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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노는 물이 세상과 똑같은 버가모 교회>의 줄거리 :
버가모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하실 정도로 우상 숭배와 황제 숭배가 뿌리 깊고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런 혹독한 환경에서 박해받아 죽는 사람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이럴 정도로 굳건한 믿음의 교회가 회개 없이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한 예수님이 직접 맞서 싸우시겠다고 하실 정도로 이상한 집단이라고 하십니다. 버가모 교회의 내막을 들여다봅니다.
노는 물이 세상과 똑같은 버가모 교회
(요한계시록 2:12~17)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외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노는 물이 다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삶의 주된 환경이 다르다, 격이 다른 환경에서 산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교회에 속한 교인이라면 노는 물이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 전과는 노는 물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주된 환경의 격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달라졌음을 스스로 확인할 수 없다면 교인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1~2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 가’는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양들이 부족함을 느낄 수 없는 환경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어 목자로 따를 때 노는 물이 달라집니다. 우리 마음에서 도무지 부족함을 느낄 수 없는 삶의 환경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삶의 환경’이란 물리적 환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따르는 양이라면 우리 마음이 놓이는 영적 환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교인들의 모토는 ‘오늘도 천국 가서 놀자’라는 마음 상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따라가서 노는 물은 천국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천국에 가서 놀아야 합니다. 한편 이와 관련해서 버가모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버가모는 에베소나 서머나보다 앞서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이 건립된 곳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버가모는 제우스나 아테네 혹은 디오니소스 등의 신을 섬기는 수많은 신전이 있는 우상숭배의 본거지와 같이 여겨지던 도시였습니다. 물론 당시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도시는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버가모는 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고, 사탄이 사는 곳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우상숭배가 뿌리 깊게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버가모에 있던 버가모 교회에 예수님의 칭찬이 주어집니다. 버가모 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 사탄이 사는 곳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죄악의 본산지인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버가모 교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그중에는 특별히 칭찬할 만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당시 버가모 교회에는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증인’이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증거하고 스스로도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연합하여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버가모 교인들은 ‘안디바처럼 잘 믿어도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면 예수는 믿어서 뭐하냐?’라는 의문을 가질 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버가모 교인들이 어떻게 예수님 이름을 굳게 붙잡고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다는 것일까요? 말씀드렸듯이 버가모는 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좌가 있고, 사탄이 사는 곳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우상숭배의 뿌리가 깊고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우상숭배는 상식이고 절대 대세의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으로 분류되기를 거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력서의 종교란에 기독교를 적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요즘같이 종교의 자유가 있는 세상에서 기독교인임을 밝히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2,000년 전에 황제 숭배는 탄압의 기준과 이유였고 우상숭배는 사회적 대세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는 예수님만을 유일한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신분을 밝히고 고수해 나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버가모 교인들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죽는 것을 보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사회적으로 숨기거나 포기하지 않고 고수하며 선언하고 살았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 분위기를 거스르며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고, 순교까지도 각오할 정도의 용기와 굳건한 믿음을 가졌음에도 교회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버가모는 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좌가 있고, 사탄이 사는 곳’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우상숭배가 대세인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고백하고 유지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버가모 교회에도 예수님의 책망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는 가운데서도 교회는 썩어서 교회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이제부터 그 내막을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14~15절을 보면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발람은 민수기 22~25장에 걸쳐 등장하는 인물로서 싯딤이라는 곳에서 일어난 바알브올 사건의 주인공인 거짓 선지자입니다. 모압 왕 발락은 발람에게 돈을 주고 이스라엘이 망하도록 저주하게 합니다. 그러나 발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을 직접적으로 저주하기를 거부하지만 한 가지 꾀를 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으로 군사적으로 이길 수 없고, 저주나 주문으로도 망하게 할 수도 없다면, 선민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이었으나 여전히 죄악과 저주에 찌든 인간의 속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육체를 입고 있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발람은 선민에게 잠들어 있는 죄악과 저주라는 속성을 자극하여 활성화시킵니다. 발람은 아름다운 모압 여인들을 내세워서 미인계를 썼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남자들은 모압 여인들에게 넘어가 행음하였고, 모압 여인들은 이스라엘 남자들을 모압의 신 바알 숭배에 참여하도록 유인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남자들은 바알 숭배에 참여하여 행음하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으며 환락에 빠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 염병으로 이만 사천 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발람의 교훈을 니골라당의 교훈으로 바꾸어 말씀하십니다. 버가모 교회가 그들의 행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니골라’는 백성을 뜻하는 ‘니코’와 이기다의 ‘라오스’의 합성어로써 ‘백성을 이긴다.’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발람이라는 이름도 ‘백성을 삼킨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결국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이 같은 것으로 버가모 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도 행음이었습니다. 본문에서 행음이란 종교적 의식에서 신전 여사제들과의 행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계시록의 내용은 단순히 일곱 교회가 아닌 시대를 막론하고 이 지구 위에 있는 모든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요즘은 종교의식 중에 신전 여사제와 공공연하게 행음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이 말씀이 시대를 초월하여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영적인 행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채움을 추구하고, 채워지면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다시 말해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도록 만드셨기에 이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또한 요한복음 15장 11절에서 영원 전부터 누리시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이 만족과 기쁨을 얻느냐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노는 물이 다르게 됩니다.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는 삶의 환경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민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었습니다. 따라서 선민은 노는 물이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가운데 하나님만으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골프를 치며 만족과 기쁨을 얻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더는 골프를 치는 것에서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뒤로는 하나님 이외의 대상으로부터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는 것이 바로 영적인 행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골프를 치는 것이라면 골프를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골프를 쳐야만 만족과 기쁨이 생기기 때문에 치는 것이라면 행음하는 것입니다.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선민도 육체를 입은 사람으로서 속에 죄악과 저주에 찌든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만족과 기쁨을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찾으려는 세상 친화적 속성입니다. 발람은 이것을 이용하고자 꾀를 냈습니다. 죄악과 저주에 찌든 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세상 친화적 속성을 자극합니다. 이스라엘 선민 속에 존재하는 세상 친화적 속성에 삼켜지게 함으로써 행음을 하였던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에서도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우상숭배가 만연한 분위기 속에서도 순교를 각오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지켜냈습니다. 그렇게 굳건하게 울타리를 치고 믿음을 지켰는데 정작 울타리 바깥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 친화적인 속성을 극대화하고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세상 친화적 속성을 정당화하는 교훈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버가모 교인들은 예수님만이 그리스도라는 이론적 믿음을 위해 순교까지 각오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각오로 교회라는 울타리를 쳤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는 울타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울타리 안에서 세상 친화적인 죄악과 저주에 찌든 속성을 극대화하고 활성화시키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 것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리려는 영적 행음이 가득 차게 됩니다. 이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주와 죄악에 찌든 세상이라는 판이 있습니다. 그 판 위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교회라고 말합니다. 동그라미 안에 머무는 자들은 그 선을 목숨 걸고 지킵니다. 그런데 정작 동그라미의 내부는 세상과 똑같습니다. 노는 물이 같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런데 노는 물이 어떤 상태인가를 보면 세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밖에서 보기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임을 강하게 주장하고 순교도 불사합니다. 그런데 실제 내부적으로는 세상 친화적 속성을 극대화하며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일에서 만족과 기쁨을 추구한다면 세상과 노는 물이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16절에서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12절에서도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기를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에 불순물과 거짓이 섞여 들어온 상태를 날 선 검으로 찔러 쪼개서 제거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세상 친화적인 속성으로 신앙과 얽혀버린 상태라면 검이 필요합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을 찔러 쪼개고 들어가서 불순물과 거짓으로 뭉뚱그려진 상태를 깨닫게 하고 그것들을 제거한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검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신 뒤에 ‘가서 싸우리라’고 하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말씀의 검을 가지고 거짓을 분별하여 죽이시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친다면 말씀의 날 선 검은 거짓을 제거하는 검이 아니라 거짓된 사람을 죽이는 검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의 소소한 만족과 기쁨을 위하여 끊임없이 세상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각 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한 말씀들을 대하다 보면 이러한 문제들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에베소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고, 버가모 교회의 문제는 버가모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의 문제가 버가모 교회에도 있고, 버가모 교회의 문제가 에베소 교회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요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기독교 종교의 행태에도 적용됩니다. 에베소 교회의 문제도 있고 버가모 교회의 문제도 동시에 들어있습니다.
지금 개신교 교회는 세상적인 가치 획득의 또 다른 경쟁 장소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적인 가치를 갖지 못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못 받은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을 가려내는 이론과 교리의 체계를 확실히 세운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의 날 선 검을 활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짓을 가려내고 세상과 구분되는 조직을 만들자 어느덧 조직 자체를 위하여 마음을 쓰게 되었습니다. 한편 버가모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교회라는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서 거짓을 받아들여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물에서 놀게 되었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는 목숨 걸고 지켰으나 세상 친화성은 울타리 밖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과 신분에 목숨을 걸었고, 교인임을 지키려는 단호함을 가지고 세상 친화성에 물들어버렸습니다.
이어서 17절을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만족과 기쁨을 세상에서 추구합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거나 가질 때 만족과 기쁨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세상 것은 아무것도 없어도 만족과 기쁨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감추었던 만나’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나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만족과 기쁨을 모르겠다. 감추었던 만나를 먹어서 배부름을 느껴본 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서머나 교회와 관련해 묘사된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8절을 보면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 만족과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 말씀이 적용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아버지께로 가지 못해서 노는 물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노는 물이 바뀌지 않았다면 감추었던 만나의 맛을 볼 수도 없습니다. 노는 물 바꾸기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다’라는 의식을 굳건히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의식을 가진 자들은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기에 세상 친화적인 속성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형통한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무서운 말입니다. 그런데 강단에서는 이렇게 무서운 말을 겁도 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강단에서 쏟아내고 교인들은 이것을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배당과 교회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면서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그리스도인 됨을 굳건히 붙잡으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모습이 버가모 교회의 상태와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김’이란 결국 내 속에 있는 세상 친화성에 대한 이김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세상에서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앞서 골프를 언급했습니다만 그 대상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이걸 좀 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들 때 그것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행음입니다. 세상 친화적 속성이 살아난 상태이고, 버가모 교회의 잘못을 답습하는 상태입니다. 무엇이든 하고 싶거나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얼른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하고 싶고 가지고 싶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으로 채워짐으로써 이 세상을 향한 소원을 없애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우리의 모토는 ‘오늘 골프 치러 가자.’ 혹은 ‘오늘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천국으로 놀러 가자.’라는 말이 모토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으로 가서 감춰진 만나를 먹고 난 후에도 하나님께서 골프를 치게 하시고 맛있는 것을 먹게 하신다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거나 먹으며 기쁨을 누리는 것과, 먼저 하나님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린 후에 시장에 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크든 작든 세상의 소원이 생기면 십자가에서 죽고 그 분량만큼 하나님으로 채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세상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만족하고 기쁠 수 있는 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버가모 교회의 잘못을 답습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숨까지 버리는 순교자의 자세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굳건히 지켜나가면서도 세상 친화적인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혀 교인도 아니고 전혀 교회도 아닌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서 17절 하반절을 보면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외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소소하게 일어나는 세상 친화적 바람을 죽일 때 행음은 멈춰집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만을 상대할 때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서 누리려는 만족과 기쁨을 끊임없이 제거해 가는 삶을 살다 보면 ‘내가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되었구나!’라고 스스로 깜짝 놀랄만한 모습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새 이름’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나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가지는 태도가 변함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것을 바라는 대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로부터 더욱더 예수님을 따라 아버지께로만 가게 됩니다. 오늘도 노는 물을 완전히 바꿔서 천국에서만 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나로서도 알 수 없었던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됩니다.
내 속에 있는 만족과 기쁨과 관련하여 세상 친화적 속성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오직 천국에 올라가서 천국만이 우리의 노는 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의 날 선 검이 아니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미묘하게 악과 오류와 잘못은 우리들 안으로 파고 들어옵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세상에 대한 죽음을 철저히 다짐함으로써 이러한 모든 오류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며 오직 천국만이 지금 이 시간 내가 노는 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