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문화캡슐 동족마을을 찾아서 <41>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영천이씨 (하)
2005년 05월 23일 00시 00분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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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군 대치리 원촌마을 서부에 있는 척서정 | | 광주.전남 문화캡슐 동족마을을 찾아서 <41>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영천이씨 (하)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에 모여살고 있는 영천이씨 영양군파 입향조는 11세 이희증이다.
입향의 정확한 시기는 가문의 수난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연산군 2년일 것으로 후손들은 추정하고 있다.
대치리의 직접 선조인 영양군파 6세 남곡공 이석지는 려말선초 사람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와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당시 고려왕조를 대신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석지는 귀국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해 있는데 울분했다.
이태조가 벼슬을 높여 줄테니 조선왕조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단호하게 ‘노’하고 개성 두문동 72현이 됐다. 석지의 고려조 직책은 보문각 대제학이었다.
‘불사이군’이라며 두문동에 들어간 석지는 이태조가 개성 송학산에 불을 지를 것을 예견하고 남쪽으로 도피, 용인의 남곡(용인군 포곡면 금어리)에 터전을 잡고 은둔한다.
용인에 정착한 이유는 먹을 것이 풍부하고 거리상으로 조선왕조의 눈에 거스르지 않는 최적의 자리였기 때문으로 후손들은 추정하고 있다.
6세 석지 개성서 용인에 정착
‘함흥차사’란 고사성어와 관련, 영천이씨와의 재미있는 문중의 일화도 있다.
석지의 동생 자용(子庸) 역시 이태조와 절친한 사이였다. 이태조는 고려왕조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자용과 친분관계를 생각해 숙청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함흥에 눌러앉아 나오지 말라면서 영천고을을 주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겼단다. 지금도 함흥에 ‘영천’이란 지명이 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단다.
다시 용인에서 석지는 손자대까지 3대가 함께 정착한다. 그리고 석지의 손자인 8세 종검대에 영천이씨는 또다시 중흥기를 맞는다.
효우당 이종검은 석지의 다섯아들 중 둘째아들인 안직의 첫째로 아우는 종겸(이조판서)이다.
종검은 세종 8년에 생원벼슬하고 3년후인 세종11년에 종제(從弟) 이보흠(李甫欽)과 동반급제한다. 두 사람의 동반 장원급제는 영천이씨 가문의 찬란한 영광으로 남아있다.
종검은 벼슬이 한림직제학 좌·우사간, 대사간을 지내고 중추부에 올랐다. 영계출학의 이적이 있어 조정에서는 효(孝)와 우(友)가 극한 표징이라 해 문종이 ‘효우당’이라 호를 내렸다.
특히 동생 종겸과의 우의가 깊어 벼슬을 버렸을 때 남곡앞 두 계곡(쌍계)이 합류한 곳에 효우당을 짓고 자제들을 모아 시예를 강론하기도 했다.
용인군 남곡에서는 석지 이후 6대까지 친척들이 함께 살았다. 이때 영천이씨 대소가의 우애가 지극하고 형제애가 매우 깊었다.
효우당은 아들 중호(仲浩)와 자손에게 시로써 훈계했는데 ‘어버이 섬기기를 근간으로 하고, 학문에 힘쓰며, 언행을 삼가고, 주색을 경계하며, 이익이 생기면 그것이 의에 합당한가를 생각하라’는 내용이었다.
단종복위운동 연루 집안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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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군 대치리 마을입구에 세워진 영천이씨 세거지 표지석 | |
그러나 번성기를 맞았던 영천이씨 가문은 세조가 왕위를 빼앗은 이후 수난을 겪는다.
종검과 동반 급제한 보흠이 세조의 형인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하다 발각돼 함께 죽임을 당한다. 이때문에 전주이씨 금성대군파와는 지금도 결혼을 하지 않을 만큼 두 가문의 우의가 두텁다.
특히 외종(外從) 유성원이 사육신으로 화를 당한뒤 종검·종겸 형제를 비롯한 영천이씨들은 삼대지멸이란 연대 책임때문에 집안이 공포의 도가니에 휩싸인다.
이때 종검도 상왕 단종을 복위한 나머지 집뒤 상암에 제단을 모으고 정화수를 떠놓고 조석으로 하늘의 도우심을 3년 동안 빌었다. 기록에는 이맹전과 김시습 등 제현과 도의지교를 맺고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겨 절의를 온전히 하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고 한다.
다행히 종검·종겸 형제는 일체의 벼슬을 버리고 용인 남곡으로 퇴거한뒤 일가가 어울려 살며 화를 면했으나 연산군이 즉위한 뒤 또다시 단종복위운동의 여화를 입는다.
연산군때 용인서 뿔뿔이 흩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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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군 대치리 원촌마을에 위치한 대치사 유허비각 | |
이로 인해 6세 석지 이후 용인에 세거하던 영천이씨는 8세 종검의 증손자대에 이르러 연산군이 즉위, 단종복위문제가 또다시 거론되면서 일가가 누란지위의 위기에 처해 용인에서 뿔뿔이 흩어진다. 이때 종검의 증손자인 희증도 화를 피해 무주로 피신한 형 효증에게서 3년을 숨어살다 담양 대치로 낙남하게 된다.
그가 바로 대치의 입향조 영천이씨 영양군파 11세손인 습독공 이희증이다.
희증이 대치까지 낙남하게 된 이유는 이렇다. 당시 광산김씨들이 대치 북쪽 평장동에 마을을 열어 살고 있었다. 사헌부 감찰로 있던 광산김씨 김현뢰란 분이 평장동 출신이다. 감찰공 현뢰는 입향조인 희증의 처외할아버지가 되고 효증과는 사돈댁의 인연으로 대치에 터를 잡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희증은 벼슬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강예원 습독벼슬을 했다.
이같이 수난을 겪은 뒤 대치에 자리잡은 영천이씨는 이희증의 아들 처사공(處士公) 인조(仁祚) 이후 진사 등 수 많은 문무관 인물들을 배출한다.
특히 15세손 이정신·이정태는 정·병호란때 창의의병 공주까지 진격했는데 와중에 화의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벼슬을 물리친뒤 대치로 돌아와 시부로 세월을 보낸 인물들이다. 대치리 원촌마을 ‘대치사 유허비각’에 남아 있다.
근현대사 인물들 수없이 배출
이같이 후손들이 번성했던 이유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가문을 돌본 처사공 이인조의 묘가 대전면 서옥리 불대산 아래 동풍양유(東風楊柳)의 명당에 모셔졌기 때문으로 후손들은 굳게 믿고 있다.
현재 기갑학교가 들어서면서 다른 묘는 모두 이장했으나 인조의 묘만은 명당으로 그대로 남아있다.
대치리가 배출한 현대 인물로는 이돈주 전남대 명예교수, 목포대 이기갑 교수, 화천기공 이기주 사장, 서예가 학정 이돈흥 선생, 이상노 전 여수시장 등이 있다.
또 이관진 광주지법판사 등 4명의 고시합격생을 배출하는 등 각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대치에 살고 있는 영천이씨는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을 아끼지 않고 단종복위운동과 관련해 수난을 당하면서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는 호남지역 명문가문 중의 하나였다.
/특별취재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