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상황 영화평 97. January
나는 상상력을 찬양한다 !
- 베르히만의 인생과 예술 -
Ⅰ. 상상력이 창조한 베르히만의 특선요리 <화니와 알렉산더>
크리스마스 이브, 알렉산더는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하기만한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할머니 헬레나가 사는 곳까지 와버렸다. 원래는 전체가 한집이었지만 가운데 벽을 세우고 미닫이문을 달아 한쪽을아들 오스카 내외와 손주들에게 내어 준 것이다. 전체적으로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거실의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 간 알렉산더는 바닥에 누운채로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쳐다보는데...... 하얀 조각상이 마치 살아있는 듯 움직인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어리둥절해진 관객에게 찬물을 끼언듯 연이어 바닷가에 물결치는 파도의 영상이 나오고, 카메라는 크리스마스파티 준비로 여념없는 헬레나의 저택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이제부터 조숙하고 당돌하지만 어린애다운 맑은 눈을 가진 소년 알렉산더와 함께 떠나는 영화보기의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됨을 알리는 타이들이 화면 위로 지나간다. - 화니와 알렉산더 Fanny and Alexander> , 잉그마르 베르히만 작품 -
이 여행은 무려 3시간8분에 이르는 장거리 여행이다. 때문에 좌석에 앉기 전에 반드시 화장실에 다녀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여행을 잠시 중단해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장거리 여행에서 다양한 볼거리와 푸짐한 먹거리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요소다. 볼 것도 먹을 것도 변변치 않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다. 그나마 고행이라도 뭔가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마음의 양식을 얻었다면 괜찮은 여행이 될 수 있겠지만,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건 그야말로 어디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악몽"이리라. 영화보기도 예외는 아니다. 길수록 관객에게 기억에 오래 남을좋은 추억(3분동안 혀를 즐겁게 해주곤, 텁텁함과 속쓰림만 남겨주는 300원짜리 인스턴트 커피처럼 영양가없는 추억이 아닌 진짜배기)을 만들어줘야할 감독의 책임은 막중해지는 것. 영화 <바베트의 만찬>을 본 사람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요리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예술이 된다는 것을.
거두절미하고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예술가라고 불릴만큼 솜씨좋은 요리사임에 틀림없다. 화니와 알렉산더의 이야기는 중간에 화장실에 가고픈 생리적 욕구를 눌러가면서 자리를 지킬만큼 흥미진진했으며, 현실과 환상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언제 3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줄줄이 풀어놓은 노장의 상상력 잔치는 볼 것도 먹을 것도(물론 눈으로만, 하지만 헬레나의 저택에 마련된 이국적인 크리스마스만찬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절로 도는 멋진 것이었다.) 풍성했다. 진심으로 6000원이 아깝지 않은 영화다.
Ⅱ. 과연 예술과 신앙은 화해할 수 없는가?
베르히만이 1918년 생이니까 올해로 80세이고, 고향은 스웨덴의 작은 대학도시 웁살라이다. 그의 아버지 에맄(Erik)은 유명한 개신교 목사인데 유감스럽게도 아버지에대한 베르히만의 기억은 "남 앞에서는 한없이 인자하지만 자신의 가족에게는 냉정한 이중인격"이라고 말할 만큼 끔찍한 것이다. 이 상상력이 풍부한 소년은 아버지에게 끝없이 반발심을 느꼈고 19살이 되던 해 급기야 집을 뛰쳐 나온다. 흔히 부모로부터 바람직한 신앙교육을 받지 못하고 부정적인 방향에서 신앙을 강요받은 이들이 그렇듯, 베르히만은 연극과 영화 양쪽에서 자신의 고유한 작품세계를 구축하여 예술가로서 전세계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지만 신앙적으로는 갈등을 거듭하다 회의주의자로 남게 된다.
신과 종교에 대한 그의 남다른 갈등은 작품의 주된 모티브로 작용하였고, 작품을 통해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하는 집요한 노력은 그의 영화를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경지로 끌고 갔다. 때문에 베르히만의 영화는 영화에 이른바 '형이상학적 물음' 즉 '철학'을 도입한 '예술영화'의 대명사가 되버렸다. 비디오로도 출시되어 있는 <제7의 봉인>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신의 부재'와 '인간의 고통'의 주제는 함께 '신의 침묵 3부작'으로 불리는 <산딸기>, <페르소나> 이후 신은 이미 떠나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귀착된다. 그리고 <제7의 봉인>에서 이미 나타나둣, 기사 안토니우스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이 모두 사신에게 이끌려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행로에 들어섰지만 유일하게 사신을 피할 수 있었던 광대 부부에 대한 그의 따뜻한 시선은 바로 최후의 희망의 보루로서 그가 선택한 것이 예술의 세계임을 말해준다.
" 나는 영화를 지상 위에 세워진 성당의 여러 조각품들처럼 생각한다. 돌을 깍아 용의 머리든지 천사나 악마, 성자 그 무엇든지 간에 그저 성당을 장식하길 바란다.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장식품이 된다는 그 사실만으로 나는 즐겁다. 나는 신자든 무신론자든 기독교인이든 이교도든 상관없이 성당을 짓기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닐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예술가이고 또한 장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배운 것은 돌을 깍아 얼굴과 관절과 몸체를 만드는 기술이며, 그 건물의 가격이 얼마인지, 질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 내 이름은 나와 더불어 사라진다. 난, 자신의 일부를 이름으로써가 아니라 실체로써 부활시키고 싶다. 내 이름 또한 여러가지로 불려질 태지만, 거기에 상관치 않겠다. 설령 그것이 용이나 악마, 성자라 해도..."
Ⅲ. 그러나 예술도 신앙도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베르히만처럼 훌륭한 예술가가 끝내 신앙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교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자신이 설 수 있는 정당한 위치를 부여받지 못한 많은 영화학도들이 혹시라도 그의 영화를 보고 깊이 공감하여 같은 길을 갈까 두렵다. 그렇다고 베르히만을 반기독교적 영화작가로 몰진 말라. 마녀재판을 통해 진짜 마녀가 심판받은 일은 거의 없다. 단지 교회의 눈에 가시같은 불쌍한 인간들이 희생되었을 뿐이다. 베르히만은 불행히도 목사였던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들은 끝내 벗어버릴 수 없었고 자신의 내면상태를 그대로 영화로 그려냈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예술가가 똑같은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베르히만과는 상반되는 두명의 예술가가 있다. 그들은 바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이다. 출애굽기36장30절에 보면 하나님이 성막을 짓기 위해 브살렐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 오홀리압과 함께 다른 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능력까지도 부어 주신다. 그들은 공예가(craftman)이자 디자이너(designer)였으며 수예가(embroiderer)이고 직조공(weaver)이었다.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금으로 그룹들(천상적 존재)을 만들고 그 밖에 제사에 필요한 상 위의 기구들을 만들었다. 출37장17절에서 22절을 읽고 그들이 만든 등대(lampstand)가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웠을지 한번 상상해보라! 베르히만이 되기 원했던 것, 성당 한쪽에 새겨진 조각을 만든 중세시대의 이름없는 조각가처럼 거창한 이름보다는 작품 속에 깃들어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조각품으로 부활하고 싶다는 그의 말을 상기해보자. 예술가로서 그가 바랬던 것, 그리고 이루었던 것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즐겁게 일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뿐 아니라 그들에게 갖가지 재료를 다루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룹과 등대를 창조해낼 수 있는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며 그분을 위해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다.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 이것이야말로 베르히만이 그토록 찾아 헤맸지만 알 수 없었고 찼지 못했던 것이다. 상상력은 위험한 것도 신앙보다 무가치 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에게 필수적인 능력이다. 어린 알렉산더의 눈을 통해 보여지는 초현실적인 세계는 베르히만의 예술적 상상력이 빚어낸, 현실과는 다른 흥미로운 세계이다. 우리는 베르히만의 상상력이 주는 아름다움에 포식할 수 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는 없다. 그는 브살렐처럼 상상력을 부어 주시는 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상상력 그 자체를 찬양할 수 밖에 없었다. <화니와 알렉산더>는 바로 어린시절, 그를 억누르던 엄격한 신앙적 계휼의 감옥에서 그의 영혼에 날개를 달아 해방시켜 주었던 상상력의 힘에 바치는 찬가인 것이다.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화니와 알렉산더>
Ⅰ 엨탈가족 -일상생활과 극장, 크리스마스파티, 풍요함.
가족간의 우애
Ⅱ 오스카의 죽음과 에밀리의 재혼
+- 목사의 삭막한 집, 가족과 종교적 계율의 엄격함
+- 엨탈일가의 풍요함, 예술적 자유로움
Ⅲ 화니와 알렉산더의 탈출과 새로운 탄생
유태인 상인 이삭의 신비주의적 공간
이스마엘과의 만남. 영적 교류
목사의 죽음. 다시 돌아 온 에밀리
세속적 방탕함이 낳은 구스타프와 마이의 아기와 죽
은 목사와 에밀리의 아기의 세례날
다시 모인 가족
새로운 연극대본을 받아든 헬레나
알렉산더의 목덜미를 잡는 죽은 목사의 환영
<화니와 알렉산더>를 관통하는 상상력 예찬은 종교적 갈등 속에서 연극과 영화를 통해 예술적 상상력을 추구해온 베르히만의 인생관과 예술관이 무엇을 그 근간으로 삼고 있는가를 드러내준다. 그는 목사였던 부친을 통해서 부정적인 신관을 물려받고 일생통안 그의 에술적 상상력과 자연스런 욕구들을 끊임없이 억압하는 '영혼의 감옥'으로 종교를 인식한다. <제7의 봉인>에서 그는 여전히 자기를 떠나지 않는 신의 존재를 캐묻는 기사가되어 죽음 앞에서 신의 현존을 찾고자하지만 끝내 신의 부재만을 인식한다. 결국 인생의 비참함과 죽음 앞에서 신은 침묵하고 인간은 사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베르히만이 최후의 희망을 두는 것은 상상력의 세계 속에서 낙천적으로 그날 그날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광대의 삶이다.
여기서 이미 그는 신의 현존을 추구하는 구도자의 옷을 벗어버리고 죽은 아버지에 대한 불쾌한 기억과 더불어 종교와 신에 대한 화해의 노력을 포기한다. 이제 그가 가치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예술가로서 묵묵히 상상력의 세계를 형상화시키는 것이다. 상상력은 베르히만에게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고 종교적 억압의 어두운 감옥으로부터 그의 영혼을 자유케 만드는 구세주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