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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불난 떨기나무는 내 이력서의 마침표>의 줄거리 :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 나무와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는 한 세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그 결과 이제 이 땅에 남은 생각, 감정, 의지, 육체의 연합체는 한 그루의 떨기나무가 됩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떨기나무에는 반드시 불이 붙습니다. 그러나 타서 재가 되지 않습니다. 이 기이한 떨기나무 현상이 약속의 명단에 있는 모든 교인에게서 생활화되어야 할 내 인생 이력서의 마침표입니다.
불난 떨기나무는 내 이력서의 마침표
(출애굽기 3:1~10)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성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선민이자 하나님의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본문을 중심으로 ‘불난 떨기나무는 내 이력서의 마침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내 이력서는 죽어야 끝이 납니다. 그런데 내 몸이 죽기 전에 기록될 인생의 발자취는 불난 떨기나무로서 마침표를 찍어야 합니다.
장인의 양을 치던 모세는 불붙은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는 큰 광경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떨기나무란 미디안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카시아 과의 가시덤불로써 키가 작고 볼품이 없어 목재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이라는 어마어마한 역사를 모세에게 위임하시고자 흔해 빠진 가시덤불에 불과한 떨기나무를 사용하십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사라지지 않는 이상한 광경을 만드시고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며 사명을 위임하십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되리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불붙은 떨기나무는 이 약속의 명단에 포함된 교인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의 현장에서 살 때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는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약속의 명단에 있는 교인이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붙은 떨기나무는 모세를 위시하여 약속의 명단에 포함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떨기나무에 붙은 불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입니다. 땅에서 일어난 불은 이 세상에 있는 재료를 태워서 불꽃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불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 기운이 이 땅에 내려와 불이 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이 세상의 재료를 태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인 각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줍니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은 자기의 의욕과 자기의 노력과 자기의 수고를 소진하면서 살아가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힘과 열정과 에너지로 살아가기 때문에 비록 떨기나무 같을지라도 상관없습니다. 떨기나무는 목재로는 어떤 곳에도 쓸모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떨기나무 같을지라도 하나님의 불이 붙는다면 소진되거나 탈진되지 않습니다. 하늘의 기운과 열정과 의욕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필두로 약속의 명단에 있는 모든 교인은 반드시 떨기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아카시아 과에 속하는 가시덤불에 불과한 떨기나무는 볼품없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떨기나무로 상징되는 인격 상태가 되어야만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고, 재가 되지 않는 불붙은 떨기나무의 형상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떨기나무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떨기나무는 목재로는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떨기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를 예로 들어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애굽의 왕자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살았습니다. 학문과 지식이 뛰어났고 모든 일에 탁월한 역량을 보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해석에 의하면 이러한 모세는 자신이 200만이 넘는 동족 이스라엘을 초강대국 애굽의 노예 신분에서 해방할 수 있는 자라는 자아의식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모세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애굽인 감독관은 자신을 치는 사람이 왕자임을 알고 방어조차 할 수 없이 속수무책으로 맞아 죽어야만 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무방비 무저항의 사람을 깔고 앉아 주먹으로 내리쳐서 죽였던 것입니다. 사방으로 피가 튀는 끔찍한 현장이었을 것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세는 이 살인의 현장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몰랐습니다.
모세는 모든 히브리 사람들이 자기를 칭송하리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음날 현장에 나온 모세는 충격을 받습니다.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고 있어서 말리는데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라고 떠들어 댑니다. 이 소식은 결국 바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모세는 애굽에서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이로부터 모세는 40년간 아무런 자극도 없고 도전도 없는 양치기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세는 살인의 트라우마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왕자로서 한없이 부풀어 올랐던 자아의식은 양치기 생활 동안 위축되고 또 위축되어 갔습니다. 이제 80세가 된 모세는 세상에서 거부당한 자로서의 자아의식을 갖게 되었고, 세상을 향해서는 주체적으로 나서서 의욕을 품거나 소원을 따라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세의 상태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떨기나무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상태가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이 땅에 대해 갖고 계신 의욕과 포부를 위하여 열정과 힘을 모세를 통해 발산하실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떨기나무 같은 모세는 세상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생각하고 판단하며 무엇인가를 소원하고 추구할 수 있는 주체성이 위축되고 또 위축되어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 떨기나무의 상태가 되어야 온전히 하나님의 열정과 힘으로만 살아지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정리해 봅니다. 애굽의 왕자였던 모세는 살인의 트라우마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는 사람이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더 이상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떨기나무와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40년 동안 처가 식구들 외에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던 모세의 이름을 ‘모세야! 모세야!’ 부르시며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만나주십니다. 일찍이 바구니에 담겨서 나일강에 던져졌던 모세는 강물의 흐름에 따라 흘러갈 뿐이었습니다. 석 달짜리 아기는 물살에 저항하는 어떤 행동도 보일 수 없었습니다. 이제 80살이 된 모세의 주체성은 살인자 추억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위축되고 또 위축되다 못해 거의 소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어떤 사람도 행할 수 없는 200만 동족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대역사를 위임하십니다.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와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 나무는 한 세트입니다. 세트는 구성하는 요소가 하나라도 빠지면 온전함이 사라집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구성 요소가 갖추어져야만 세트는 온전할 수 있습니다. 불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와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 나무는 한 세트입니다. 이는 곧 십자가 생활화는 떨기나무 생활화와 한 세트를 이뤄야만 온전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떨기나무 생활화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가 세상을 향하여 자기 주체성을 발동할 수 없게 하는 효과를 나타냅니다. 모세가 겪었던 상황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십자가 효과가 나타나면 반드시 뒤따라오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떨기나무 현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떨기나무 현상인가에 대해 대답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었습니다. 모세가 살인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했듯이 나는 죄악과 저주에 찌든 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좋아하는 법을 모르며, 육체로 만나는 세상 것들만 맛있게 여기고 좋아합니다. 이 세상을 향해 주체성을 발동하는 존재이고, 마음이 육체를 입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은 날마다 생활화되어야만 합니다. 내 마음이 육체와 붙어서 세상을 향할 때마다 십자가를 기억하여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이제 내 마음은 십자가에서 육체를 벗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을 향해서만 내 주체성을 총체적으로 쏟아부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이 땅에는 생각하고 감정이 움직이고 의지가 발동하는 기능과 함께 육체가 남아있습니다. 지정의(知情意)는 육체와 연합되어 있어서 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있음을 느끼고 채움을 원하는 기본적 욕구는 우리의 마음인 비어있는 영으로부터 나옵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가면 내 영의 욕구는 하나님만을 향하게 되는데, 그동안 땅에서는 지정의 육의 결합체만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떨기나무는 마음과 주체성이 빠져나간 지정의 육의 연합체를 가리킵니다.
사람의 마음은 좋음으로 채워야만 하는 욕구가 발동하고, 있음을 존재감으로 느껴야만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하늘로 간다면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향하여 움직이지 못합니다. 땅에는 지정의 육의 연합체만 남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쓸모없는 떨기나무가 됩니다. 그런데 이 떨기나무 상태에서만 하나님과의 연결은 이루어질 수 있고, 하나님의 열정과 힘과 의욕과 포부가 내려와서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출애굽의 역사는 살인자의 추억과 트라우마에 갇혀서 주체성이 위축되고 또 위축되어 사라질 지경이 되어버린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정열과 힘과 의욕과 포부를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모세 자체로만 보면 이 세상 어떤 일에 대해서도 주체성을 보일 수 없는 쓸모없는 떨기나무와 같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도 일어나야 하는 십자가 효과입니다. 이 십자가 효과가 일어날 때 내 마음은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고, 내 주체성은 온전히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가지려는 소원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지정의 육의 연합체는 떨기나무가 되어서 하늘의 불이 붙습니다. 하늘의 불이 붙었기에 재가 되지 않고, 소진되지 않고, 탈진되지 않으면서 삶은 진행되어 갑니다. 이러한 원리에 의해 모세를 통해 출애굽의 역사가 이루어져 가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특이한 묘사가 있습니다.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로 다가오는 모세를 향하여 5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다가오는 모세를 멈춰 세우시며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것은 거룩함의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다. 떨기나무가 되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떨기나무로 산다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내 주체성과 내 마음과 내 뜻과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정과 하나님의 의욕과 하나님의 포부와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안에서 살림을 하든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통치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일의 크기와 관계없이 내 삶 자체는 떨기나무가 되어서 하나님의 열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정해진 매일의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열정으로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떨기나무는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밥을 지어도 하나님의 열정으로 지을 수 있습니다. 나는 밥 지을 의욕과 주체성까지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지정의 육의 연합체만 남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효과입니다. 우리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기능, 감정이 움직일 수 있는 기능, 의지를 발동하는 기능이 있고 말하고 행동하는 육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체성이 없고 마음이 없으므로 쓸모없는 지정의 육의 결합체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떨기나무 같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힘이 나타나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는 바로 삶의 현장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의 현장과 거룩함은 어떠한 연관성을 갖고 있을까요? 깊은 산속이나, 성전의 가장 깊은 지성소가 거룩한 곳이지 삶의 현장에서 거룩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룩함이란 차별화되고 구분된다는 뜻입니다. 삶의 현장은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거룩함이란 모든 사람들과는 차별화되는 것입니다. 불붙은 떨기나무에 다가서려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거룩함을 이야기하신 이유는 바로 차별화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가발전을 통해 살아갑니다. 삶에 대해 주체가 되어서 자기의 힘을 발산하고, 자기가 노력을 하고, 자기의 열정으로 이끌어 갑니다. 자기의 의욕과 자기의 포부를 갖습니다. 그렇게 사노라면 지치고 피곤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질 수밖에 없고 탈진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거룩함이란 이렇게 자기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차별화되는 것입니다. 지정의 육의 연합체만 남았을 뿐이지 마음도 없고 주체도 없는 상태가 되니 구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이러한 떨기나무 상태에서 하나님의 힘과 하나님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거룩하고 차별화된 삶의 영역에 대해서 내가 갖추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발을 벗음으로 묘사됩니다. 지정의 육의 연합체만 남은 떨기나무는 이제 인간의 주체적이고 의욕적인 수고와 노력과 힘이 제거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어떤 작은 일도 할 수 없는 떨기나무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힘이 내려와서 살게 됩니다. 이러한 거룩하고 차별화된 삶의 공간에서 내가 예의를 갖출 수 있는 길은 신발을 벗는 것뿐입니다.
이 본문이 나올 때마다 반복하여 말씀드립니다만 신발을 벗음의 의미는 이력서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이력이란 밟을 리(履)에 지낼 력(歷)을 씁니다. 다시 말해 이력서란 내가 걸어온 발자취의 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쉽게 말해 ‘모세라는 인간의 80년 이력은 여기서 끝난다.’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120살까지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끕니다. 모세의 마지막 40년은 모세의 이력서가 기록될 수 없는 기간입니다. 모세라는 이름 아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하심의 구간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내 마음과 주체성은 하늘로 가서 하나님께만 집중합니다. 그럴 때 땅에서는 지정의 육의 결합체는 떨기나무로 남아있고 하나님의 힘이 임하시며 살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내가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내 발자국을 남기는 인생이 아니라 내 이력서에 마침표가 찍히는 것입니다.
모세는 40년간 애굽의 왕자로 살았고 40년간 양치기로 살았습니다.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도망갔다가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를 만나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고 처가살이를 하며 양을 쳤습니다. 모세가 양을 치던 시기에는 기록할 만한 내용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 사건도 없는 광야에서 양만 쳤기에 40년 간의 세월은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침’이라는 한 줄로 정리됩니다. 그리고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모세의 이력은 이름만을 남긴 채 이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게 됩니다. 이제 모세에게는 지정의 육의 연합체만이 남았습니다. 세상에서 모세의 주체성이 움직이는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고, 오직 하나님의 움직임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인생이고 약속의 명단에 있는 교인이자 선민들의 삶이어야만 합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포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가나안 족속들이 점령하고 살아가는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가시겠다는 포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포부를 위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절대적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떨기나무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200만 이상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고 들어가는 굉장한 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사는 일도 하나님의 의욕과 포부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포부와 의욕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물 하나에도 다 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포부가 우리에게 열정과 힘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바라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포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떨기나무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야! 모세야!’ 부르시듯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삶의 현장에서 완전히 떨기나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떨기나무가 되어서 하나님의 포부와 열정이 임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포부는 가장 시시하고 작은 일에까지 존재합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포부는 출애굽 하여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가시는 일보다 작지 않습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포부와 힘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러한 삶은 여러분의 이름으로 진행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발에서 신발을 벗고 다시는 주체적 발자국의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떨기나무가 된 상태에서 이 경험을 합니다. 우리 각자가 떨기나무에 얼마나 가까이 이른 상태가 되었는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세상을 대할 때 떨기나무가 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기에 세상에 대해서는 가장 사소한 일에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지정의 육의 연합체가 멀쩡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대해 마음도 없고 주체성도 없기에 무슨 일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완전한 떨기나무가 됨으로써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이력서는 완전히 끝나고 하나님의 발자국만이 여러분의 인생에 또박또박 남게 되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 전국에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눈 덮인 들판에 사람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고 하면서도 듬성듬성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이제는 촘촘하게 오직 하나님의 발자국만이 남아야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이 땅에서는 떨기나무가 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력서가 쓰일 수 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또 다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여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기간이 온전히 하나님의 이력서를 채우는 과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마음과 주체성은 오직 하늘에서만 흔적을 남기고 존재하게 하시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열정과 포부와 힘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기적이 우리의 일상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