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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언행의 열매 아니고 언행이 열매>의 줄거리 :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결과와 열매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얻고 싶은 이득을 위하여 말하고 행동함이 마귀의 자녀들이 가지는 본질적인 특징입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그 자체가 결과이고 열매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는 이득을 추구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 도달한 그 결과와 열매로서 이 땅에서 말하고 행동합니다.
언행의 열매 아니고 언행이 열매
(요한1서 3:1~12)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말과 행동의 열매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말과 행동 그 자체가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6절을 보면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안에’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우리의 말과 행동은 범죄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많은 주석가들이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사도 요한은 앞선 1장 10절에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말씀과 상충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해석이 어렵다고 합니다.
사실 이 내용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세상에 대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길 때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연합하여 내가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부활, 승천,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하나 되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럴 때 사도 요한의 말씀처럼 내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하실 때,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우리의 마음도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6절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는 범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주석가들이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 함을 모르기 때문에 해석의 실수를 합니다. ‘그 안에 거함’을 잘못 생각해서 예수님 안에 있어도 범죄는 간간이 나타날 수 있으며, 습관적으로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캘빈 같은 경우에는 이 구절에 대해 범죄가 없는 이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의 맥락을 살펴보면 오히려 이러한 해석이 나오게 되는 심정이 이해되지 않을 지경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해석이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기에 습관적인 죄는 짓지 않더라도 간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발상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며 범죄하지 않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힘든 이상적인 상태라고 여기는 것 또한 말이 되지 않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 안에 거하면 범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5절을 보면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죄 없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기에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죄는 나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습관적인 죄는 짓지 않더라도 간간이 죄를 질 수 있다든지, 죄가 없는 상태가 이상적인 상태라든지 하는 생각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죄와 저주에 찌든 장아찌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함이 분명하다면 우리 같은 죄의 장아찌들에게서도 범죄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함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상태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간간이 죄가 나타난다면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데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바깥으로 튕겨져 나왔기에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계속 머물지 못하고 간간이 예수님 바깥으로 튕겨져 나오는 것 자체가 죄와 저주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죄와 저주가 극복된 상태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인격 자체에 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 마음이 정말로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다면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한편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구분합니다. 9~10절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앞의 구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면, 9~10절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의 씨’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우리 마음이 들어가 있느냐 아니냐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가르는 기준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까지 죄인으로 살았음을 고백하고 세례받아 종교 조직의 회원이 됨을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이라 오해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제 생활 현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하고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며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이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예배당 조직원이 되고 세례받아 증서를 받았다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착각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는데도 간간이 범죄가 나타날 수 있다고 이해합니다. 사도 요한, 사도 바울, 사도 베드로, 야고보 장로,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들에게서는 범죄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서는 범죄가 나타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하나님의 씨’를 언급합니다. 이러한 표현을 염두에 둔다면 사도 요한이 말하는 범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범죄란 곧 하나님의 씨가 들어있지 않은 모든 말과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씨’란 우리가 십자가를 기억함으로써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라면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게 됩니다. 그 사귐이 진행되는 것이 하나님의 씨가 심긴 상태입니다. 그 씨가 이 땅에서 말과 행동이라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반면 예수님 안에서 빠져나온 상태에서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마귀의 자녀들로서 말과 행동을 하게 되고 이것이 곧 범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마귀의 자녀들이 하는 말과 행동과는 핵심적 차이가 있습니다. 마귀의 자녀들로서 말과 행동을 할 때는 열매나 결과를 기대합니다. 또 잘못 말하고 잘못 행동을 할 때는 열매와 결과를 두려워합니다. 기대나 두려움은 모두 무엇인가를 얻고 싶어 함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자녀들의 말과 행동이 범죄가 되는 이유입니다. 말과 행동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이득을 얻겠다고 목적을 갖습니다. 마귀의 자녀들의 말과 행동은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수단입니다. 말을 잘하고 행동을 잘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갖고 싶은 이런저런 것들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자녀에게 여러 가지 요청을 합니다. ‘열심히 공부해라, 그래야만 이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라고 말했다고 해보겠습니다. 돈을 결과로 생각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하는 모든 충고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한 것이 됩니다. 열심히 공부함이라는 행동에 따르는 돈이라는 열매와 결과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자녀들이 하게 되는 범죄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말하고 행동하면 당연히 열매와 결과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좋게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좋은 열매를 기대하는 것이 범죄이고, 마귀의 자녀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라니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운동을 한다면 건강하기 위해서 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운동하면서 건강을 기대하는 것이 마귀의 자녀들이 하는 일이라니 이상합니다. 승진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귀의 자녀들이 하는 일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온 가족이 오랜만에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모두가 기분 전환하고 산뜻한 마음과 힘을 얻어서 새롭게 출발을 해보고자 합니다. 혹은 친구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또한 마귀의 자녀들이 하는 범죄라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에서 열매나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면 어떻게 살라는 것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씨’를 언급합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사귀는 중에 하는 말과 행동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이 결정하신 뜻의 ‘하나님의 씨’가 심겨서 나오는 열매가 됩니다. 말과 행동의 열매를 기대하는 것이 아닌 말과 행동 자체가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서 나타나는 말과 행동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내가 이렇게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세상에서 어떤 이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고 행동함이 하나님의 뜻의 결과이자 성공임을 압니다. 이러한 마음이라야 범죄가 아닙니다. 말과 행동은 내가 세상에서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일 수 없습니다. 말과 행동이 수단이 된다면 무조건 마귀의 자녀들로서 범죄하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실제 삶에서 내 말과 행동에 목적이 담기지 않고, 결과와 열매를 기대하지 않으며, 그 말과 행동 자체가 열매가 되어야 함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전환이 어떻게 가능할까 의문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는 설교의 열매와 결과로써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기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이것은 마귀의 자녀들의 마음가짐이고 이로부터 나오는 설교가 범죄에 불과하다는 뜻이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설교 자체는 수단이 아닌 열매여야 합니다. 설교를 했기 때문에 앞으로 열매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설교 자체가 열매이고 결과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과 행동이 무엇의 열매이자 결과냐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거함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내 인격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씨들이 심기게 됩니다. 이로부터 혀끝에서, 손끝에서, 발끝에서, 말과 행동이라는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말과 행동은 열매이기에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관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를 보면 열매로서의 말과 행동을 하다 돌에 맞아 죽기까지 하였지만 그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열매로서의 말과 행동을 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적대시하고, 탄압을 당한 경우는 수없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씨를 혀끝에서, 손끝에서, 발끝에서 말과 행동이라는 열매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일이 무척 어색하고, 죄와 타락에 찌든 마귀의 자녀들이 사는 방식에 익숙합니다. 내가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씨를 받았다면 이처럼 말과 행동을 수단으로 여기는 모습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대한 이해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명기 6장 5절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율법을 이해하는 기준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룰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선민이라면 율법을 열매로 받아들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을 사랑했더니 율법대로 살게 되는구나! 정말 기쁜 일이다! 내 말과 행동이 율법과 일치하는 열매로 나타나고 있다.’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을 비롯한 율법주의자들은 이를 반대로 만들었습니다. 내가 율법을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이제부터 세상에서 돈, 건강, 형통 등의 복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아니더라도 마귀의 자녀들은 행동주의로 살아가게 됩니다. 말과 행동을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이득이라는 열매와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해서 ‘하나님의 씨’를 받은 자가 되는 과정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마음가짐이 자아의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승천하여 보좌 우편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서 머무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십자가를 의식함은 바탕에 깔려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마음은 하늘에 머물지 못하고 세상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상태에서 십자가는 세상을 빠져나가는 출구의 역할을 합니다. 한편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에서도 십자가를 바라봄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에서 보는 십자가는 내 마음이 세상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방벽의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의식하는 동안 마음은 하늘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이 하늘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나의 의식은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가득 찹니다. 사장님이나 대통령을 마주더라도 마음에는 하나님만을 의식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좋음을 소망하게 됩니다. 바로 옆에 있는 김 과장은 돈과 승진을 소망하지만 나는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상태가 유지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귐이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은 하늘에서 이미 얻을 것을 다 얻고 있는 상태입니다. 반면 마귀의 자녀들은 마음이 땅에 있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는 최고의 좋음을 아직 얻지 못했기에 얻고자 합니다. 얻어야 하는 상황이기에 말과 행동은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갖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사도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요한은 제자로서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까지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진정으로 연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따르는 실제 연합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앉으심을 따를 때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대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다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됩니다. 이로부터 이 땅에서 하는 말과 행동은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내가 이 사람을 잘 설득해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야겠다.’라고 생각한다면 마귀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사람을 만날 때는 이러한 목적을 갖지 않습니다. 내 마음은 사람을 만나는 중에도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말과 행동은 하나님과의 사귐의 열매이자 결과로 나타납니다. 이미 말과 행동이 열매이자 결과이기에 세상에서의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마귀의 자녀들의 특징은 말과 행동이 범죄가 됩니다. 이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함에 기인합니다. 마음의 허함을 채우려 하는 욕구로부터 말과 행동이 나옵니다. 이러한 말과 행동은 마음을 하나님 외의 다른 대상으로 채우기에 범죄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귐이 없이 마음이 이 땅에 있다면 채움을 위하여 말하고 행동하게 되고 열매와 결과를 기대하게 됩니다.
설교하는 자들 또한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는 더 이상 마음을 채울 일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설교자의 말과 행동은 범죄가 아닙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과 사귀는 중에 나타나는 설교여야 열매이자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설교자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다면 설교 또한 수단이 됩니다. 내가 하는 설교의 반응과 결과를 통해 만족을 얻고자 하게 됩니다. 마귀의 자녀로서 설교를 하는 것이고, 설교 자체가 범죄가 됩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 말씀을 통해 바로 이러한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는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대할 때에도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말과 행동은 뱉어버리는 것입니다.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인가 이득을 얻겠다는 생각이 없이 말하고 행동한다면 복음이 주는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함이 분명하다면 잘못된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내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유지되고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은 예배당에 출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인으로 입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으면 예수님 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님 바깥으로 튕겨져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 죄를 범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범했다면 예수님 바깥으로 튕겨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아의식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나의 바탕이 되어서 유지되느냐를 통해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분명하고 굳건하다면 반드시 내 마음은 하나님과 사귐을 이루게 됩니다. 어떤 사람 앞에서도 하나님의 존재감을 충만하게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소망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는 입을 열 때마다, 손과 발을 움직일 때마다 말과 행동이라는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말과 행동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남을 사랑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범죄하지 않으려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럴 때 범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결혼했으면 남편과 아내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자녀를 낳으면 아빠와 엄마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직장에 다니면 직원이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한다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할 것 없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지 못할 이유가 없고 유지하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내가 남편이나 아내라는 사건보다, 내가 자녀들의 부모라는 사건보다, 내가 회사의 직원이라는 사건보다, 내가 남자나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건보다 별 볼 일 없는 사건으로 취급된다는 증거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나 때문에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절대로 형편없이 취급될 사건이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만 유지하면 나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는 범죄함이 없습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사귀는 중에 하나님 뜻의 씨가 내려와 내 인격에 심기게 됩니다. 이로부터 모든 말과 행동은 입이라는 가지에서, 손이라는 가지에서, 발이라는 가지에서 맺히는 열매가 됩니다. 그 열매의 내용은 범죄함이 전혀 없는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말과 행동 속에 아직도 이 세상에서 내가 얻게 될 이익을 위한 의도가 있고, 여러분의 말과 행동이 아직도 이 세상에서 도달하고 싶은 목적지를 위한 수단이라면 마귀의 자녀인 상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열심히 행할 것을 요청합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을 지킬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하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라는 모든 이야기는 마귀의 말을 말씀으로 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의 사귐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말과 행동은 열매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귀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음이 분명하다면 이로부터 나오는 말과 행동은 그 자체로 성공입니다. 내가 마주하는 사람이 나의 말과 행동에 어떤 반응을 보이냐는 것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열매와 결과에 얽매이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끝까지 유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여러분의 말과 행동 속에서 복음이 허락하는 자유를 만끽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36절에서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복해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말과 행동을 하는 중에 느껴야 하는 진리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도 말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이 자유를 절절이 체감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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