을 뿐더러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형편에 자유하지 못하면 정욕에 이끌리는 것이고, 사회 제도나 정치가에 대해 자유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주권에 거역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13절에서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주를 위한다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은 십자가에서 개인적인 형편과 사회 제도와 정치가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 주님의 바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는 네 가지 특권이 주어집니다. 다시 9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네 가지 정체성의 특권들이 살아나야 절대 자유가 주어집니다. 개인적인 형편에 대해 자유해지고 사화 제도나 정치가들에 대해서도 자유해집니다. 이 절대 자유는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에 따라붙는 네 가지 특권이 내 안에서 활발하게 살아있을 때 주어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 속에서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유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상태입니다.
제가 영락교회를 섬길 때의 일입니다. 바로 뒤에 남산이 있었는데 산책길에서 일본 여성 두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산책을 하던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저를 붙잡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알 수 있었던 한 가지는 ‘이분들이 일본어를 하고 있다.’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영어를 하실 수 있냐고 물었지만 그래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소통이 안 되면 떠날 만도 한데 이분들이 저를 붙잡고 계속 무슨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얼마나 답답했는지 이십 년도 넘은 일인데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자유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소통의 원활함입니다. 나 혼자 마음대로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 안에서 성립하는 자유는 하나님과 나와 소통이 원활한 상태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당신의 주권대로 역사하심에 막힘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 마음대로 하실 수 있을 만큼 하나님과 나 사이의 소통이 원활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소통이 원활한 자유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자아의식에 따라붙는 네 가지 특권이 살아날 때 우리 속에서 역사하게 됩니다.
이 네 가지 특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택하신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갖는 자들을 택하셨는데 무엇을 위해 택하셨다는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이유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이 최고의 좋음일 수밖에 없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타락하였고 저주와 죄 속에서 최고의 좋음이신 하나님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나를 택하신 이유는 바로 최고의 좋음이신 하나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최고로 좋음이신 하나님을 가질 방법이 없습니다. 저주는 하나님이 최고의 좋음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택하신 족속이란 바로 하나님의 좋음을 알아서 그 하나님을 갖도록 허락받은 자들입니다. 택하신 족속의 특징은 좋은 것을 소망하기 위해 하나님만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았기에 하나님을 유일한 소망의 대상으로 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유해집니다. 거류민이 되고 나그네가 됩니다. 개인적인 형편과 사회 제도와 정치가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아무리 사회 제도가 개선되고, 정치가 바뀌어도 내게 유일한 참 좋음이신 하나님을 갖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탓할 겨를이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최고로 좋음인데 제도가 바뀌고 정치가 바뀐들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최고로 좋음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당신 자신을 가지라고 내주셨습니다. 이렇게 택하심을 받은 나는 하나님을 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좋음을 위하여 달려갑니다. 그런데 내 좋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설령 나를 죽인다고 해도 최고로 좋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영향을 끼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몸이 백 개가 있더라도 가질 수 없는 좋음이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되고 있기 때문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 섰을 때 예수님을 전하지 말 것을 요구받습니다. 여기서 19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유대 사회의 최고 의결 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본문 13절의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라는 말씀과 반대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왕 같은 제사장들로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왕은 유일하게 말을 듣지 않고 말을 하는 자입니다. 말을 듣는 것도 왕이 말하라는 명령을 할 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왕은 곧 말하는 자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받은 자들은 하나님만 택하고 하나님만 소망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이유는 결국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가질 수 있기 위한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장님은 부하 직원들이 자기 말을 듣기 원합니다. 부하 직원들은 사장님이 월급을 주고 승진 권한을 갖고 있기에 사장님의 말을 듣습니다. 세상에 모든 서적들의 내용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획득하려면 이렇게 하라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좋음을 알기에 세상에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말을 듣지 않기에 왕입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들이면서 종의 위치에 서지만 이 세상에서는 왕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왕 같은 사람으로 유지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세상으로 끌려가는 나를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이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기에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세상에 끌려다니고 세상의 말에 휘둘리는 나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제사로 드리는 제사장만이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왕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 왕이나 다리오 왕이 우상숭배를 정책으로 결정하고 명령했을 때 왕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날마다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성전은 이미 바벨론에 의해 멸절된 상태였습니다. 다니엘은 성전에서 드리던 번제를 생각했습니다. 날마다 드리던 번제를 생각하며 번제단에 바쳐지던 양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다니엘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사장이 되니 느부갓네살 왕이나 다리오 왕의 말조차도 듣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사자 굴에 던져도 왕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불구덩이에 집어넣어도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통하여 날마다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만이 이 세상에서 왕 같은 존재로서 이 세상의 어떤 말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게 됩니다. 이 세상 말을 듣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 또한 정확하고 뚜렷하게 들리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듣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직도 세상 말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하셔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왕이라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왕은 이 세상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왕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제사를 드릴 때만 왕 같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거룩한 나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택하신 족속입니다. 거룩한 나라는 곧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장소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인생이 바로 세상과 구분되는 거룩한 나라가 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국민의 주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자본의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는 경제 체제를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한편 우리 믿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의 인생을 나라에 비유하자면 거룩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나라입니다. 내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과 원활하게 소통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다스림이 막힘없이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흘러가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개인적인 형편이나 사회 제도나 정치가에 대해서 상관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 속한 사람이기 이전에 거룩한 나라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거룩한 나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서만 움직이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입니다.
네 번째로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슬람교도나 불교도나 힌두교도들의 목숨도 주관하고 계십니다. 문화가 완전히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이 만드신 자들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의 소유’란 말라기에서 언급되었던 하나님께서 아까워하시는 백성입니다.
여러분이 소유한 것 중에 일 년 동안 손대본 적 없이 지나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늘 손에서 떼지 않고 사용하고 아끼며 늘 보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세상의 주인이시지만 특별히 마음에 아까워하시며 좋아하시는 사람들이 바로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택하신 족속과 왕 같은 제사장들과 거룩한 나라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입니다. 한편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란 하나님의 주관적인 마음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좋아하시는 상태를 드러내 보여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좋아해서 품어주시는 자들이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가장 좋음에 안겨있는 상태이기에 이 세상에서의 개인적인 형편이나 사회 제도나 정치가에 대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깝게 여기셔서 당신의 주권과 사랑의 품에 품고 계신 상태에서 내게 자유가 주어집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을 때 내게 주어지는 네 가지 특권이 활발히 움직이게 됩니다. 그럴 때 개인적으로 어떤 형편이 주어지든지 그것에 매이는 정욕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또한 내가 살고 있는 나라나 사회 제도나 정치가나 권력자들을 상관치 않게 됩니다. 이러한 자유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원활한 소통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해나가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일이 바로 선함이고 선행이고 선한 일이라고 합니다.
아무쪼록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로써 허락되는 네 가지 특권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지금 여러분의 개인적인 형편과 사회 제도나 정치가나 권력자들에 대한 모든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또한 오직 하나님과 원활한 소통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만 뚜렷이 깨달으며 말하고 행동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 세상의 거류민과 이 세상의 나그네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를 낳아 준 생물학적 부모님을 찾아 나섭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향인 천국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게 하시며, 아버지께로 마음이 감으로써 세상에 대해 온전한 자유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