❺ 무구심[無求心ㆍ無心] 사상
제6「부사의품」에 무구심이 등장한다.
“법은 무위無爲요, 만약 유위有爲를 행한다면 곧 유위를 구하는 것이다.
법을 법求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만약 법을 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일체법에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於一切法 應無所求]”
모든 중생이 불성佛性ㆍ본성本性을 다 구유具有하고 있으므로 굳이 (자심) 밖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
보리 달마는 『유마경』에 영향을 받아 『대승입도사행론大乘入道四行論』에 무소구행無所求行이라고 하였다.
무소구행을 강조하면서 무위에 머물러야 하고, 진정한 구함은 구함이 없이 구할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초기 선사들은 『유마경』에서 영향을 받아 자파 선종의 선사상 정립에 근간을 삼았다.
육조 혜능(六祖惠能, 638∼713)은 『단경』에서 자성自性은 본래부터 청정하며,
본래부터 생멸이 없고, 본래부터 구족되어 있으며, 자성은 능히 만법을 일으키기 때문에
"부처는 자성 가운데서 이루는 것이니 몸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말지니라.”고 하였다.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의 설법 중에도
“무릇 법을 구하는 이는 구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應無所求 心外無別法 佛外無別心].
마음을 제외하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부처를 떠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마조는 ‘도불용수 단막오염(道不用修但莫汚染)’을 강조하였다.
❻ 불이不二 사상
고래로 많은 주석가들은 이 경의 중심이 바로 이 품에 있다고 했는데, 이 품의 불이사상은 이 경 전체에 일관一貫하는 핵심이다.
제 9 「입불이법문품」의 구조상 문수보살을 포함한 32보살의 설이 모두 문자의 표현[敎]이라면, 유마의 침묵은 곧 언설을 떠난 자리인 불입문자不立文字, 즉 선禪을 강조한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불이不二는 산스크리트어로 아드바야(a-dvaya)라고 하며 중성명사로 쓰일 때는 통일성(unity)이라든지 동일성(identity), 또는 궁극의 진리(ultimate truth)라는 뜻이 된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뜻인 절대적인 평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여기서는 상대적인 차별에 얽매이는 것을 ‘이二’라는 상相이라 하고, 절대적인 무차별평등에 집착하는 것을 불이의 상相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집착은 다 공空의 뜻을 모르는 태도이므로 함께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 품에서 유마가 ‘불이’라고 한 것은 상대적인 차별과 편견을 여읜 절대적인 무차별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대 관계를 넘어선 절대 무차별의 평등을 말한다. 즉 대립을 떠난 불이이다.
일체 차별을 떠난 절대 평등을 나타내고 있어서 진여眞如나 법성法性, 또는 법신法身 등,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나타내려는 표현인 것이다.
문수보살은 깨달음의 경지인 불이 경계는 감히 말로도 드러낼 수 없고, 문자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일체의 묻고 답하는 것조차 떠난 절대 무위無爲의 경지라고 하였다. 유마가 침묵한 것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다. 절대적 경지는 어떤 언구로서도 표현될 수도, 어떤 말로도 드러낼 수 없는 절대 평등의 경지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마의 일묵一黙을 선종에서는 우뢰와 같은 침묵이라며, 깨달음의 세계로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