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동네 토박이 눈빛이 순한 나의 이웃 순옥씨 부부는 부산 해운대구 우동의 토박이들이다. 우리는 동해남부선 기차가 베란다 창문 아래로 지나가는 철길 옆 아파트에서 산다. 차를 마시거나 수다를 떨고 싶을 때, 나는 봉지커피나 포도 등을 챙겨 위층 사는 순옥씨에게 간다.
순옥씨네 거실 통유리 너머로 광안대교와 해운대의 푸른 바다가 끝 간 데 없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순옥씨와 나는 집 근처 동백섬을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거나 마친다.
순옥씨의 남편 원광씨는 해운대구 우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원광씨 어렸을 때만 해도 이 일대는 '똥골동네'라고 불리던 빈촌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북쪽에서 온 피난민들이었다. 철길 옆 도로 너머가 죄다 바다였고, 마을사람들은 공동화장실 앞에서 아침부터 긴 줄을 섰다. 옆 동네 아이들이 똥골, 똥골, 하고 놀려댔다. '누나 있냐? 누나 있어?' 군부대 근처를 지날 때면 군인들이 건빵 봉지를 미끼삼아 동네 아이들에게 물었다.
집 인근에도 공유수면 매립이 시작되었다
바다가 있던 자리에 도로·아파트·고층빌딩이 들어섰고
해녀들은 2005년 APEC 준비 중 '정리'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원광씨는 해운대 바닷가에서 '아이스께끼' 장수를 했다. 빈병을 주워다 팔고 옆 동네로 가 신문을 돌렸다. 그래도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학교에서 집으로 되돌려 보내지던 날이 많았다. 그런 날이면 논밭 사이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빽빽이' 대나무 피리를 불며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1960년대 중반, 원광씨 집 인근에도 공유수면(公有水面) 매립이 시작되었다. 바다가 있던 자리에 거짓말처럼 도로와 아파트가 생겨났고, 해안선을 따라 하나 둘씩 고층빌딩이 들어섰다.
원광씨가 살던 '똥골동네'도 재건축 사업이 시작되었다. 옛집이 있던 터전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원광씨는 요즘 해운대구 우동 지구대에서 근무한다. 경찰로 복무한 지도 벌써 28년째가 되었다. 어린 시절 '아이스께끼'를 팔던 해운대해수욕장으로 올해에도 '여름 경찰서' 파견근무를 나갔다. 취객을 달래고, 미아를 찾아주고, 송림공원에서 자살을 기도하려던 시민을 구하기도 했다.
오늘 하루가 행복하고 소중하다고, 우리 동네 터줏대감 순옥씨와 원광씨가 웃으며 말한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동백섬 산책로와 해변의 모래무늬를 바라보면 너무 아름다워서, 신(神)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절로 알게 된다고 한다.
· 동백섬 지킴이
올해 나이 쉰일곱의 김창원 아저씨도 해운대구 우동 철길 옆에서 산다. 하지만 나는 그를 집 근처에서가 아니라 동백섬에서 참 많이도 마주쳤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 무렵, 산책로를 걷는 내게 그는 한눈에도 번쩍 뜨이는 인물이었다. 아니, 맨 처음 눈길을 끈 건 그가 아니라, 그의 냉차 리어카였다. 1960년대 풍의 낡고 허름한 냉차 리어카는 주말이 되면 조선호텔과 동백섬 동쪽 바닷가 사이 해안산책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급 호텔과 화려한 차림의 피서객들 사이에서 냉차 리어카는 어쩐지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신기루처럼 보였다.
냉차 리어카 전면에 커다랗고 삐뚜름한 글귀가 나붙어 있다. '공원 출입시 개줄을 묶어 주세요.' '바위나 벤치에 낙서하지 맙시다.' '오늘 하루도 즐거운 하루가 되세요.' 또 이런 구절도 있다. '부모님 생전에 효도하세요.'
아저씨는 지난 20년 동안 자원봉사로 동백섬 안팎과 갯바위를 청소해 왔다. 왜냐고 여쭤보니 "하도 더러바서"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해수욕장 개장 시즌이 되면 하루 백만 인파가 몰리고, 동백섬을 찾는 관광객 역시 날마다 수천 명에 이르는 것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기는 쓰레기만 안 버리면 진짜 좋은 곳이라. 아침에 5시쯤 나와 보면, 요 앞 여기가 다 난장판인기라. 하도 더러바서, 여기 앞 바위하고 동백섬 안에까지 들어가 쓰레기를 줍게 됐지."
냉커피와 생수는 요금이 각각 1천원씩이다. 해수욕장이 개장하면 주말에만 리어카를 끌고 와 오후 2시나 3시 무렵까지 장사를 한다. 하루 매상은 2만원에서 3만원 사이. 그래도 아저씨는 "머, 충분하지" 하며 웃는다.
"기초생활수급자로 30만원 받고, 4급 장애인 수당 3만원 받고. 33만원에 여기 매상 2, 3만원까지. 혼자 살기에는 머, 충분하지."
아저씨는 동백섬 인근에서 청춘시절을 다 보냈다. 가장 좋았던 때는 동백섬 동쪽 갯바위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해녀들이 해산물을 팔던 시절이었다. 그녀들을 위해 날마다 파라솔을 펴주고 의자를 날라다주고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해주었다. 그리고 밥도 얻어먹고 잔돈푼도 받았다.
멀리 제주도에서 온 해녀도 있었고 남녘 바닷가에서 온 해녀도 있었다. 30여 년 동안 해산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해녀들은 2005년 APEC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주변 환경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정리'되었다.
이른 아침, 동백섬 산책로나 갯바위 근처에서 쓰레기를 줍는 한 아저씨를 만나거든 소리 높여 인사를 건네도 좋다.자비를 들여 일부러 주문 제작한 '공원관리:해운대구'라는 흰 글씨가 박힌 청색 모자를 발견한다면, 반갑게 손을 흔들어도 괜찮다. "더러븐" 세상을 정화하고픈 마음으로 동백섬을 수호하는 그는, 당신과 나의 든든한 지킴이이니까.
· A형에 가까운 B형 주민 안녕하세요? 저는 동백섬에서 자주 산책과 운동을 즐기는 우1동 주민입니다. 요즘 아침저녁으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백섬을 찾고 있어요.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지만 어떤 날엔 출퇴근길 지하철 출입구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연상시킬 만큼 산책로가 혼잡해 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저는 깜짝 놀랄만한 일을 목격했습니다. 승합차 한 대가 차량 방지턱을 치운 뒤 산책로 안으로 질주해 들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물결이 갈라지듯 사람들이 도로 양편으로 쫘악 흩어졌습니다. 곧이어 대여섯 대의 자가용과 승합차들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산책로 오른편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도 깜짝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아니 저건 뭘까. 순간, 뒷목덜미에서부터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더군요. 참고로, 평소 주변 사람들은 저를 A형 여자로 알고 있습니다. 말수가 적은 편이고 사소한 일에 연연해하는 소심녀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실 저는 B형 여자랍니다. 때로 생각보다 말이나 행동이 앞서고, 기분파에다가 화끈한 성질머리, 왜 있잖습니까.
암튼 그 순간, 저의 B형 기질이 분출했습니다. 저는 앞서가는 승합차 꽁무니를 쫓아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동백섬 순환도로에서 갈고닦은 조깅 실력이 십분 발휘되었지요. 승합차는 곧 멈추더군요. 최치원 동상과 시비가 있는 체육공원 입구에서 차가 멈췄습니다.
승합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한복으로 성장한 여인들과 양복 입은 신사 분들이었습니다. 어디서 나오셨어요? 운동복 차림에 야구 모자를 쓴 제가 물었어요. 문화축제 행사가 있어서 해운대구 관광문화과에서 나왔다고 하더군요.
에이, 거짓말이시죠? 요즘 공무원들 한복 입고 공무집행한단 얘긴 못 들었는데….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아니 산책로 안에서 차를, 더구나 그렇게 빨리 몰면 어쩌느냐, 애써 쿨한 목소리로 항의했습니다.
이리와 봐, 너 이름이 뭐야?
할 수 없이 동백섬 입구로 터덜터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도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있더군요. 한 아주머니가 산책로 안으로 진입하려는 자가용 운전자에게 내려서 걸어가라고 충고했고, 중년의 남자 운전자가 아주머니를 향해 소리 질렀습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갑작스런 소란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운동복 차림의 한 아저씨는 휴대전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항의했습니다.
각종 문화축제 행사들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줄 잘 압니다. 무거운 장비나 짐은 차를 이용해 운반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산책로 안에서 차량운행은 최대한 줄이고, 참석자는 차에서 내려 도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시민들의 안전도 고려해 주세요. 부디.
-'A형에 가까운 B형 주민'이 구청 홈페이지에 남긴 글
· 그리움을 품은 사람들 동백섬에는 그리움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많다. 달이 뜨는 밤, 당신은 갯바위에 촛불을 켜놓고 두 손을 합장하며 소원을 빈다. 누군가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과일이나 떡 조각으로 바위틈에서 함부로 나뒹굴기도 한다. 당신은 해안가 벤치에 홀로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기도 한다. 둘이나 셋이서 함께 온 날이면 다함께 바위에 올라앉아 먼 바다를 응시한다. 그럴 때 당신의 눈빛은 고즈넉하다.
동백섬 동쪽 바닷가에 황옥공주의 청동 인어상이 있다. 보름달이 뜨는 밤, 공주는 떠나온 고국을 황옥구슬에 비춰보고 그리운 마음을 달랬다 한다. 신라 학자 최치원의 애달픈 마음도 동백섬에 남아있다. '쓸쓸한 가을바람 애닯은 노래/ 세상엔 날 알아주는 이 없고.' 속세를 떠나 입산 길에 오르던 그는 이곳에 대(臺)를 쌓고 아호인 해운(海雲)을 음각하여 '해운대'라는 명칭과 석각을 남겼다.
산책로를 걷는 마음이 어느새 고요해진다. 외국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다음 날,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난 곳도 이곳 산책로에서였다.
그날, 아버지와 얼굴이 닮은 수많은 아버지들을 산책로에서 만났고, 내 가슴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오늘도 나는 아파트를 빠져나와 운촌 삼거리를 지나 동백길 도로를 걷는다. 동백 삼거리에 이르자 사방으로 뻗은 도로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모두 어디서 한 번쯤 본 듯한 얼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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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은 덕 소설가 |
◇약력=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소설집 '한국어 수업'. 현재 부산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