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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드보라와 바락: 전세살이 믿음>의 줄거리 :
여사사 드보라와 바락의 관계가 전형적인 특징을 드러냅니다. '전세살이 믿음'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떠 올리게 합니다. 바락은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을 가질 뿐, 믿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관련 사실을 사실로 인정할 뿐, 그 사실들에 자기 마음을 쏟아 가닿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아득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바락은 이 드보라의 믿음 안에 머물며 행동합니다. 믿음의 전세살이가 이루어지는 상태입니다. 이런 믿음에는 절대로 어떠한 성취도 온전히 주어질 수 없음을 본문은 보여주십니다.
드보라와 바락: 전세살이 믿음
(사사기 4:1~24)
1.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3.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6.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9.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10.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우리가 읽은 1~10절에는 사사 드보라가 바락에게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를 물리치게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락은 만 명을 이끌고 드보라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지시대로 기손 강에서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가 이끄는 철 병거 구백 대를 무찌릅니다. 그 뒤로 겐 사람 헤벨이라는 자가 언급됩니다. 헤벨은 가나안 왕 야빈이나 군대 장관 시스라와 화평 관계를 이루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벨의 아내 야엘이 전쟁에 패해 도주하던 시스라를 장막에 들여서 편히 쉬게 합니다. 야엘은 시스라가 갈증을 해결하고 깊이 잠들었을 때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말뚝을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박아서 죽입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드보라와 바락: 전세살이 믿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전세살이 믿음이란 하나님을 직접 마주하여 생생하게 의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전달되는 지시를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생하게 의식하는 사람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행동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이 마주하는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하시느냐?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느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생생하게 마주한다면 자기도 하나님을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생생하게 마주하는 사람에게 자기의 행동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느냐?’라고 묻는 전세살이 믿음은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요즘 시대는 AI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AI에 묻습니다. 그야말로 전세살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AI가 관련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참으로 유익합니다. 저는 AI가 인터넷처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 세상에 허락하신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삶에 인터넷이 없는 상황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AI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게끔 될 것입니다.
물론 AI가 만능은 아닙니다. 미국과 이란과의 전쟁에서도 미국은 팔란티어라는 AI에 묻고 폭격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초등학교가 폭격을 당해 175명의 어린이가 사망했습니다. AI는 행동을 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해 줄 수는 있지만 직접적으로 나의 행동을 지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무척 위험한 유혹입니다. 인터넷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부작용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터넷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쓰면 유용할 것이나 오용하면 큰일 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드보라와 바락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바락은 드보라의 믿음에 전세살이를 한 인물이었습니다. 본문은 사사 드보라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려는 메시지의 핵심은 바락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그 내용을 살펴봅니다.
여선지자 드보라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입니다. 열두 지파의 가나안 분할 지도를 보면 가장 남쪽에 유다 지파가 있고 북쪽으로 베냐민 지파가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 북쪽으로는 에브라임 지파가 있고, 그 북쪽으로 므낫세 반 지파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북쪽으로는 잇사갈과 스불론과 납달리와 아셀 지파가 있습니다. 드보라는 이처럼 북쪽의 납달리 게데스에 살고 있는 바락을 불러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게 합니다.
드보라가 사사로 인정받은 계기는 백성의 재판을 했던 것에 기인합니다. 드보라는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했습니다. 종려나무 숲이 있는데 그 숲의 별명이 드보라의 종려나무입니다. 드보라는 이곳에 거주하며 백성들의 문제를 재판해 주었습니다. 앞서 여리고 성을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불렀던 것에 이유가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종려나무 숲을 드보라의 종려나무라 부른 것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승리를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이 첫 번째 승리를 쟁취한 성이기에 종려나무 성읍이라 불렸습니다. 드보라의 종려나무도 마찬가지로 승리의 의미가 있습니다. 드보라의 재판을 통해 승리를 만들어 내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재판은 주로 사람들이 출입하는 공개적인 성문 안쪽 광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드보라는 성 바깥에 있는 종려나무 숲에서 재판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사회적으로 공인된 재판 자리보다 사적인 드보라의 재판을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드보라에게 나가 재판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드보라는 어떤 식으로 재판을 하였을까요? 그 힌트가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라는 표현에 담겨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종려나무는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식 문제를 가지고 드보라를 찾아갔습니다. 드보라는 자식 문제를 갖고 찾아온 사람에게 승리의 재판을 합니다. 우리를 포함하는 선민에게 있어서 승리란 내 속에서 활성화되는 죄와 저주를 이기고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지 못하는 이유는 내 뜻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죄와 저주가 활성화될 때 내 삶을 내가 책임지려 하고 내 뜻으로 살려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승리란 죄와 저주가 활성화된 내 뜻으로 살려는 삶을 깨부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지는 승리의 삶이 되기 위해서는 당면한 문제보다 하나님을 더 생생하게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고 하나님의 뜻에 올라탈 수 있습니다. 드보라는 먼저 자식 문제를 안고 찾아온 사람의 상태를 볼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식 문제를 더 생생하게 의식하는 상태를 확인하고, 자식 문제보다 하나님을 더 생생하게 의식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을 더 생생하게 의식하는 상태에서 자식 문제를 보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 자식 문제를 생생하게 보는 것과 하나님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자식 문제를 보는 것은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마음에서 밀려 나간 문제를 보면 70~80%의 경우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생생하게 의식하면 하나님이 문제와 나 사이로 들어오십니다. 하나님 너머에 있는 문제와의 거리가 벌어지면서, 문제의 성격과 비중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 걸려있는 진짜 문제는 삶에서 벌어지는 일을 너무 가까이 보고 너무 크게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크게 보면서 문제는 하나님 너머로 아득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문제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와의 거리를 아득할 정도로 벌리지 못하고, 가까이 보고 크게 보면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답은 다 틀린 답이 되어버립니다. 드보라의 재판이 승리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드보라는 선민이 안고 있는 문제보다 아득하게 밀려있는 하나님을 더 먼저 더 크게 의식함으로써 승리를 끌어내는 재판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 9절입니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말합니다. 드보라의 말대로 하나님께서는 바락이 이끄는 이스라엘군이 이기게 하시지만 최종 승리는 바락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재판하였다는 말씀에는 드보라가 어떤 재판을 했는가를 알려주시는 암시가 들어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락이 전쟁에 참여해서 이기지만 하나님은 승리의 영광을 그에게 안겨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드보라의 재판이 승리를 위한 것임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저 또한 드보라와 같은 심정으로 여러분을 상담해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상담을 하러 오실 때는 대부분 삶의 문제가 너무 생생한 상태입니다. 어떤 분은 자녀 이야기만 하시고, 어떤 분은 남편 이야기만 하시고, 어떤 분은 사는 이야기만 하십니다. 가만히 듣다 보면 그러한 이야기가 끝이 없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세상 문제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믿으면서 사는 것이 너무너무 좋아요. 십자가 생활화가 이렇게 기쁜 삶을 살게 해줍니다.’라고 말하는 분은 흔치 않습니다. 일단 강릉에 오시는 분들의 70~80%는 삶의 상황이 바닥으로 내려앉았을 때입니다. 삶이 편하거나 웬만큼 진행되는 중에는 올 필요도 느끼지 못하실 것입니다.
저는 드보라처럼 총론을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처한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다. 그 문제와 함께 하나님도 같이 계신다. 당신의 문제는 하나님을 아득하게 느끼고 문제만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다. 당신의 의식에서 느끼는 하나님의 존재감이나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정말로 하나님이 그 정도 비중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라는 것을 우선 묻습니다. 문제보다 하나님을 먼저 의식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득하게 밀려날 정도로 하나님을 크게 의식하면 문제에 대한 답도 보인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듣고 하나님과 함께 행동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총론적인 답이자 결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혹에 빠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생하게 의식해야 한다는 말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감, 하나님 있음에 대한 실감, 하나님 좋음에 대한 실감은 너무 많이 들어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스케이트가 얼음 위를 지나가듯이 지나가 버립니다. 말씀을 딱 붙잡고 실제 상황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실감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실감하는 믿음을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저 총론적인 이야기로 지나가면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묻습니다. 이것이 많은 분들이 빠지는 유혹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종교인들이 와서 구하는 것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회복하게 해달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전문적으로 관계하면 됩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총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문제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에 대한 각론을 원합니다.’라는 심정인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전세살이를 하려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무한한 우주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만 유일한 있음이고 세상의 모든 것은 있게 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있게 된 것들을 다 관장하시는 중에 허탈해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택하신 선민이 믿음의 전세살이를 하려고 할 때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AI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의 전세살이를 하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제일 기가 막혀 하시고 제일 허탈해하십니다. 본문은 그 예를 바락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우리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입니다. 권사의 어떤 기도의 제단, 장로의 어떤 기도의 제단, 목사가 어떤 치유 사역을 한다는 식으로 내 삶에 대해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를 타인에게서 찾고자 합니다. 내 마음에서 내 육체보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제쳐두고 종교 지도자를 찾습니다. 그리고 지금 처지에서 어떻게 행동하면 좋겠는지를 묻습니다. 저는 이러한 행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설교는 하나님 앞으로 당사자를 밀어냅니다. 하나님을 마주 보도록 밀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독자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독자적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든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시며 조물주이신 하나님이 아버지 되기를 자처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제쳐두고 신령하다고 소문난 종교인이나 종교 지도자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인가를 묻고 답을 찾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종교 지도자라는 자들이 이러한 인간의 악함을 악용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약함이 아닌 악함입니다. 마귀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홀로 서야 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저처럼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이란 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진짜 문제는 삶의 문제를 하나님보다 더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라는 것을 지적하고, 하나님께로 밀어붙여서 하나님을 더 생생하게 의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끊임없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행동의 답을 구하려고 간구하고 상담합니다. 정작 하나님 자신을 마주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등지는 것이 악함이고,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 악함입니다. 이것은 약함이 아닌 악함입니다. 악한데 교활하기까지 하면서 ‘내가 약하니까 종교 지도자에게 묻는다.’라고 변명까지 합니다.
드보라가 바락을 부르는 모습을 살펴봅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드보라는 므낫세 지파의 땅을 넘어서 더 북쪽에 있는 납달리의 게데스에 살던 바락을 부릅니다. 6절을 보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라고 했습니다. 드보라는 마치 하나님의 명령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또 이어지는 7절을 보면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승리를 위한 상담이 아니라 곧바로 지침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너도 마땅히 알았어야 하는 일이 아니냐’라고 말한 셈입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네가 하나님을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너에게 내려갔을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생생하게 의식하느라 하나님을 놓쳐버리고 하나님을 아득하게 밀려나게 했느냐? 하나님이 시스라의 철 병거 군단을 네 손을 통하여 멸절시키려는 계획을 세우셨는데도 너는 이 계획을 못 듣고 있느냐?’라고 말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너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계획들을 갖고 계신다. 너에게 지시를 하시는데 왜 못 듣고 있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내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십자가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절대적인 이유는 문제를 하나님보다 더 강하고 생생하게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하나님보다 더 생생하게 의식하는 나는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문제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을 생생하게 의식하기만 하면 나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계획들을 깨닫게 됩니다.
바락은 드보라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라는 말을 듣고 놀랐을 것입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하나님이 나한테 뭘 명령하셨다는 걸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수없이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명령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명령은 무슨 명령이냐? 아무리 기도해도 대답도 없더라. 응답도 안 해주시더라.’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을 생생하게 의식하면서 하나님을 아득하게 밀어놓고 응답을 구하니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내가 당면한 모든 문제에 대한 명령을 갖고 계시고 지시를 갖고 계십니다.
드보라는 바락이 하나님의 명령을 못 듣는 것을 지적하며 기손 강으로 갈 것을 전합니다. 이에 대해 바락은 8절에서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락을 통해 의도적으로 믿음의 전세살이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락은 드보라가 가야만 자신도 갈 것이라고 전형적인 믿음의 전세살이의 모습을 보입니다. 바락이 드보라의 말을 따라 기손 강에 갔다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아득하게 밀어두었던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생생하게 의식할 수 있었습니다. 드보라를 통해 전달된 말씀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계획이었구나!’라고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아말렉과의 전쟁을 명하고 산으로 올라갔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말했기 때문에 싸웠던 것이 아닙니다. 위계질서 때문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자리매김은 있었습니다. 다만 여호수아는 단순히 모세를 따랐던 것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서 자신에게 전달된 말씀을 따랐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생생하게 느꼈다면 자신을 통해 아말렉과의 전쟁을 이기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모세를 통해서 전달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의 위계질서를 위해서 모세를 통해 주신 이 말씀을 따라 제가 전쟁터에서 하나님을 생생하게 의식하겠사오니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옵소서.’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바락 또한 이러한 태도를 보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모세가 한 일이란 선민이 하나님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것을 위해 율법을 받아 기록하고, 회막을 짓고, 레위인과 대제사장과 제사장을 세웠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생생하게 의식하고, 하나님을 마주보기 위한 일을 준비한 것입니다. 드보라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바락은 여호수아 같은 모습을 보이지 못합니다.
당시 여자는 전쟁과 가장 관계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자인 드보라를 통해서 전쟁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바락은 드보라의 말을 따라 기손 강으로 모입니다. 이에 시스라는 철 병거 구백 대를 끌고 기손 강으로 내려왔습니다. 기손 강은 건기에는 완전히 말라서 바닥이 드러나고 우기가 되면 급류가 흘렀습니다. 이때가 건기였기에 시스라는 철 병거 구백 대를 끌고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장을 보면 하나님이 폭우를 쏟으셨음을 찬양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폭우로 인해 무거운 철 병거 구백 대가 바닥에 박히는 바람에 시스라의 군대는 꼼짝할 수 없이 이스라엘군에 당합니다. 당시의 철 병거는 대체 불가능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철 병거가 함정이 되어서 바락은 덫에 걸린 짐승을 줍듯이 이들을 물리칩니다. 싸웠다기보다는 철 병거에 갇혀서 꼼짝 못 하는 적들을 쳐서 승리를 주웠던 것입니다.
한편, 패배한 시스라는 도망하다가 화평 관계를 맺고 있는 헤벨의 집에 도달합니다. 이때 헤벨의 아내 야엘은 피곤한 시스라를 집에 들여 목을 축이고 쉬게 합니다. 그리고 시스라가 곯아떨어졌을 때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을 박아 죽입니다. 결과적으로 전쟁을 시작한 드보라는 여자였고 전쟁을 끝낸 야엘도 여자였습니다. 9절에서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라고 했던 드보라의 말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시작을 여자인 드보라가 했고, 전쟁을 끝내는 적장을 죽이고 영광을 얻은 것은 여자인 야엘이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18장 7절을 보면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라고 했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른 후에 이스라엘에서 유행했던 노래입니다. 다윗은 전쟁을 지휘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단 한 명 골리앗의 목을 쳤을 뿐입니다. 이처럼 적장의 목을 친 자가 승리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사울이 영광을 얻지 못했듯이 바락 또한 영광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락에게서 드러나는 전세살이 믿음의 한계입니다. 설령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참여하더라도 전세살이 믿음으로는 어떤 성과나 결과물도 그의 손을 통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세살이 믿음을 산다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더라도 그 결과는 나에게 주어질 수 없습니다. 일의 매듭을 짓거나, 영광의 결실을 얻거나, 승리를 쟁취하는 일이 결코 내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때 부득불 밀려서 하게 될 뿐, 나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셔서 나로부터 시작하는 일은 없게 됩니다. 이스라엘군을 이끈 것은 바락이었으나 전쟁은 드보라에 의해서 시작이 되고 야엘이 매듭을 짓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동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내 삶에서 해야 할 행동을 절대로 사람에게 묻지 않겠다. 삶의 문제를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이 생생하게 의식되지 않고 문제를 생생하게 의식하기 때문이다.’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문제를 생생하게 의식하는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생생해질 때까지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생생해졌는데 어떤 구체적인 지시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행동을 취해야 할 시간이 다가와서 어쩔 수 없이 무슨 행동을 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생생하게 의식된 상태에서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생각이나 감정과 의지 안으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이 알려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AI 시대를 살아갑니다. AI는 부려야 할 대상입니다. 지시를 따라야 할 상전으로 모셔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AI는 내가 하나님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알려줄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십자가 생활화를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인데, 십자가 생활화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가르쳐 줄래?’라고 물어본다면 그에 대한 정보를 줄 수는 있습니다. 그 정보를 받고 내가 이만큼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것을 알았다면 하나님과 실시간 연결을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 일이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도록 AI가 정보를 가져다줄 수는 있습니다. 다만 AI에 묻고 행동하거나 다른 신령해 보이는 사람에게 묻고 행동하려는 것은 전세살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끌어가실 때 제일 기가 막혀 하시고 제일 허탈해하시는 것이 전세살이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의 홀로서기를 위해 하나님께서 이만큼 환경을 조성해 주시고 도우미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삶의 현장에서 나 홀로 하나님을 마주하여 하나님과 함께 가는 진정한 선민의 모습을 매 순간 보여드릴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