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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막집 모습. 지붕 위 환기구가 눈길을 끈다. |
- '소바우 마을' 우암동
- 일본으로 소 반출되기전
- 검역·관리위해 지은 소막에
- 귀환동포 피란민 이주민
- 슬라브집으로 고쳐 정착
- 소막집 원형갖춘 소막마을
- '水源' 산복동네 산수도마을
- 수용소였던 나래비집마을
- 다닥다닥 좁은 골목마다
- 근현대사의 흔적 숨쉰다
버스를 타고 끄덕끄덕 우암동으로 간다. 우암동은 '소바우 마을.' 한때 소가 편안하게 누운 형상의 바위가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인들은 '땅이 붉다'하여 우암동을 붉은 반도, '적기(赤崎·아카사키)'라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이 붉은 땅을 나침반 삼아 조선을 침략하기도 했다.
'우암동 부산은행' 정류소에 내려 우암2동 새마을금고 쪽 우암번영로를 따라 오른다. 슬라브 건물들 사이로 'ㅅ' 자 지붕의 단층집이 몇 채 보인다. 어떤 집은 지붕을 중심으로 반쪽만 남아있는 비정상적인 구조다.
이 집들이 일제강점기 때 전국의 소를 모아 일정 기간 검역·관리했던 '소막(牛舍)'들이다. 당시 소막의 지붕이나 환기구 등이 그대로 남아있어, 소막 구조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근대사 자료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는 해마다 많은 수의 조선 소를 일본으로 반출해 갔는데, 1909년에는 이들 소에 대한 검역사무를 보는 이출우검역소(移出牛檢疫所)를 우암동에 둔다. 1930년만 해도 연간 최대 5만여 마리의 양질의 소가 헐값에 일본으로 갔다. 조선의 소 70%가 이곳을 거쳐 반출된 것이다. 때문에 우암동은 소막과 더불어 검역소, 소 화장터 등 소와 관련한 여러 시설이 있던 곳이다. 소막은 1동을 2칸으로 나누어 한 칸에 60여 마리를 수용했는데, 이 소막이 19개 동이 있었다.
■"소막마을 연탄집으로 오라 하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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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우암동의 소막집. |
광복 후 일본에서 온 귀환동포가 부산으로 몰려들자, 이들을 임시로 소막에 수용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소막의 3~5평을 얻어 집단으로 터전을 잡은 것이 바로 '소막마을'이다. 소막마을 골목을 거닌다. 골목은 1~1.5m로 좁다. 전깃줄이 얼기설기 얽혀있고, 집집마다 소막집 입구를 달아내어 마당과 작은 방, 연탄창고 등을 들여앉혔다. 소막집의 원형을 제대로 간직한 조성환 씨 집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방 한 칸에 부엌 하나, 천정을 막아 다락방을 만들었다. 지붕 위 환기구는 다락방의 들창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불도 자주 나고, 지붕에 비도 새고, 참 힘들었던 나날이었어요. 그래도 허름하나마 이곳에 내 집을 갖게 되고, 자식 5남매 건강하게 키워냈으니 여한은 없어요."
이곳에는 아직도 마을 곳곳에 공동화장실이 있다. 집이 좁아 화장실을 집 안에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자체가 관리하면서 무료로 사용하지만, 오래전에는 개인업자가 돈을 받고 운영하던 유료화장실들이었다.
소막마을의 유일한 연탄가게 앞. 가게 이름도 변변히 없어 그냥 '연탄집'으로 통한다. 가게 앞에 상수리나무 열매를 가득 부려놓았다. 일명 '꿀밤'이라는 도토리 종류다. 연탄집 부부가 도토리묵을 쑤기 위해 열매를 다듬고 있다. 도토리가 잘 익어 토실토실하다. 이놈들로 쑨 도토리묵이 때깔도 곱다.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보니 탱글탱글하다. 한 덩이 덥석 사서 들고 "묵 소개할라먼 어째야 되능교?" 물으니 안주인이 농담조로 "소막마을 연탄집으로 오라 하이소. 여기서는 그라면 다 압니다. 연탄가게를 40년밖에 안 했으이…."
우암동에서 문현동으로 오르는 고갯길이 장고개. 한때 우암동 사람들이 부산진시장으로 장을 보러 갈 때 오르는 길이었다. '장고개로'로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솔밭로'가 나온다. 솔밭로 따라 '도시숲' 공원으로 오르는 길. 이 일대가 '산수도(山水道) 마을'이다.
우암동 산복동네인 산수도 마을은 마주 보이는 '똥 산만디' 언덕과 더불어 대표적인 피란민 정착촌. 수백 기의 무연고 분묘가 산재해 있던 공동묘지 마을이었다. 현재는 정상부에 도시숲 공원이 들어서 우암동과 부산항 8부두가 시원하게 조망되는 휴식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산수도 마을은 턱없이 부족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사설로 설비한 대나무 상수도의 수원이 있던 곳이다. 한국전쟁 시기에 이북 피란민들이 피란지에서 시작한 사업 중에 하나가 댓물장사. 수원이 풍부한 산에서 대나무 관을 이용해 물을 끌어다 팔았다. 영도 봉래산 주변과 서구 아미동 일대, 우암동 산수도마을 등지가 대표적이다.
■달상회란 이름에 숨은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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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암동 '연탄집' 부부가 묵을 만들려고 도토리를 다듬고 있다. |
산수도 마을 솔밭로 34번길에 있는 '달상회' 앞에 선다. 부산항 전체가 시원하게 보이고, 북항대교와 영도가 눈앞에 다가온다. 마을 아래 소막마을 주변과 맞은편 '똥 산만디' 언덕의 주택들도 빽빽하게 들어앉았다.
마을 구멍가게인 달상회 평상에 걸터앉는다. 달상회 주인 부부가 반가이 맞이한다. "밤이면 달이 휘영청 떠올라 밤새 교교한 달빛이 아름다워요. 그래서 달상회라 이름 붙였지요." 벌써 30년이 훌쩍 지나고서도 구멍가게를 지키는 부부는 모두 우암동에서 나서 자란 우암동 토박이. 남편의 이름은 이무부, 아내 이름은 전기출. 부부의 이름이 특이하다. 이들 이름에 일행이 빙긋이 웃자 안주인이 눈치를 채고는 "나는 별명이 전깃줄이고요, 남편 별명은 이두부예요. 그래서 별명을 대면 우리 이름은 안 잊어버리데요"라며 수줍은 웃는다.
경치 좋은 평상에서 막걸리 한 병 시키자 "안주할 게 별로 없는데…"하더니 이웃과 심심파적으로 지져먹던 감자전 3장을 공짜로 내놓는다. 참 소박하고 격의 없는 분들이다.
우암동 '7부두' 정류소에서 동항로로 오르다 보면 '적기피난민수용소'가 있던 마을로 접어든다. 수용소 마을은 소막마을 서쪽에 있다. 한국전쟁 당시 1만여 명의 피란민을 수용하기 위해, 미군이 20~30m 길이 건물 40여 동을 지어 임시거처를 만들어 준 곳. 한 가구당 네댓 평 규모의 쪽방에 기거했는데 수용소 건물이 일렬로 줄을 서듯 도열해 있다 하여 일본식 표현으로 '나래비집'이라 불렀다. '건물이 나래비로 섰다'하여 '수용소 나래비집'이라 불렸던 것. 수용소 건물이 쪽방으로 길게 이어진 것이 하모니카를 닮았다 하여 '하모니카집'으로도 불렀다. 한 동에 열 가구 내외의 집이 빼곡하게 이웃하여 있는데, 동과 동 사이는 간신히 지나다닐 정도의 골목을 두고 있다.
■재생과 보존 시작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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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수동 마을에서 본 우암동 전경. 사진 나여경 제공 |
나래비집에 앉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한은숙 할머니 집을 찾았다. 다른 집보다 큰 9평짜리 집이란다. 실내는 단출하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 천장을 나누어 다락을 들여앉혔다. "당시 2000원 남짓 주고 불하받았는데, 이곳에서 남편과 4남매 총 6식구가 살았어요. 지금은 남편과 사별하고, 자녀들은 출가하여 늙은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지요." 부엌 옆 작은 공간에는 문도 없는 양변기 화장실을 만들어놓았다. "다리가 아파서 공중화장실을 사용할 수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 자식들이 어미를 위해 만들어줬어요." 그의 눈가에 흐뭇한 미소가 살포시 번진다.
우암동. 귀환동포와 피란민, 산업화 시절의 이주민이 혼재하여 살붙이처럼 붙어살았던 곳. 부산 근현대사의 쓰리고 아픈 흔적이 아직까지 문신처럼 아로새겨져 오롯이 보존되고 있는 곳. 그렇기에 더욱 애착이 가고 관심이 필요한 '부산의 속살' 같은 곳이 우암동이다. 하여 주민복지 향상과 함께 도시재생사업의 빠른 실행으로, 적절한 마을 보존대책을 적극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점이겠다.
☞우암동으로 가려면 부산역 쪽에서 26번과 134번, 서면 쪽에서 25번과 68번 버스를 타고 우암동 부산은행 정류소에서 내리면 된다. 여유가 되면 우암 구시장에 있는 대한민국 최초 밀면집 '내호냉면'에서 밀면 한 그릇 시원하게 들이켜도 좋겠다. 이곳 건물들의 특징인, 아래층보다 위층이 더 넓고 큰 '가분수 집'들도 유심히 살펴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