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말리는 변호사라고?
- 프리미엄 글쓰기 2기 과제 2 (2014. 10. 1.)
권성희
변호사 된 지 올해로 딱 25년째, 내가 처음부터 이혼을 말린 건 아니었다. 1994년에 결혼을 하기까지 여러 해 동안 미혼의 변호사였던 나는 누구보다 극성맞게 이혼소송에 열심이었다. 배우자가 외도를 했다고 하면 당사자보다 더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고객이 폭행을 당했다고 하면 ‘한찰 아니라 반찰이라도 이혼사유’라며 ‘이런 인간과는 미래가 없다’며 방방 떴었다. 변호사 된지 3년 차이던 해 이런 일도 있었다. 남편이 수 년 동안 외도를 하더니 급기야 씨앗까지 본 사건이었다. 연세 지긋하신 조정위원들과 더불어 조정을 하는데 한 조정위원이 집안의 맏며느리였던 고객에게 ‘이혼하고나면 죽어서 제사를 누구에게 얻어먹으려느냐? 위자료와 재산분할을 구하시는데 차라리 그 돈을 젊은 여자와 아이에게 주고 떼어내 버려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고리타분한 말을 들어야하지? ‘돈을 그 여자에게 받아도 마땅치 않은데 왜 주느냐? 그 여자가 한 푼이라도 보탠 줄 아느냐? 여직 몰래 갖다 준 생활비가 얼마인데’라며 조정위원에게 항의를 하였다. 그러자 조정위원은 나보고 ‘미혼의 변호사는 빠지라.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인생을 모른다.’라고 하는 것이었고 기가 찬 내가 한바탕 대들자 재판장은 연세 드신 조정위원을 배려하여 젊은 나를 조정실에서 쫒아냈다. 후에 재판장으로부터 다른 자리에서 사과를 받긴 하였으나 그 때의 충격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위 고객은 위자료와 재산분할을 받아 이혼을 했음은 물론이다.
결혼을 하고 난 후에도 꽤 오랫동안 여전히 형식적으로 이혼소송을 처리했던 것 같다. 고객이 이혼해야할지 여부를 헷깔려하면 “저는 부부상담사가 아니니 이혼을 결정한 후 오시죠.”라고 하고 돌려보냈고, 이혼사유가 성립되어서 사건을 의뢰하면 아무런 감정없이 기계적으로 소송을 처리했다. 여전히 폭행이나 외도, 생활 무능력 등의 이혼사유에 당사자보다 더욱 흥분해가며 말이다.
그랬던 내가 이혼에 대한 생각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예전의 이혼 고객들을 다시 만나면서부터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혼 후에 내 생활이 이럴 줄 몰랐다’며 후회를 했고, 후회를 하지 않는 경우에도 여전히 과거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사는 경우가 많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하던 상태에서 배우자의 학대나 외도로 이혼을 한 경우에 이혼 후의 빈곤으로 인한 고통이 이혼 전의 감정적 고통 못 지 않은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고, 경제적 곤란이 문제되지 않는 경우에도 재혼이 쉽지 않거나 용케 재혼을 한 후에도 재혼가족과의 화합이 쉽지 않거나 하여 정서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위 이혼 고객도 약 15년 만에 우연히 만났다. 이혼 3년 후 전남편이 술에 취해 찾아왔더라는 데 얼굴에 침을 뱉어주었노라고 하시는 모습이 그 말을 하는 당시에도 살기가 등등했다. 이혼 후 전남편은 재산을 다 날렸고 간암으로 겨우 5년 후에 죽었단다. 그녀는 자녀들과 일체 연락이 끊어져있었고, 분할 받았던 재산도 여기저기 절에 다 시주한 채 한 절의 밥 짓는 보살로 지내고 있었다. 밥 짓는 보살이라고 하여 어찌 그녀의 인생이 실패라고 할 수 있겠느냐 만은 십수년 후에도 여전한 남편에 대한 증오는 놀라운 것이었고 이와 같이 과거에 얽매여 사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볼 때 과연 당시 늙은 조정위원들은 젊은 내가 모르는 인생의 지혜가 있었던가 내내 궁금했다. 그 무렵 이혼 후 후회하는 사람들의 비율에 대한 통계를 어디선가 읽었는데 무려 85퍼센트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대략 이 때부터 이혼 후의 사람들의 복지에 대해 관심이 생긴 듯하다. 그 결과 이혼상담을 하거나 이혼소송을 할 때 결혼생활이 현재 고통스럽다고 하여 당장 목전에서 이혼이란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시각에서 벗어나 인생 전체를 놓고 현재의 이혼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시각으로 사건을 대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의식만 있었을 뿐 부부 갈등의 해결방법이나 이혼 후의 생활에 대한 깊은 지식은 갖추지 못 한 채였다.
본격적으로 이혼을 말린(?) 것은 내 개인적인 체험이 중첩되고 나서였다. 결혼 전부터 이혼소송을 많이 한 경험에 기초하여 나름 내게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고른다고 골라 결혼하였음에도 결혼 십년 차에 나는 아파죽을 정도로 불화가 심했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더니 다른 사람의 결혼생활을 조명해주면서도 나 자신의 불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인의 중재, 부부 상담 등 많은 시도가 다 실패로 돌아간 후 마침내 협의이혼을 하기로 하였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부모가 이혼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리자 아직 어린 둘째가 내 목을 안고 얼마나 울던지. 아이를 안고 함께 우는데 의식 한 켠으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비켜갔다. 그 날 밤 당장 예전 이혼 고객 중 가까왔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혼 후의 생활에 대해 취재(?)를 했다. 우선 그들 대부분이 이혼반대론자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이혼을 하였다보니 주위 사람들이 이혼에 대해 의논을 해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는데 일일이 다 말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이혼 당시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이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을 심층적으로 만나고 나니 더 이상은 만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해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또한 나의 성격과 남편의 성격을 기초로 미래를 예상해보니 대략 어떤 식으로 이혼 후의 상황이 흘러갈지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과정에서 아이들이 입을 상처는 상상만으로도 가혹했다. 길은 명확해졌다. 하지만 이혼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여 극도의 불화상태로 살 수는 없는 일이니 갈등을 해결할 길을 찾아야 했다.
이후 한 서점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혼, 결혼 혹은 부부갈등 등의 단어를 검색하여 뜨는 책들은 다 사서 본 듯하다. 책에서 발견한 이론을 내 결혼생활에 적용해가며 시행착오를 거듭한 지 여러 해가 지났고 마침내 부부의 화해를 이룰 수 있었다. 현재 나의 결혼생활은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더불어 결혼생활의 행복을 누리는 매일매일 나 자신이 매우 자랑스럽다. 이 행복온 오로지 나의 힘으로 만든 것을 알기에. 물론 남편도 고맙기 그지 없다. 내가 아무리 뒤늦은 노력을 하였어도 그가 진즉에 떠나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이혼상담이나 이혼소송을 하면 커플의 문제점이나 해결방향등이 분명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니 기회를 봐서 수시로 당사자가 미처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듯 한 부분을 일깨워주려 노력하게 된다. 이를 두고 ‘이혼말리는 변호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엄밀히 말해 ‘이혼을 말린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을 살 수 있을 뿐이고 각자의 인생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기에 내가 누구라고 감히 이혼을 말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소위 이혼을 말릴 때는 이미 당사자가 오랜 기간 입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 되지 않게 유의해야 한다. 엄격히 말해 이혼을 말린다 라기보다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넌다는 심정으로 사람들이 놓치고 있을 지도 모르는 부분을 마지막으로 한 번 같이 점검한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가끔 이혼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할 일이 무척 많아진다. 함께 책을 읽기도 하고 나의 경험이나 기왕의 성공사례를 나누며 해당 당사자의 구체적인 갈 길을 추론해내어 실천할 수 있도록 독려한다. 여러 노력 끝에 당사자가 길을 발견하여 이전보다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기쁨은 비할 데가 없다. 이상이 ‘이혼말리는 변호사’라는 나의 별칭에 대한 변이다.
첫댓글 와우~ 멋지세요.^^ 스마트폰으로 전철에서 보는데도, 귀에 쏙쏙 들어 오는데요. 제가 변호사님을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요? 저는 아니겠죠^^;; 왜냐하면 전 지금이 너무 행복하거든요. 85%에 들어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죠. 낼 뵙겠습니다. 아참, 모레군요.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네. 사람마다 다 다르지요. 선례씨는 운좋게 빨리 잘 끝내신거죠. 일단 이혼은 하면 두 번 다시 뒤돌아보면 안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