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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늘 하진의 표정은 우울하다 못해 만성병 환자 같았다. 수근은 자신이 군고구마장수라는 사실도 잊고 마치 그녀의 후견인인 것처럼 걱정하며 그녀의 기색만 살폈다. 하진은 “안녕하세요?”하고 판에 박은 인사를 하고 나서 고구마통 옆으로 와서 큰 눈알을 굴리며 서성거렸다. 시선은 해수욕장 입구 쪽만 주시하고 있었다. 까만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갔지만 판사님의 승용차는 아니었다.
수근은 보관통에 넣어 둔 군고구마를 두 개 꺼내어 종이봉지 위에 얹어 하진의 앞 의자에 놓았다. 고구마는 마치 먹기 좋게 식어 있었다. 하진은 군고구마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 식사를 굶었는지 눈자위가 거무스름하게 움푹 꺼져 있었다. 큰 눈이 더 커 보였다. 오늘은 이야기도 조잘조잘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하모니카를 불어 달라고 졸랐다. 수근은 그가 늘 지참하고 다니는 독일제 크로매틱 하모니카를 꺼내어 조그맣게 들려 주었다. ‘진주 조개잡이’였다. 크로매틱 하모니카는 트레몰로 하모니카와 달리 음이 단조로운 반면에 반음을 연주할 수 있어 정확한 음을 연주할 때는 그 악기를 사용했다.
하모니카 소리가 청아하게 겨울 해변 가로 퍼져 갔다. 하진은 두 눈을 지긋이 감고 하모니카 소리에 도취했다. 하진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속눈썹에 이슬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려서 수근은 하모니카를 불다 말고 핸드폰 전화를 받았다. 딸아이의 전화였다.
“아빠! 할머니가 막 때렸어!”
아이의 카랑한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수근은 부끄러워서 얼른 송림으로 걸어가서 전화를 받았다.
“너 또 할머니 말씀 안 들었구나. 네가 못된 짓을 하니까 할머니가 매를 때리는 거야. 네가 미워서 때리는 게 아니고 사랑의 매다, 사랑의 매. 알겠니?”
“못된 짓 하지 않았어.”
“못된 짓을 하니까 매를 맞지 착하게 얌전히 있는 널 때리겠니?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어서 전화 끊어. 그리고 다시는 아빠에게 꼬아바치는 짓 하지 마라. 그건 비겁한 짓이야.”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아빠와 더 얘기할래.”
“이 녀석, 공중전화에서 전화하고 있구나. 괜히 전화하고 싶으니까 그러는 거지?”
“키킥! 그래요. 나 지금 경포대 해수욕장으로 놀러가도 돼?”
“아빠는 돈 벌고 있어 임마. 너하고 놀 시간도 없고, 멀어서 너 혼자 여기에 못 온다. 어서 전화 끊고 공부 열심히 잘 해라. 다음에 아빠가 인형 사 갖고 갈 테니까. 착하지 우리 별이.”
“싫어, 아빠한테 갈 테야. 터미널에 가서 강릉 가는 버스 타면 되지. 나도 버스 탈 수 있단 말이야..”
“안 돼! 오기만 해 봐라. 혼을 낼 테니까!”
수근은 전화를 끊고 불그레 상기된 얼굴로 자기 자리로 왔다. 하진은 하모니카의 레버를 움직이며 엉터리로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레버를 밀면 반음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나도 하모니카를 배웠으면……”
“어렵지 않습니다. 나도 어렸을 때 배웠어요. (케이스에서 다른 하모니카를 꺼내 보이며)이게 트레몰로 에이장조 하모니카인데 시장조보다 부드러워서 숨이 안 찹니다. 슬픈 노래를 연주할 때 제격이죠. 그냥 도, 미, 솔, 도는 불고 레, 파. 라, 시는 들이쉬면 됩니다. 이걸 드리겠습니다.”
“애장품을 제게 주시면 어떡해요?”
“저는 하모니카가 많습니다. 이런 독일제는 귀하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어머나, 감사해라! 이 귀한 것을……”
6
하진은 수근이 준 예쁜 독일제 하모니카를 소중히 핸드백에 담았다. 고구마통에서 고구마 타는 냄새가 살포시 풍기기 시작했다. 수근은 원통을 열고 약간 탄 고구마를 버리지 않고 뒤편 보관통에 옮겨 담았다. 종이봉지 위에 놓인 군고구마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천원어치 채워 주세요.”
“그건 제가 드리는 겁니다. 장사도 잘 안 되고, 인심이나 쓰렵니다. 군고구마를 별로 안 좋아하신 줄 알지만.”
“어렸을 때 밥이었는데 맛없어서 안 먹겠어요? 주신 걸 다 먹겠어요. 아저씨가 주신 건 다 맛있어요. 특히 공짜는, 후훗!”
수근은 큰 놈 한 개를 더 꺼내어 함께 봉지에 담아 주었다. 하진은 만원짜리 한 장을 의자 위에 놓고 군고구마 봉지를 집어들었다. 거스름돈을 줘도 받지 않고 슬픈 얼굴로 해수욕장 입구 쪽만 바라보았다.
“호텔로 가십니까?”
하진은 살래살래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측컨대 그분은 안 오실 것 같은데요. 아침부터 기다리셨죠? 아침에 안 온 사람은 오후에도 안 오실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기다리겠어요.”
“호텔로 가서 잠이나 자면서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남의 일에 상관해서 미안합니다만 보기에 좀 딱해서……”
“신경 써 주시니 고마워요.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아요. 어젯밤도 뜬눈으로 지샜어요. 그를 만날 희망에 기분이 들떠서 비몽사몽하다 깼어요. 제가 나쁘죠? 제가 나쁜 년이에요. 제가 죄 받을 짓을 하고 있단 걸 잘 알아요. 정 때문이에요. 더러운 정. 그걸 뿌리치지 못하고 질질 끌려왔어요. 내가 바보 미친년이죠.”
“판사 부인이 돌아가시면 금방석에 앉을 텐데 무슨 걱정이에요? 따 논 당상 아닙니까? 거기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나 공주 같은 딸이라도 하나 낳으면 와따지요. 아가씨는 팔자를 고치는 겁니다. 제 말에 자존심이 상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저는 가난한 농군의 딸이에요. 공부를 하고 싶어 열 다섯 살에 집을 뛰쳐나와 독학으로 공부했어요. 그러나 대학은 높은 꿈이었어요. 시골의 아버지마저 병들어 눕자 장녀인 내가 가정을 돌봐야 했어요. 그래서 들어간 게 술집이었죠. 낮에 공부하고 밤에 돈 벌기는 술집처럼 좋은 곳이 없었어요. 한 언니의 소개로 강릉이란 곳을 오게 됐어요. 룸살롱에서 접대부로 일했죠. 깨끗이 살려고 했지만 현실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돈을 더 벌기 위해 매춘도 주저하지 않았어요. 그때 그 사람을 만났지요. 그분이 나를 부인으로 맞이해 준다고 약속했을 때 앞길이 트이는 것 같았어요. 미친 생각이죠. 아저씨도 저를 미친년이라고 생각하시죠?”
수근은 대답하지 않고 담배만 피웠다. 군고구마장사를 하면서 끽연은 손님들에게 비위생적이어서 담배를 끊으려고 했는데 기어이 그 버릇이 살아났다. 첫사랑을 닮은 아가씨가 행복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행복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낄 때 찾아오는 신의 선물이었다. 부끄럽고 미안한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그걸 느끼지 못하는 것도 행복이 아니라고 수근은 생각한다. 왜? 그는 아내를 갖는 게 불행하다고 생각돼서 미련 없이 헤어졌던 것이다. 아내가 먼저 헤어지기를 원했다. 딸은 서로 합의해서 그가 맡기로 했다.
그는 딸을 잃지 않은 걸 행복이라 생각한다. 아내에겐 자식을 버리는 게 편한 선택이었다. 헤어지면 두 사람 모두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엄마가 없는 건 아이에게 크나큰 상처로 남아 두 사람 모두 죄인이 되었다. 불행한 공범자들. 그는 아내 몫까지 더 괴로워해야 한다. 아마 그는 평생 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다.
아가씨는 백사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모래 위에 주저앉더니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군고구마를 씹고 있었다. 벗기지 않고 껍질째 씹고 있었다. 그녀는 두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학생 손님이 두 명 와서 군고구마 사천원 어치를 팔고, 장작을 새로 집어넣으려고 보니까 하진이 모래사장 위에 벌렁 누워 있었다. 하진의 몸 위로 은빛 비말이 부서졌다. 하진은 파도에 옷이 젖는 줄도 몰랐다.
담요라도 있으면 갖다가 덮어 주고 싶었다. 겨울 해변에서 쓰러져 자고 있는 여자. 정말 잠이 든 건지 누워서 울고 있는지, 죽은 듯이 꼼짝하지 않는 그녀가 걱정되어 살며시 사장으로 다가가 살폈더니 그녀는 울지 않고 있었다. 그의 발자국 소리에 돌아보더니,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고 군고구마장사란 걸 알고 실망한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저씨 말이 맞아요. 그는 오지 않아요. 제가 잘 알아요. 이제는 안 올 사람이란 걸 제가 잘 알아요. 제가 병신이에요. 왜 이렇게 정을 거역하지 못할까요? 남자는 잘도 거역하는데. 잘도 걷어차는데. 그게 정도라는데……”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7
오후 4시가 지나면서 해변에 쌀쌀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강풍은 아니고 동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이었다. 바다에는 어선 한 척도 보이지 않고 아득한 수평선만 길게 가로놓여 있었다. 그 넓은 바다에 고기잡이배가 없다니 이상했다. 굴 따는 아낙도 조개 잡는 처녀도 없는 망망대해. 그저 눈빛 파도만 끝없이 밀려오고 밀려오는 항구 아닌 바다.
쓸쓸한 해수욕장 바다를 보면 주문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어났다. 항구가 싫어서 고깃배가 보기 싫어서 훌훌 털고 떠나온 것이 이 모양이었다. 모아 둔 돈은 헤어진 아내에게 위자료로 다 바치고 낡은 한옥 한 채밖에 가진 게 없었다. 이상하게 아내와 헤어진 뒤로는 돈도 벌리지 않고 사고만 잇따랐다. 고깃배의 스쿠류에 그물과 함께 몸이 휘감겨 들어가서 죽을 고비도 겪었다. 그때 입은 부상으로 삼 년 간 집에서 놀아야 했다. 다시 어린 시절의 가난구덕 속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딸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는 딸을 위해 죽음의 바다로 들어가지 않고 뭍에서 새인생을 개척하려 했다. 지긋지긋한 어부 인생을 마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퍼덕거리는 생선의 비린내와 바다의 소금내가 아직 묻어 있었다. 이렇게 바닷가를 떠나지 못한 걸 보면 그 냄새가 좋은 모양이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고,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그에겐 뭍에서 하는 노동이나 장사가 취향에 맞질 않았다.
친구한테서는 가끔 전화가 왔다. 돈도 안 되는 군고구마장사 집어치우고 주문진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아까 딸한테서 온 전화는 주문진 집에서 온 전화였다. 딸의 전화가 온지 십 분도 안 되어 노모한테서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별이가 아빠한테 간다고 할머니 몰래 나가는 걸 붙잡아서 디지게 두들겨팼다”는 보고였다. 노모는 조그만 일도 아들에게 보고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한테 혼이 나기 때문이었다.
수근은 아빠가 군고구마장사 하는 걸 딸한테 보이지 않으려고 못 오게 하는데 딸은 한사코 오겠다고 한다. 딸도 아빠 닮아서 바다를 좋아한다. 경포대 해수욕장 구경시켜 달라고 딸이 졸라대도 고구마통을 보여 주기 싫어서 데리고 오지 않는다. 아빠가 군고구마장사 한단 걸 알고 영리한 딸이 고구마통을 기어이 보여 달라고 할 것 같아서.
자기 직업에 긍지를 갖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었다. 그의 직업은 군고구마장사가 아니었다. 그가 주문진을 머리에 떠올린 것은 퍼덕거리는 그 생선 비린내가 되살아나서였다. 경포대에서는 퍼덕거리는 생선의 비린내를 맡을 수 없었다.
(주문진으로 돌아가서 다시 고깃배를 탈까?)
그런 생각이 슬며시 머리를 들고 일어나서 그는 요즘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바다에 나가면 군고구마장사보다는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다. 그것은 생명을 건 대모험이다. 파도와의 싸움. 폭풍과의 싸움. 그리고 조업 중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고들. 그래도 그것은 손에 익은 일이라 위험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군고구마장사는 안전하지만 생계는 고사하고 별이를 대학까지 보낼 수 있는 수입원이 되지 못했다. 그는 친구의 전화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 지옥 같은 바다에 또 돌아간단 말인가?)
그는 인생이 서글퍼서 눈물을 짜며 하모니카로 마음을 달랬다. 구성진 하모니카 소리에, 백사장에서 놀던 여학생들이 고구마통 앞으로 모여들었다. 신청곡도 불었다. 그는 무슨 곡이든지 척척이었다. 연주 실력은 가히 프로급이었다. 여학생들이 하모니카 소리에 감동되어 박수를 짝짝짝 쳐 주었다. 군고구마도 꽤 팔렸다. 군고구마를 사 준 만큼 그들은 실컷 떠들었다. 선생님을 골탕먹인 이야기. 시험 시간에 컨닝한 이야기.
하모니카 덕분에 오늘은 평균 수입을 올렸다. 삼만원 벌었다. 하진 씨가 준 돈까지 합치면 사만원이다. 그는 오늘 번 돈으로 별이의 내의를 한 벌 사 주려고 마음먹었다.
호텔과 모텔들의 그늘 때문에 해변 상가에는 저녁이 일찍 찾아오고 찬바람이 뼈속에 스며들었다. 다섯 시가 넘으면 날이 어두워지니까 다섯 시까지만 장사하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점심을 군고구마로 때워서 뜨끈한 국물이 그리웠다. 시끄럽게 떠들던 여학생들이 떠나고 나서 바다를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딸의 얼굴을 생각하다가, 문득 아내의 체온이 그리워져서 이를 악물고 잊으려 애쓰며 피우다 둔 꽁초담배를 꺼내 피웠다. 담배를 끊으려고 마지막 한 개비 비상용으로 담아 뒀던 담배였다.
8
카페의 음악소리에 섞여 바다의 해조음이 귀시리게 들려왔다. 엄마와 절름발이 아들은 추운 줄도 모르고 찬바람 속에서 아직도 씩씩하게 달리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참 용감한 엄마와 아들이었다. 그들은 일 주일 동안에 할 운동을 한꺼번에 다 하고 있었다. 하진이 백사장에 보이지 않았다. 백사장 끝에서 끝까지 거니는 모양이다. 하마 나타날 때가 됐는데 보이지 않으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었다.
아궁이에 장작불을 밀어넣고 백사장으로 나가 보았다. 도로 옆이 솔밭이고 거기서부터 백사장이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진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식사하려고 어디로 들어갔을까? 호텔로 들어가진 않았다. 호텔 로비가 바로 눈앞에 있어서 그녀가 들어갔다면 그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진이 첫사랑을 닮은 아가씨여서 그녀의 일거일동에 신경이 쓰이고 관심이 가는 게 사실이었다. 허나 하진은 그의 인생과 무관한 타인이었다. 그는 고구마통 앞에서 불을 쪼이며 생각에 잠겼다. 담배꽁초가 다 타서 피울 담배도 없었다. 백사장에 앉아 군고구마를 껍질째 씹고 있던 하진이 생각났다. 혹시 고구마에 체해서 약국에 갔을까? 물을 좀 갖다 줄 걸 그랬다고 후회하면서 약국 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약국은 해수욕장 입구에서도 멀리 떨어진 삼거리 시내버스 정류장 옆에 있었다.
해수욕장 입구에 서서 아가씨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네 시 반이 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떠난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셋방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의 자리로 돌아와서 서서히 치울 준비를 했다. 백사장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경찰차와 오토바이가 달려오고 순경들이 백사장으로 뛰어갔다. 식당 여자들이 나와서 여자가 자살했다고 수근거렸다.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하게 해변을 누볐다. 색등을 켠 구조 헬리콥터는 하진이 누워 있던 백사장 쪽으로 날아갔다. 수근은 백사장으로 달려갔다. 마음속으로 죽은 여자가 하진이 아니기를 기도했다. 헬리콥터는 여자가 익사한 바다 위를 선회하며 공중 수색을 하다가 고무보트를 투하했다. 구조대원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목격자가 가르쳐 준 해상을 수색했다. 한참 후에 익사체가 고무보트 위로 건져 올려졌다. 여자는 갈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구조대원들이 여자를 사장에 눕히고 응급조치를 해도 여자는 살아나지 않았다. 구조대원들은 단념하고 여자를 헬리콥터에 실었다. 헬리콥터는 백사장 위에 착륙해 있다가 여자와 구조대원들을 싣고 모래먼지를 내뿜으며 높이 날아갔다.
백사장에 모여 있던 구경꾼들이 흩어졌다. 구경꾼들 속에 수근도 있었다. 날이 어두워서 여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차림새와 머리 모양으로 봐서 하진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이 불안해서 울적한 심정으로 고구마통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고구마통 아궁이 앞에 여자가 앉아서 장작을 밀어넣으며 불을 쪼이고 있었다. 하진이었다. 그는 반가워서 달려가 그녀를 포옹하고 싶었다.
“자네가 죽은 줄 알고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하진의 축 처진 어깨를 보니 언어들이 입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 옆에는 큰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호텔에서 나온 것이다.
9
하진의 차근한 음성이 바람결을 타고 그의 두 귀로 역력히 들렸다. 하진은 앉아서 아궁이의 불을 쪼이고 수근은 그녀 뒤에 서 있었다. 아직도 떨리는 가슴으로.
“아까 판사 사모님이 미국에서 돌아왔다는 그이 전화를 받았어요. 기적적으로 병세가 호전됐대요. 나 이제 그의 부인이 되기는 글렀지요.”
하진은 타오르는 장작불을 들여다보며 쓰게 웃었다. 수근은 허무한 신파극을 본 기분이었다.
“제가 축하한다고 해 줬지요. 그이는 절 배신한 게 아니었어요. 제가 그이 속을 썩혔죠. 한 달 전에 제가 절교 선언을 했어요. 두 번 다시 강릉에 찾아오면 죽어 버린다고 엄포를 놨어요. 그가 왜 그렇게 변했냐고 묻더군요. 전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그땐 그분의 아내가 회복된 줄 몰랐어요. 그만 죄 짓고 부인의 병치료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 제 부탁이 맞아들었는지 오늘 쾌보가 날아왔군요. 쾌보지요. 저는 멋없게 됐지만 그이 가정에 평화가 찾아와서 잘 됐다고 생각해요. 저는 즐거워요.”
정말 그럴까?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황혼이 짙어 가면서 장작불의 불빛이 어둠을 환히 밝혔다. 그녀의 얼굴은 주황색으로 물들어 더 아름다웠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나오네요. 너무 기뻐서, 그런가 봐요. 너무도 좋아서……”
“왜 굴러들어온 복을 발로 차 버렸어요? 부인이 완쾌했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좋은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더러운 정 때문이었죠. 난 그이가 좋았어요. 정말 사랑했어요.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하진은 손수건을 꺼내어 강물처럼 흐르는 눈물을 막았다.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남자가 그녀를 사랑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 남자가 하진을 버린 게 아니라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고. 정도란 말을 강조했다. 그 말은 판사한테 배운 용어였다.
“그이가 호텔 비용을 온라인으로 결재하겠다고 해서 제가 이미 다 끝냈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 고급 귀걸이, 반지,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는 어쩌죠? 그게 마음에 걸려요. 정말 가지고 가기 싫어요. 언제까지나 그것들이 저를 따라다니며 제 마음을 괴롭힐 것 같아서, 바닷물에 버리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아저씨 생각을 말해 주세요. 아저씨 말에 따를게요. 인생의 선배이니까요. 그리고 귀한 하모니카를 제게 주셨죠.”
수근은 뭐라고 말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생각은 작정된 것 같았다. 그녀는 어둠 속으로 걸어가더니 백사장에 서서 자신이 착용한 장신구들을 하나씩 빼어 바닷물에 던졌다. 수근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어둠과 어둠을 헤젓는 그녀의 힘찬 동작만 보였다. 잠시 후에 그녀는 고구마통 불빛 속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비싼 장신구들이 사라졌다. 참 대단한 용기였다.
수근은 가슴이 떨려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소?”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요. 그이와 만난 뒤로 휴학을 2년 연장했거든요. 그이에게 푹 빠져서 공부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이제 다 정리됐으니 원점으로 돌아가야지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술집에는 들어가지 마시오.”
“저도 알고 있어요. 아저씨같이 좋은 분을 만나 생각을 접을 기회를 가졌어요. 아저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슬퍼서 죽어 버렸을지도 몰라요. 아까 자살한 그 여자처럼. 몇 번 자살할까 망설였으니까요. 그 여자의 죽음을 보고 껍질이라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아저씨의 그 ‘진주 조개잡이’ 멜로디 때문에. 그 멜로디가 제 마음을 접게 했어요. 사랑에 미친 제 마음을. 저는 진주를 잡은 거예요.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진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 그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큰 가방을 집어들었다.
“하모니카 잘 배워서 저도 아저씨처럼 멋있게 연주할게요. 믿어 주세요. 하진이는 곧게 잘 살 거예요.”
하진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총총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해수욕장 입구 쪽이었다. 마차가 한 대 달려오자 그녀는 마차 위에 성큼 올라탔다. 호텔과 모텔들의 휘황한 불빛 속에서 마차는 천천히 달려갔다. 따각따각, 따각따각.
“아저씨, 하진이는 제 본명이에요!”
말발굽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그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다. 마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에 수근은 한동안 멍청히 서 있었다. 꿈을 꾼 것 같았다. 꿈속에서 백설공주를 만났을까? 하진은 깨끗한 공주는 아니지만 충분히 공주가 될 자격이 있는 여자였다. 그는 맘에 안 드는 군고구마장사를 하면서 멋진 아가씨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헤어진 이 순간도 그 영상이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자아, 나도 떠나야지. 군고구마장사여 안녕. 내일은 주문진에 가서 그리운 내 딸 만나고 옷도 사 입혀야겠다. 아가씨가 준 귀한 돈으로 인형도 사 주고, 고생하는 어머니에게도 생선 한 마리……”
하고 중얼거리다가 그는 또 아내 얼굴이 생각나서 컥 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궁이의 장작불이 사위어 가물거렸다. 불 붙은 장작들을 아궁이에서 꺼내어 물을 뿌려 불을 끄고 남은 장작과 함께 고이 놓아두었다. 누군가 필요한 사람 있으면 쓰라고 고구마통 리어카 옆에 단정히 놓아두었다.
그는 이제 군고구마장사는 안할 생각이었다. 고구마를 구울 때마다 첫사랑을 닮은 하진을 생각할 것이고 미운 아내를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군고구마장사는 그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는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뭍의 생활에 매력을 잃었다. 뱃놈은 바다에 살아야 한다. 그는 그 자신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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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우수근(35)……군고구마 장수
박하진(24)……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림
판사
별이(수근의 딸)
엄마와 아이
식당 주인
여학생들
구경꾼들
구조대원들
<감사합니다>
첫댓글 오랫만에 재미있는 단편소설 '진주조개잡이' 잘 읽었습니다. 뱃놈은 바다에 살아야 한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졸작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공무원문인협회 이끄시느라 대단히 수고 많으십니다.
앞으로 열심히 참여하겠습니다.
늘 좋은 날 되세요....
몇년전 거제도의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탐방한 적이 있었습니다. 포로수용소의 면면을 보고 참혹했던 동족상잔의 흔적을 절감하였습니다. 소설 '대통령과 포로'를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역설적입니다만 이승만대통령의 가장 큰 공은 반공포로 석방이라고 봅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저의 졸작 '대통령과 포로'를 읽어 주셨다니 너무 감사하고 영광입니다.
제 나이 황혼길에 왔지만 공무원문학이 있어 더 젊게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