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 교회 10주년 기념 책자를 발행 하는 해, 제 나이 73세에 즈음하여 우리 교회에 입문하게 되었던 계기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몇자 적어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경상도에 고추가 유명한 영양이란 산골 마을입니다.
잘 살지는 못했지만 농사를 주업으로 머슴들을 두고 있던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유교사상에 대대로 불교집안에서 자라서 성장하였고 군대를 마친 후 농사일이 싫어서 무작정 객지로 다녔었는데
설 명절에 집에 가니 노총각이니 결혼을 해야 된다면서 선을 주선하여 반 강제로 결혼을 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일날이 되니 아내가 주일날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간다고 하는겁니다.
울고 불고 난리가 났지만 시집에 왔으면 시댁을 따라야 한다면서 교회를 못다니게 했습니다.
그렇게 생활을 하면서 시준, 경숙, 경희, 시백 4남매를 낳았는데 다 잘 자라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퇴근해서 집에 와보니 아내의 눈이 풀리고 빨게져서 위험해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아내가 영등포 한강 성심병원에 막내 예방접종을 위하여 다녀오는 길에 버스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화곡동 성심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급한 대로 열은 내리고 해서 퇴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교통사고 후유증이 그렇게 심각한지 몰랐습니다.
현장에 있을때 또 위중하다는 연락이 와서 처형의 도움을 받아 여의도 성모 병원에 다시 아내가 입원을 했습니다.
보상을 받으려 버스 회사에 찾아가 다방면으로 알아보았지만 사고를 증명할 길이 없어서 꼼짝 없이 자비로 치료를 받았는데 당시에 의료보험도 없을 때라 매주 삼사백만원씩 나왔습니다.
아내는 혼수상태에 빠져서 사경을 헤매는데 무려 11년 6개월이라는 세월을 병원에서 보내고 엄청난 치료비가 나왔지만 죽으란 법은 없는지 그래도 그 돈이 다 충당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아내에게 이제까지 내 고집만 부리면서 살았는데 당신 소원 딱 한가지만 들어 준다고 하니 말 끝나기도 전에 그러면 집에 가서 싱크대가 있는 봉창문을 열어 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녁에 가서 열어보니 아무것도 안보이고 십자가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본 대로 얘기 했더니 그것이 바로 내 소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날로 어머니와 교회에 가기로 약속을 하고 방화동 소재 금성교회에 입문하여 다녔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제가 몸이 안좋아서 동네 의원을 찾아가 목디스크 침을 맞았는데 전신 마비가 왔습니다.
가족들의 급한 조치로 일산 명지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니던 교회는 성도가 팔백명 정도 규모의 교회여서 병원예배를 드리기는 하였지만 얼굴을 자주 볼 수는 없었는데 큰 아들 다니는 교회는 목사님들이 네분이나 찾아와서 같이 예배를 드려 주시고 자주 찾아와서 기도도 해주셔서 제가 너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기도 덕분에 몸이 백프로 나아서 퇴원하였기에 지금까지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퇴원 후 인사차 교회에 들렸습니다. 목사님이 네분이나 계셔서 아주 큰 교회인 줄 알았는데 교회가 막 시작했던 때인지라 성도님들도 적고해서 목사님들이 어떻게 생활하시는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일이 계기가 되어 제가 지금까지 우리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아내가 비록 몸이 아파 교회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늘 기도했기에 병원비도 감당할 수 있었고, 자녀들도 잘 성장하게 되었으며, 청지기교회에 나와서 감사함을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가 지금도 천국에서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온 식구가 교회에 나오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인도요, 제가 철퇴를 맞게 된것도 그리고 이어서 건강하게 해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우리 청지기 교회에서 맡겨주신 집사 직분에 맞는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허락하시고 간구하는 소원에 응답하셔서 맡겨주신 사명 다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