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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도 동계공동학술발표대회
2011물류. 유통의 이슈와 전개
일시 : 2010년 12월 4일(토) 11:00 - 18:00
장소 : COEX(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301호, 302호, 303호, 205호)
주관 : (사)한국물류학회, (사)한국유통경영학회
후원 : 국토해양부, 한국무역협회 국제물류지원단, 정서물류통상연구원, 철도공사, 중기청, 소상공인진흥원, 도서출판 두남, 매일유업
초기 내한선교사의 경제활동연구
발표 : 최종천교수(성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구한말. 일제식민지 초기(1885-1911) 조선에 온 선교사의 경제활동에 관한 연구이다. 개화기에 서구에서 들어온 개신교와 함께 선교사들에 의한 근대성 전달과 수용과정에서 드러난 선교사들의 경제활동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연구한 것이다. 기존의 연구 대부분이 수용의 주체로서 선교사들의 역할과 교회설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결과 선교사의 개인적인 활동 업적이나 선교전략 등을 강조한 측면의 연구는 비교적 소상히 밝혀진 반면, 이해 비해 경제적인 활동에 대한 연구는 미비한 편이다. 다행인 것은 언론홍보분야나 국제학분야에서 연구물들이 나왔으나 그 양이 비교적 많지 않아서 다소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다. 이런 인식하에 본 연구에서는 초기 내한선교사가 선교사업 외에 조선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끼친 경제활동을 밝혀 보려고 한다. 이 연구는 또한 근대화에 따른 선교사의 경제활동역할 연구의 한 분야를 밝혀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2. 그 당시의 사회상
1) 조선의 신문명 이해
개화기 조선사회는 오랜 역사를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은둔과 고립으로부터 막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폐쇄정책으로 일관했던 터라 외국과의 접촉 범위가 가장 좁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근접한 명. 일본 등과의 공적인 사행 내주 이외에 거의 모든 대외 접촉의 길이 막혀있었으니, 이점 오히려 전대의 신라, 고려 때보다도 접촉의 범위가 훨씬 줄어졌었다. 사행래주 이외에는 내국인의 대외 진출이나 외국인의 내주가 없었을 뿐 아니라 무역, 유학, 이주, 여행 등을 통한 접촉도 사실상 없었던 시대였다. 그러니 외계와의 접촉의 범위는 지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서구 열강이 문호개방을 요구하던 한말 조선정부는 더욱 제약되었고, 신문명에 대한 지식이 극히 제한 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서구 개신교는 “어떤 형태의 서구 문명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전에 들어오게 되는 특권"을 가졌고, 선교사들은 서구 문명을 소개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1895년 Korean Repository에 실린 조선에서 활동 중인 선교사들의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얼마만큼 조선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지를 가늠하게 한다.
“이 사람들은 우리의 종교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명과 우리의 과학을 원합니다. 이 문명과 과학을 우리 개신교의 선물로 즉 우리 개신교의 물질적 혜택이라고 보여주면서 우리는 선교의 기회를 잘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구 과학기술의 소개와 물품을 선물로 주고 소개하는 일은 조선인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동시에 당시 조선은 선교사들이 소개하는 과학기술의 소개자로 인식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음의 기록은 당시의 과학기술의 소개와 증명이 얼마나 큰 충격이고 매혹적인 가를 잘 반영하고 있다.
“비누를 만들기로 했다. 우리가 비누를 만든다니 이런 놀라운 일이 있는가, 모두들 가슴을 두근거렸다. 숯불을 피우고 남비에 물을 끓이며 조심스레 소기름 얼마, 양잿물 얼마를 넣고 계속 끓이었다. 결국 이것들이 반고체로 엉키어졌을 때 냉수에 씻어보니 세탁비누가 만들어졌다.”
다음은 그리스도신문에 실린 기사내용인데 당시 과수농법이 발달하지 않는 조선인들에게 비친 귤에 관한 내용이다.
“귤로 해갈함
공립관에 있던 한인들이 불을 피하여 갈 때에 뉴질랜드에서 보낸 귤을 가지고 갔다가 해갈을 하였는데 이 귤은 뉴질랜드에서 공립협회 연환회 일을 위해 보낸 것이 건체되었다가 추후에 온 것인데 토요일에 이르러 학생회에 쓰라고 저축하여 두었더니 금을 가지고도 귤을 사지 못할 때에 참 요긴이 썼으니 우리는 그 귤을 위하여 한번더 감사하나이다."
분명 조선은 가난하고 형편없이 “덜 교화된 나라”에 관료들이 부패한 미래가 어두웠던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었기에 선교사들은 정기간행물을 발행하여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소개하고 국제무역을 할 수 있었다.
2) 미국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과 정치적 배경 이해
선교 초기 입국한 미선교사의 역사적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19세기 말 미국의 복음주의를 이해해야 한다. ‘19세기말 미국의 선교는 초기 중국이나 인도에서와 같은 전도중심의 선교전략에서 벗어나서 의료, 교육. 복지활동 등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사업을 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 도시의 이민자 집단에서 생겨난 복음주의 운동을 통해 모든 남.여의 교육과 고용, 보건과 생활환경개선에 대한 요구를 해결하는 것이 기독교의 책임이라는 사회적 복음의 확산이 되어 있었다. 이는 조선에 입국한 초기선교사들의 활동과도 무관하지 않다.
조선에 온 선교사들은 ‘미국의 문명을 전파하는 교사나 의사로서 간접적인 선교활동만을 허용하는 조건에서도 입국을 결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물론 정치적인 것이었다.
개화 초기 임오군란(1882년). 갑신정변(1884년)의 정치적 영향으로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 관계를 맺은 선교사들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인해 민비시해와 아관파천으로 더욱 정치권력과 가까워졌다. 따라서 초기 장로교의 언더우드(H. G. Underwood)선교사. 헤론(J. W. Herron)선교사의 입국은 개화당의 김옥균. 박영효의 정치적인 주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민씨 보수당과 손을 잡고 일한 알렌(H. N. Allen)선교사는 조선정부로부터 호의적인 대접을 받고 정치적 관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초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고종의 탈출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하기도 했으며 정치적인 도움을 받기까지 했다.
미국 선교부가 1888년 4월 22일 교섭통상사무독판으로부터 ‘야소교전도 금지의건‘ 공문을 전달받았으나, 선교사들은 자유로운 여행을 허락 받았다. 아펜젤러(H. G. Appenzeller)선교사는 1887년 4월부터 호조를 신청하여 황해도. 평안도 지역을 1893년까지 모두 50여차례 승인 받아 전도여행을 다녔고, 영아소동이 있었던 1888년 6월에도 경기. 충청. 전라. 경상 지역에 대한 호조신청이 승인 받아서 전도여행을 다녔다. 특히 독립협회와 선교사들은 서로에 대한 호의와 밀접한 정치협력을 다졌다.
실제로 언더우드는 고종과의 정치적인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의료교육사업을 진행하였는데, 1885년 4월 10일 광혜원을 개원(제중원의학교)하고 물리와 화학을 강의하였고, 1886년 5월 11일 한국 최초의 고아원을 개원(경신학교의 전신)하여 복지사업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른 고종의 호의는 대단했다. 언더우드선교사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축제일이면 항상 보내오는 왕실로부터의 선물에 숨이 막히도록 놀라곤 하였다. 수백 개의 달걀, 여러 줄의 곶감, 여러 봉지의 밤, 꿩, 수많은 쇠고기와 생선 등 그 선물은 어마어마했다. 그것은 병원 및 학교의 공직자로서의 언더우드에게 주어진 몫과 왕비의 의사로서 나(언더우드의 아내)에게 주어진 몫이었다. 물론 우리는 이 선물을 우리 선교사들 및 한국인 친구들과 나누었고, 쇠고기와 생선은 학교로 보냈다.”
1893년 12월에는 초교파 환자휴양소(Fredrick Underwood Shelter)를 개설하였으며, 특히 콜레라가 창궐했던 1895년 당시 조선정부가 미국공사를 통하여 보내온 편지의 내용을 보면 선교사의 활동이 어느정도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다.
“외부
504년 7월 3일 1895년 8월 22일 외부장관 김 미합중국 공사 실(Mr. Sill)씨
근계
본인은 우리 정부가 H. G. 언더우드 박사 및 그 친구들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 있음을 알리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약을 구입하는 데 많은 돈을 소비하고, 콜레라를 방지하는 데 노력한 결과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본 정부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사의를 전하여 줄 것을 당부합니다. 보인은...등등 김윤식(서명)“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이러한 정치적 대접을 받을 만큼 조선정부와 긴밀한 정치적 동맹관계에 있었으며, 언더우드나 아펜셀러 등 미국선교사들이 정치. 선교활동에서 다른 나라에서 파견된 타선교사들과 연합활동을 펼쳤던 정치. 선교활동을 이해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호주. 캐나다. 영국 등지에서 온 선교사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등에 업은 미국선교사 알렌. 언더우드에게 긴밀하게 도움을 청해야만 했고, 그 결과 보건의료사업. 복지사업. 교육사업이 성실하게 수행될 수 있었다.
3. 신문을 통한 선교사들의 경제활동
구한말의 근대적 신문들(1883년 한성순보, 1896년 독립신문, 1898년 매일신문, 1898년 제국신문, 1899년 황성신문)이 발간되면서 신문사들은 수입물품 광고를 통해 영업을 하면서 나름대로 독자층을 형성하였다. 이들 최초 신문광고는 관보의 성격을 띠고 1883년 10월에 창간된 한성순보의 세창양행 광고와 일본상인들의 옷감, 곡물, 염색약, 치료약 등을 파는 상점 광고 그밖에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등에도 여러 상품을 소개하여 광고수입이 신문사 운영의 상당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제물포에서 일본상인들과 수입상들의 가격이 비교적 비싸게 팔리는데 반하여 저렴한 가격을 내세우면서 대대적이고 지속적인 고객유치에 열을 올린 언론 신문이 있었으니 1897년 4월에 선교사 언더우드에 의해 창간된 ‘그리스도신문’과 장. 감리회가 1906년 7월 통합하여 발간한 ‘그리스도회보’가 수입물품 구매를 촉진하고 나섰다는 사실은 당시 선교사들의 경제활동 상황의 구체적인 일면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물론 선교사들에 의해 발행된 이들 신문이 조선에 선교사업을 발전시키고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립 및 인재양성을 힘쓰게 만든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사회사업과 조선인의 보건의학에도 기여를 하였으며, 성경출판사업과 서구의 신문물의 지식과 보급에 힘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문화와 역사를 알리고 서양농법과 서양문물소개을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광고의 지면을 상당부분 할애하고 큰 활자체와 사진을 실리면서까지 서양물건을 적극 홍보하고 신문사가 판매에 열을 올린 것은 당시 선교사들의 경제활동이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단초이다.
그리스도신문 창간호에서 신문발행의 목적을 “제 나라이 왕성하여 가는 것을 보고 제 자녀에게 제가 받은 학문보다 나은 것을 주려‘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주간에 발행하는 신문의 성격상 기독교의 진리만을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서구 문명의 이익을 도모한 선교사들의 경제활동과 그 역할에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 그리스도신문
언더우드에 의해 창간된 ‘그리스도신문’(각주)은 ‘조선에서의 첫 교회신문은 언더우드박사가 시작하고, 재정을 대고, 편집한 신문‘(그리어슨 의사(Dr. Grierson), 저다인목사(Rev. J. Gerdine), 스와인하트(Mr. M. L. Swinehart) 등이 만든 결의문에서 밝히고는 있으나 광고주에게 광고비를 받고 신문 값을 싸지 않게 받음으로써 실질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리스도신문의 1면과 2.3면은 농리편설. 공장편리설은 선교사 알렌(H.N.Allen). 벙커(D.H.Bunker), 헐버트(H.B.Hulbert)와 미국공사 실(J.M.B. Sill) 등이 글을 쓰고 언더우드가 한글로 옮겨 쓰는 편집을 맡았고, 사무는 빈튼(C.C.Vinton)이 맡았다. 이들은 조선의 농업발전을 도모하고자 직간접적으로 서양의 농법과 기계의 편리함을 선전하고 이후 철로에 관한 내용 등을 적극 홍보하였다. 특이한 것은 8면 지면을 다양한 광고란으로 적극 활용하며 물품을 소개하고 판매하였다는 것이다. 우선 신문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농리편설
밭을 가는 론
“서양 사람이 조선 밭으로 지내다 보면 놀라고 칭찬할 일도 많고 혹 매우 이상히 여길 일도 더러 있더라 밭들을 위해 잘 가축하는 법과 잡풀을 없애는 것과 흙을 자주 골라 주는 것이 다 매우 좋더라 잡풀이라 하는 것은 자라는 곡식에 유익한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니 흙을 잘 골라주고 파주는 것은 보리 뿌리를 땅에 깊이 들어가게도 하고 널리 퍼지게도 하는 것이라 날씨가 감을 때에는 호미와 괭이로 흙을 풀어주는 것은 땅 밑에 있는 물이 위로 올라와 곡식 기운을 다시 소성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다 좋되 ...생략...서양 장기들은 갈기를 깊이하고 흙을 매우 나늘게 만들고 속 흙을 위로 올라오게 하여 해마다 흙이 서로 바뀌게 하느니라 흙을 뒤집어 놓는 것도 무리가 있으니 다만 좋은 흙만 뒤집어 높는 법이라 만일 겉흙이 깊히 밖히지 못하면 다만 좋은 흙만 갈아 뒤집어 놓나니 만일 속에 모래와 돌이든지 좋지 아니한 흙이 들었으면 이 흙을 땅 위로 뒤집어 놓는 것을 아주 좋지 못한 거시라 다만 위에 좋은 흙을 한편으로 갈아 치우쳐 놓고 그 밑에 좋지 아니한 흙을 다시 덮어 주느니라 아침저녁 밭을 갈려고 하면 소가 적어도 두 필은 가지고 갈아야 할 떠이니 물력은 더 들을지라도 깊이 갈아주려거든 추수는 매우 낫게 하는 법이니라.”(농상공부인가 그리스도신문. 1권 2호. 1897. 4. 8)
공장편리설
바늘 만드는 기계
“무슨 바늘이든지 다 기계로 만드나니 이 기계로 험하고 강한 쇠줄을 각각 바늘 하나 될만치 잘나 끝은 뾰족하게 하고 머리는 납작하게하고 뚤어 귀를 길을 낸 후에 잘 연마해야 매우 뾰족하게 만드느니라 또 다른 기계로는 바늘 수를 세고 쌈을 짓으니 이 여러 가지를 다 한 기계로 하느니라.” (그리스도신문. 1권 9호. 1897. 5. 7)
사와 벼를 짜는 기계론
“그 후에 이구회라 하는 사람이 기계를 다시 고치고 또 육년후에 극방찬이란 사람이 아구회에 고친 기계를 다시 교정한 후로부터 길삼하는것이 더욱 편리하고 신속하더라.”(그리스도신문. 1권 16호. 1897년 7월 15일)
박람
농사기계
“미국에서 공예학문을 특별히 연구하지 아니하되 오직 농사에는 자세히 연구하여 밭갈고 씨 심는 기계는 미국을 제일로 여기는 고로 각국에서 다 그 기계를 채용하는데 지금 농가에 쓰는 씨 심고 곡식 거두는 기계가 제일 편리함으로 매년 곡식을 거두고 벨 때에 이백만명 인력을 던다더라.“(그리스도신문 10권 25호, 1906년 6월 21일)
런던이 큼
“런던지방에 있는 철로가 일만팔천리가 되는데 매년에 타는 사람이 육천만명가량이오 매 예배로 세면 타는 사람은 일백오십만명이오 제일 사람 많이 다니는 길은 열두시간동안에 왕래한 마차와 전차가 일만육천오십사부가 다니고 전차탄 사람이 매년에 삼천육만명이라 하루는 런던 큰다리위로 다니는 사람을 세어 본 즉 십일만육천구백이명이더라 작년 사월에 십구점종 동안에 강변길로 다니는 사람이 이십사만팔천십오만명 가량이더라.“(그리스도신문 10권 26호. 1906년 6월 8일)
다음으로는 8면의 광고를 통해 다양한 상품광고를 판매 소개하였다.
농기계 광고
삣슬장기회사 광고
농기계의 편리성을 알리고 신문국으로 와서 구경하고 사가라는 광고는 창간 3개월 뒤인 1897년 7월 22일부터 이듬해 까지도 지속적으로 매주 광고하였다.
“이 장기는 미국 삣슬이라하는 사람이 만든 기계니 서양 제국에도 매우 유명한 장기라 밭갈기를 깊이하되 힘이 들지 아니하며 쉽고 편리하기가 한량 없으니 우리 조선에도 농사를 힘쓰는 사람들은 쉽고 편리한 것을 취하여 사서쓰라 하거든 그리스도신문국으로 와서 리허를 속속히 알아보시오.”(그리스도신문. 1권 17호. 1897년 7월 22일)
약광고
1897년 7월 22일부터 지속적으로 서양과 일본의 여러 약을 많이 파는 품질이 좋고 값이 싸다는 식으로 상품을 판매 소개하였다.
“서양과 일본 여러 약을 많이 파는데 품이 좋고 값이 싸오니 사러 오시기를 바라오.”(농상 공부인가 그리스도신문. 1권 2호. 1897. 4. 8)
“구마모도회사의 진고개 큰 약방”
“상품 미국 금계랍과 회충산을 새로 내왔으니 사가기를 원하는 이는 서울 구리개 제중원으로 오시오.”(그리스도신문. 2권 8호. 1898년 2월 24일)
바늘. 각종 사탕. 밀가루. 약 광고
세창양행 광고
“본 양행에서 극상품 금계랍과 바늘과 각종 사탕과 또 밀가루와 방매할거시 많사오며 또 호박琥珀과 파리玻璃 등속이 있으니 사 가시오 또 물건 위해 붙힌 첨지에 본 양행 이름이 없는 것은 물건이 좋지 못 할 것으로 아시오. 인천항 세창양행“(그리스도신문. 5권 1호. 1901년 1월 3일)
각색 음식과 석유. 여러 가지 물건 광고
“정동 고살기회사는 서양 상품 금계랍과 각색 음식과 석유와 여러 가지 물건을 파는데 물건도 상품이오 값도 싸니 사가시오.“(그리스도신문. 2권 26호. 1898년 6월 30일)
*고살기회사(A. Goshalki 상회)
은행광고
로한은행 광고
“이 은행은 작년 십이월 오일에 아라사 활제 칙령으로 설립한 은행인데 본점은 아라사 서울 센트피터스벅에 있고 지점은 대한 서울 새문안 새로지은 벽돌집이라 오늘부터 이 은행이 열려 각색 은행 사무를 할터인데 돈 바꾸는 것과 외국에 돈 보내는 것과 남의 돈 맡아두는 직무와 돈 빌리는 일을 다 할터이오. 자본은 오십만원 가량인데 세계 각국에 다 상관이 있어 돈 래왕하는 일을 할터일너라. 은행 사장은 둘인데 가브리엘씨와 콜레일낸씨라. 누구든지 돈을 맡기면 오백원 이상은 일년에 두푼반 가량을 은행에서 돈 맡긴 사람에게 줄터이오 만일 돈을 몇 달 몇 해를 작정 하고 맡기면 변리를 더 줄터일너라. 이 은행에서는 은(銀)자 밖힌 은전은 일원으로 받지 않고 다만 은값만 처서 받을 터일러라.“(그리스도신문. 2권 11호. 1898년 3월 17일)
신문사 광고
“새로 낸 경성신문은 잡보와 각색 물가를 게재하였는데 상업에 유익하니 사 보시오 이 신문사는 전동 윤협판집이오.”(그리스도신문. 2권 11호. 1898년 3월 17일)
“새로 낸 대한신보는 매우 볼만하니 사보시오 이 신문사는 명동 광무협회오.”(그리스도신문. 2권 25호. 1898년 6월 23일)
재봉틀 광고
“자봉침을 거저 얻으려 하는 사람은 자봉침을 돈 없이 얻을 터이면 공히 얻는 도리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신문사에서 미국에 기별하여 자봉침 수십틀을 내여 올것이니 누구든지 이 신문을 일년치로 보시려 하는 이에게 신문가(가격) 선급하는 것을 지금부터 한 사람이 이십 오도를 모아 얻어오면 자봉침 하나씩을 거저 줄터이니 신문 볼 사람을 어서오시오.”(그리스도신문. 2권 29호. 1898년 7월 21일)
“자봉침을 거저 얻는 단 말을 그리스도신문에 여러번 광고하였거니와 지금은 그 자봉침 여러틀이 나왔으니 경향간에 누구시든지 자봉침을 한틀을 거져얻고 싶으신 이는 지금부터 그리스도신문 볼 사람 십오명에게 신문가 십오원과 십오명의 거처와 성명을 자세히 기록하여 가지고 그리스도 신문사로 오시면 자봉침 한틀을 거져 드릴터이오 또 자봉침 얻으시는 이에게는 지금부터 섣달그믐까지나는 신문을 매호에 일도식 거져 드릴터이오니 신문 볼 사람을 많이 인도하시오 또 만일에 시골에 있어 돈을 보내기가 어렵거든 그곳에서 신문가로 한돈자리 우표를 사서 보내고 또 십오명의 신문 일년치 우표값까지 다 보내시오 또 자봉침 가지실이가 시골에 있으면 우리가 보내여 드릴터이나 보내는 부비는 받는이가 담당하겠소 이 자봉침은 크지는 아니하나 단단하게 잘 만들어 힘도 있고 쓰기에 매우 편리하여 어린애라도 바느질을 하기가 쉽고 또 무슨 바느질이든지 자봉침으로 할 바느질은 다 할 수가 있는데 쓰는 법은 한 손으로는 꼭지를 잡고 돌리고 한 손으로는 헝겊을 먹여 넣으면 잘 꿰매지는데 누구든지 이 자봉침을 구경하러하려 하시거든 그리스도신문국으로 와서 보시오.”(그리스도신문. 2권 46호. 1898년 11월 17일)
진주 광고
“진주를 매매하려 하거든 가지고 그리스도 신문사로 오면 사려하니 가지고 오시되 진주의 품은 흠도 없고 조그마한 것을 구하여 오시오.”(그리스도신문. 2권 32호. 1898년 8월 11일)
호랑이 발톱 광고
“호랑이 발톱을 매매하려 하거든 가지고 그리스도 신문사로 오시오 호랑이 발톱을 제 짝을 맞추어 쌍쌍이 앞발톱과 뒷발톱을 가지고 오시오.”(그리스도신문. 2권 32호. 1898년 8월 11일 )
미국 곡식종자 광고
미국 좋은 곡식종자
“그리스도신문 보시는이는 명년 일년치 신문 값을 미리 선급하여 보내시면 명년 봄에 미국 농사에 심는 여러 가지 좋은 종자를 거져 줄터이니 명년 신문가를 선급하시오.”(그리스도신문. 2권 42호. 1898년 10월 20일)
달력판매 광고
달력 판매
“그리스도신문사에서 음력과 양력을 합하여 별 본으로 달력을 출판하였는데 본사 신문을 보시는 이에게는 달력 한 벌에 열 일량 이전 오푼씩 받기로 하였으니 달력을 사서 보시려하거든 그리스도신문사로 오시옴.”(그리스도신문. 2권 51호. 1898년 12월 22일)
음식 광고
밀넨의 음식
“젖 없는 어린 애들과 병인에게 매우 요긴한 음식인데 세계에서 다 시험하고 쓰는 것이오 이 음식이 매우 좋을 뿐 아니라 긴요함이 비할데 없는고로 1900년에 파리경에서 금으로 만든 훈장을 얻얻나니 사람마다 이 임식을 사서 젖없는 어린 애들과 병인에게 쓸것이니라.“(그리스도신문. 5권 1호. 1901년 1월 3일)
쌀 광고
잡보
외국쌀이 많이 옴
“안남쌀 몇 만석이 또 오는데 일본에서도 상민들이 쌀을 많이 사러 오는 고로 쌀값이 좀 떨어 진다하더라.”(그리스도신문 6권 6호. 1902년 2월 6일)
무연탄. 석탄 광고
남산골 네거리 명동 대한
“슌포막 아래 일인 림뎐공집에서 평양 무연탄과 일본 좋은 석탄을 출매하며 지점은 제물포에도 있으니 와서 사가시오.”(그리스도신문. 5권 1호. 1901년 1월 3일)
부동산 광고
“정동근처 과히 멀지 아니한 곳 어디든지 오육십칸 되는 집을 파실이가 있거든 그리스도 신문사로 와서 상의하시기를 바라오.”(그리스도신문. 5권 1호. 1901년 1월 3일)
“영국인 엄불네씨가 세주고 집을 얻으려하는데 혹 정동이나 종로 근처에 대한사람집중 사십칸이나 오십칸이나 육십칸 되는 집을 얻고저하오니 아무 사람이든지 그러한 집이 있어 세로 주라하면 본사로 와서 말하시오.”(그리스도신문. 5권 1호. 1901년 1월 3일)
요리책 광고
“서양음식만드는 법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독립신문사에서 박어 파는데 영국과 미국에서 쓰는 각종 식물 일백칠십일종류를 만드는 법을 다 자세히 번역하였는지라 서양식물만들기에 유의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긴요하고 유익한 책이오니 첨 군자는 사가시옵. 값은 일권에 오십전이오.”(그리스도신문. 5권 1호. 1901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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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단(일필 오백사십량) 궁초 순인 접영 왜증 여의사 길상사 당활라 고단 수갑사 숙수 태천주 산동주 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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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저 백저 북포 마포 양공단 양공릉 서양목 사양사 옥양목 양달니 왜광목 삼승 주란포 백목 생저 숙저 양사실 면화 생마삼
금은동철
금 은 원보 횡성금 백동 숙동 척동 유랍 함석 재랍 왜주석
오곡
백미 점미 콩 팥 들깨 참깨 녹두 밀가루 수수 기름콩 메밀쌀 보리 소미
잡종
삼첩지 이첩지 소고기 백지 청풍지 양자 천련지 장지 계란 연초 남도 등 제주 답양소 중소 아교 숙석회 강회 서도 모화관치 조선생강 대구 북어 감곽 해대 해의 수피 우피 적구피 산피 이피 황모일주 상사향 생록각 당사량 숙지황 송삼 검산 강삼 웅담(그리스도신문. 2권 9호. 1898년 3월 3일)
2) 그리스도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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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에서 금춘에도 양호한 과목각종을 특별염가로 대발매하오니 첨군자(여러분)는 즉 속청구(곧 빨리 청구)하심을 열망. 평양종로태극서점.”(그리스도회보. 1911. 3. 30. 1권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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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오이다 하나님 은혜중에 있는 화평당대약포는 팔보단을 대발매하옵고 소창단, 태양조경환 등 오십여종 양약품을 제조 발매하옵는데 내외국에 교제무역이 경년열세(여러해를 지냄) 하오데 우리 주 예수를 독신(도타울독. 믿을 신)하시는 형제자매에게는 자래(스스로 와서)교섭이 희란(드물어)하여 회포에 결점으로 인정하였더니 지금기회를 우(만남)하여 귀사회보에 광고할 세력을 득하였사오니 감사하오이다. 교우형제께서 徜혹약업을 경영하시거든 대리점이나 출장소나 되는 규칙을 청구하시옵. 약가는 특별이 대할인으로 봉정하려하옵니다. 경성종로화평당대약방. 고백.”(그리스도회보. 1911. 4. 30. 1권 7호)
“팔보단(八寶丹), 태양조경환(胎養調經丸아이를 기르는데 고르게 낳는 알약), 명이청(明耳精), 자양환(滋陽丸), 소아간기환(小兒癎氣丸 간질약), 회생수(回生水) , 기타 양약각종과 매(賣)약각종, 한약 당초재 도매산가 원지(遠志)에서는 각종약을 청구하시면 대금인환으로 대송하려니와 모지점이나 출장소하기원하시는 회원은 규칙을 청구하시옵. 팔보단제조본포매약행상원모집광고 본(本)당매약행상원 한삼백인으로 모집하되(경성급지방) 연령은 남녀무론하고 십오세이상 사십세이하로 한하며 품행이 단정한 사람으로 모집함(지원하는 사람은 규칙을 청구함). 발행소 경성종로화평당대약방본포(本鋪). 주임 이응선 고백.“(그리스도회보. 1911. 5. 30. 1권 9호) 기타 특별광고를 내면서까지 제약상의 판매를 도왔다.
4. 선교사의 다양한 경제활동
선교사들이 선교회 신문사 나 민간신문사들을 통해 대대적이고 지속적으로 상품광고와 판매에 열을 올리자 동료선교사들이나 무역상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얻으면서도 여러 선교사들은 경제활동에 매진하였다. 다음은 선교사들의 경제활동을 파악해보자.
빈튼(C. C. Vinton) 과 언더우드(H. G. Underwood) :
조선성교서회 관리인이자 언더우드가 사장인 그리스도신문사의 사무를 총괄했던 빈튼은 재봉틀을 백대나 들여와 팔다가 문제를 일으켰고 벽지를 수입해다가 파는 일에 미국선교사의 상업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재봉틀을 들여와 적극 소개하고 판매를 도왔던 언더우드는 독립신문 기고를 통해 자신을 변호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선교사들이 일부 물품에 대한 판권을 차지하여 우리 상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말하는데, 나는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농기계와 기구를 수입해 들여온 것은 나밖에 없다. 나는 여러 번 판매 대리인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항상 거절해 왔고, 요청만 한다면 그런 일을 해 줄 무역회사들이 이곳에 있다고 분명히 대답해 왔다. 나는 어떤 물품에 대해서도 대리인 역할을 한 적이 없다. ...중략...한국인들에게 키니네(quinine)를 공급했는데, 의약품을 공급하는 일은 우리 사업의 일부이다. ...중략...키니네를 팔아서 기독교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고, 책을 사고, 책방을 유지보수하며, 인쇄된 복음을 전파시킨다...중략...내가 행한 일들이 조선인들에게 이익이 되고자 목적한 것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상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 틀림없다.” 여기에서 언더우드는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면서 자신의 경제적 행위가 오히려 무역을 하는 사람에게 일조한 것 같은 느낌을 던저 주었고, 자기 자신은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언더우드는 신문사 사무국에서 빈튼을 통해 재봉틀도 팔게 하였고, 여기에 관련된 사람들을 통해 각종 진주나 호랑이발톱, 미국 곡식종자, 쌀, 부동산, 무연탄. 석탄, 요리책 등 각색 상품목록을 광고하고 다양한 물품들을 판매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로버(Charles Loeber) :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 재정담당 찰스 로버는 건축자재를 수입해 들어와서 개인적으로 싼값에 팔아넘겼다. 결국 감리교선교부는 미국공사관에 고발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알렌(H. N. Allen) : 미국 총영사의 자격을 가졌던 알렌은 선교사들의 상업적 행동에 대해 맹렬하게 비난했다. 비난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교사들 사이에 일부 물품의 판권을 얻는 개탄할 만한 관행이 늘어나고 있어서 우리 무역상들에게 손해를 입히고 있다. 생계를 보장받고 비용을 드릴 일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상인들모다 싸게 물건을 판매할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은 많은 불화를 만들고 있고 선교사들이 돈 이익을 얻는 일에 너무나 지나치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의혹을 일으키고 있다. 본인은 이러한 행동이 선교 사업에 해를 끼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알렌은 개인적인 빚을 지고 있었기에 의료행위를 하면서 진료수입을 올리면서, 고종의 의사였던 의료선교사인 본인의 정치적 역량을 행사하여 조선의 골동품과 도자기들을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팔고 운산금광채굴권을 얻도록 도와주고 그 대가를 받아 챙겼다.
헐버트(H. B. Hulbert) : 독립신문 영문판 편집을 맡아서 일하면서 난로수입과 판매로 수익을 올려 상당한 사업을 할 확신을 가진 아처 헐버트(Archer B. Hulbert)의 대리인 활동을 돕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부동산 사업을 하여 상당한 돈을 벌었다는 소문까지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 미국공사관이 개입한 적이 있다.
5. 나가는 말
이상에서 초기 내한선교사의 정치적 배경을 등에 업고 신문판매와 수금을 조선정부로부터 받은 선교사들의 신문광고와 경제활동의 내면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들이 처한 경제적 활동과 선교의 상관관계이다. 1906년 미국내 기독교교역자의 봉급이 663달러였는데 미국인 근로자의 연평균 수입이 700달러가 넘지 않는 데 반해 미국공사나 선교사의 연봉이 1, 500달러가 넘고 있었다는 사실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소득이나 생활수준이 월등하게 높았던 미국 선교사들이 경제활동에 활발히 참여한 것은 미국의 복음주의 영향이었다는 관심이 제기된다. 그러나 미국장로교선교사는 1,000달러 이상의 연봉에 각종 수당까지 받는 사람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우월하고 돋보이는 생활을 했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물론 브라운(Brown, Arther J)이 지적한 대로 미국선교사들이 고등교육을 받은 세련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선교사들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으로 몸을 바쳐 선교하다가 생을 마감한 이들이다. 특히 원산에서 사과농장을 경영하여 자립선교사로 선교사를 조선에서 파견한 캐나다출신의 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같은 이도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벙커가 알렌의 장사에 반대하고 나선 사건이라든지 보스톤출신의 무역상 타운센트(W. Townsend)가 선교사의 사업에 기부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한 사건이 시사하는 바도 크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선교사의 상업에 관한 경제활동이 순수한 복음주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렇다고 선교사들의 모든 행동을 경제활동과 연결 짓는 것은 척박한 환경에서 선교의 임무를 띠고 일했던 저들에게 다소 무리가 따르고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에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열정을 가지고 내한한 선교사들의 일련의 활동은 선교의식의 변화 내지 선교의 전략과 정체성에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