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 10. 24(금요예배) 하나님의 전신갑주 에베소서 6장 10-18절
종말의 시대에 사는 성도는 그야말로 전쟁터에 서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옴에 따라 마귀 사탄의 공세는 상상을 초월하는 궤계와 질병과 미혹으로 성도들을 넘어뜨리려합니다. 분열과 반목을 조장하고, 이혼과 분쟁과 파멸로 이끌어 어김없이 지옥 문턱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저주와 가난과 질병과 분열과 분쟁과 불화와 겁과 두려움과 낙심과 절망으로 인해 파멸로 치닫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합니다. 여기 우리의 씨름이란 우리가 앞으로 생활 터전에서 힘써서 살아내야 할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다운 삶, 성도로서의 신실한 삶을 말합니다. 바로 바울은 그 삶속에서 상대해야 하는 것은 통치자, 권세자, 어둠의 주관자,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산다는 것은 영적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기느냐, 지느냐는 곧 죽느냐, 사느냐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싫든, 좋든 싸우지 않으면 지는 것이고, 진다는 것은 악한 영, 즉 마귀에게 우리의 몸이 우리의 영이 마귀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되고, 어둠과 파멸과 지옥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이 믿음의 용사요, 영적 군사로 이미 보내짐을 받았고, 승리해야할 의무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금 자신이 목숨 걸고 싸워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전쟁터에 서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아무 생각이 없이 전쟁터에 서 있다면 어떤 결과가 주어질까요? 한 마디로 사탄의 밥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악한 자인 사탄을 불화살을 쏘아대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싸울 의지 없이 전쟁터 한 가운데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면 여기저기서 쏘아대는 사탄의 불화살에 맞아 고슴도치처럼 온 몸에 화살이 꽂혀 결국 피 흘리며 죽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예전에는 성도들이 소천하실 때에 대부분은 집에서 자녀들의 돌봄 속에서 소천하시기에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노인요양병원 호스피스실이나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님들의 손길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분들이 많아 마지막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의 모습이 일반 집사님들은 물론이고 안수 받으신 항존직의 집사, 권사, 장로님까지 구원에 확신이 없이 마지막 임종을 맞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목사님까지도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천사들의 마중을 받지 못하고 저승사자의 마중을 받고 고통 중에 가시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은혜도 받았고, 은사도 받았고, 또 헌신하여 하나님의 존귀한 직분도 받았지만 영적인 용사로 살아야 하고, 전쟁을 치러야 하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약자로 살았기 때문에 넘어지고 쓰러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도 항상 깨어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바울 사도도 영적군사가 되라고 한 것입니다. 영적인 군사로, 영적인 강자로 살아야 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 영적강자가 되어야만 성공적이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적 강자가 되어야만 본문 말씀처럼 능히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에, 주님 앞에 설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즈음 성도들은 얼마나 나약한지 모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어떤 난관에도 바로 서서 능히 이길 수 있는 영적 강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영적 강자되시길 축원합니다. 영향력 있고 능력 있게 사시길 축원합니다. 태산 같은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며 악한 영들을 소멸시키며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전에 신앙생활에서 승리하셨던 우리 선진들의 신양은 태산 같았습니다. 매일 두세 시간씩 기도하시고 그것도 모자라 일주일에 한두 번은 방방곡곡 명산을 찾거나 기도원을 찾아 밤새도록 부르짖었습니다. 곳곳에서 하나님의 치료와 임재와 은사들이 풍성히 임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면 빛이 임하여 점집이 문을 닫고, 절이 망하고, 술집들이 보따리를 싸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오히려 술집이 되고, 점집에 눌려 문을 닫고, 종교부지가 절들과 함께 공유하여 나란히 세워지면 그 종교부지는 헐값에 매매해도 매매가 되지 않습니다. 이젠 점치는 점쟁이도 목사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를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영적인 약자로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리치고 저리치어 이놈한테 밀리고, 저놈한테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강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영적 강자가 되기 위해서 진정한 강자가 무엇이며, 누가 진정한 강자인지 알아야 합니다. 누가 강한 자일까요? 누가 힘 있는 자일까요?
먼저 강자는 권력이 있는 자입니다. 옛날 왕이고 사대부의 양반님들처럼 지금에 와서는 정치적인 지위를 누리는 분이 권력자들입니다. 그 다음에는 재벌이겠지요, 성경에 이르는 부자를 말합니다. 또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이나 주먹이 센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이는 힘 혹은 1, 2차원적인 힘이라고 합니다. 근력이 세거나, 주먹이 센 것처럼 한 마디로 무식하게 힘만 센 사람을 1차원적인 힘 있는 사람이라고 하고, 권력자이거나 부자이면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는 백 그라운드가 좋은 사람을 2차원적으로 힘이 좋은 강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권력이 있거나 재벌이거나 주먹대장이라고 해도 행복한 사람을 찾아보기는 참으로 힘이 듭니다. 오히려 세상 것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수렁에 빠지고, 교만해지고, 고독해지기 쉬워 더불어 사는 선한 삶을 살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으로 비유하실 만큼 오히려 불행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지식을 쫓습니다. 진정한 강자는 돈 많고, 권력 있고, 힘이 센 자가 아닌 전문적인 기술과, 아이디어, 정보, 지식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마인드 컨트롤, 앞선 정보력, 강한 의지,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가 앞선 사람이 힘이 있는 시대입니다. 요즈음의 전문적인 지식, 기술, 아이디어가 상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지닙니다. 수억에서 심지어는 수천억 아니 조를 넘어가는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부동산보다 보석보다 더 가치 있고 힘이 있습니다. 대출도 무한정 받을 수 있는 것이 첨단의 지식이요, 기술입니다. 그렇기에 현명한 젊은이들은 정보와 지식에 대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많이 배운 자가, 많이 아는 자가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지식 즉 3차원의 힘을 소유하는 사람이 대다수 성공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존경을 받으며, 신뢰를 얻습니다. 이 지식과 정보에 앞선 사람들이 진정한 힘이 있는 자요, 삶에 있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훨씬 가치 있는 삶을 삽니다. 무식하게 돈 많고, 힘 센 자들의 삶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성공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식과 정보에 앞선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참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어제의 최고가 잠시만 방만하면 정보력에서도 뒤지고, 지식에서도 뒤집니다. 무한히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잠시도 한 눈 팔아선 안 됩니다. 안정과 평안을 누릴 수 없는 것은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성공에 그 만큼 가까이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힘을 소유한 사람이란 진정한 강자란 도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말일까요? 확신의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확신이 역사를 창조합니다. 유럽을 평정한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현대와 삼성을 키운 정주영과 이병철도 바로 확신의 사람입니다. 우리 기독교적으로는 주님의 열두 제자이며, 특히 바울과 베드로가 확신의 삶을 산 사도들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 확신이 얼마나 컸던지 목이 잘려 죽든지, 옥에 갇히든지, 십자가에 거꾸로 메달리든지 그 확신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도 확신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강자는 확신의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확신이 정도에서 벗어나면 무서운 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바로 스탈린이나, 마르크스, 히틀러, 모택동 등처럼 그릇된 확신은 엄청난 사건이 되어 역사를 왜곡되게 하기도 하고 수많은 생명을 빼앗아 가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확신은 세상이 주지 못합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세상의 확신은 잠시잠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확신은 영적인 삶을 사는 자 즉 영적인 확신에 서 있는 자가 진정한 강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자, 영향력 있는 삶을 사는 자는 바로 영적 강자입니다. 그 안에는 생명도 있습니다, 진정한 가치도 있습니다. 참 만족이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그 확신을 그 누구도 흔들 수 없고,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 세상은 변하여도 그 영적인 확신은 변하지 않습니다.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악한 영들은 영적 강자의 밥입니다.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죽으라면 죽어야 합니다. 영적인 강자는 말대로 생각대로 이루어집니다. 죽게도 하고, 살게도 합니다. 부하게도 하고, 가난하게도 합니다. 진정한 강자는 영적 강자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아 너희들은 마귀들이 끓임 없이 간계를 부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저 우연을 가장하지만 너희들은 사실상 전쟁터에서 마귀와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전쟁터에 서 있기에 너희는 갑옷을 입고 제대로 된 전투화를 신고, 방패를 들고, 투구를 쓰고, 검을 들어야 한다. 싸우지 않고, 물리치지 않으면 이길 수 없기에 지는 것이고 지면 죽는다. 지금부터 사생결단이다. 살면 영원히 살고 죽으면 영원히 죽는다. 영적인 강자가 되어야 한다. 영적인 강자라야 다 이기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다. 설수 없다는 것은 이미 낙오되어 지옥형벌을 면할 길이 없다는 말이다. 주님 안에, 하나님 나라에만 참 생명이, 참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하는 영적 강자의 조건은 여섯 가지입니다.
첫째가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여기의 허리띠란 카우보이의 앞치마와 같고, 식당 주방장의 앞치마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허리띠란 진리이신 예수님을 또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앙생활을 하되 한 번 제대로 해볼 것이라고 중심잡고 딱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카우보이가 가죽 허리띠를 매면 오늘 내가 소를 집중해서 제대로 한 번 몰아봐야지 하고 다짐하는 것이고, 식당 주방장이 앞치마를 매면 오늘 다른 일은 다 제쳐두고 음식 한 번 제대로 만들어 보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로 말하면 진리의 허리띠를 띤다는 말의 의미는 기왕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으니 제대로 한 번 믿어보겠다고 딱 중심을 잡고 선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진리로 딱 중심잡고 예수 한 분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설사 예수 믿는 것에 죽음이 가로 막아도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예수 잘 믿으려면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딱 하나만 붙들고 끝까지 싸우는 사람이 늘 이깁니다. 예수만 전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물질 쫓고, 자녀들 챙기고, 체면치레 다 하고 언제 예수 제대로 믿습니까? 주님은 나를 따르려면 겸손히 자기 십자가 매라고 하시잖아요, 그 말씀은 자신을 낮추고 전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 남자와 잘 살 수 있습니까?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다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패가망신합니다. 또 한 여자만을 사랑해야지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다가는 언제 독약에 취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한 여자, 한 남자만을 사랑해야 하듯이 주님을 사랑함에도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잘하려고 하지 말고 싱글 포커스, 즉 오직 한 가지 주님 한 분만 바라보고, 주님께 올인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 올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리의 허리띠를 띠신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싱글 포커스! 오직 예수!
두 번째는 의의 호심경입니다. 진리의 허리띠가 중심이라면 의의 호심경은 우리의 따뜻한 가슴입니다. 여러분 오장육부에 가장 중요한 것이 심장입니다. 심장에서 피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신체의 일부가 썩거나 마비될 것입니다. 그 말은 심장이 모든 곳에 피를 공급하듯이 우리 모든 곳에 주님의 의가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먹든 굶든, 살든 죽든 주님의 의를 앞세워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영이기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 상태를 너무나 잘 압니다. 사탄은 우리의 과거의 죄나 실수를 결코 잊지 않습니다. 늘 생각나게 합니다. 늘 무력하게 합니다. '야! 너 옛날 잊었어? 네 까짖게 뭘 한다고 그래, 너 죄 많이 지었잖아. 너 실수 많이 했잖아, 너 별 볼일 없어. 그냥 조용히 살아. 네 까짖게 무슨 의로우니, 선하니, 봉사니, 헌신이니. 복음증거니 하는 거야, 괜히 나섰다가 무식하니. 더러우니. 형편없니 그런 창피당하지 말고 주제 파악하고 조용히 살아'! 그러다가 '너는 안 돼! 넌 진짜 안 돼! 너 같은 것은 천국도 못 가! 네 주제는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존재야!' 그런 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가 낙망하고, 무너지고 끝내는 자살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에는 예수의 보혈의 피가 흐릅니다. 여러분은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의로워서 의인이 아니고 여러분의 부정한 죄를 예수께서 대신 져주셨기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잘못을 뉘우치면 용서하시고 의인이라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지셨다는데, 하나님이 그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다 용서하셨다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이라고 하시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의롭게 살 수 있도록 믿음도, 능력도 주셨는데 왜 힘 차게 심장을 박동시키지 않습니까?여러분은 이제 우리는 주님의 의로 넉넉히 살아낼 수 있습니다. 능력 있게 힘 차게 생동감 있게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C.S.루이스의 ‘리얼크리스차니티’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주 못생긴 외모 때문에 너무도 힘들던 한 젊은이가 어느 날 가면을 씁니다. 그런데 그 가면을 쓰자 그렇게 멸시하고 무시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고 바라보아줍니다. 그렇게 5년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이 젊은이는 가면을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궁금해 가면을 벗어보고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가면 속의 모습이 가면을 쓰고 살다보니까 그 가면의 잘 생긴 모습으로 변해 있는 것입니다. 이 예화를 들어 저자는 ‘우리가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지만 아직 온전한 의인의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의인인 것처럼 그렇게 믿고, 선한 삶을 살면서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찬양으로 온전히 지내다보면 어느 날 진짜 의로운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의로 사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을 믿고 부족해도 약해도 말씀대로 살다보면 진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영적 강자입니다. 주님의 뜻이 여러분의 모든 삶에 흐르게 하십시오, 어디에서든지 주님만 자랑하십시오. 십자가가 죽음에서 나를 건졌다고,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버려 나를 구원하셨다고,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씼었다고, 예수만이 내 소망이라고, 예수님만이 내 자랑이라고 그렇게 말씀하며 사십시오. 자신의 능력, 자신의 뜻 다 내려놓으시고 예수님만이 내 능력이라고 그렇게 선포하며 사십시오. 가슴에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의인으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평안에 복음이 예비한 신발을 신으라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가 이해하기가 좀 힘이 듭니다. 그래도 잘 귀담아 들어주시면 이해될 줄 믿습니다. 평안은 누가 주십니까?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요14:27) 주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평안하려면 잘 되어야 합니다. 잘 되어야 평안합니다. 축복을 누려야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축복 가운데 제일 큰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원의 은혜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만약 구원을 알지 못하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평안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을 풍성히 누리는 사람이 평안합니다. 그 다음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의 소식입니다. 그러니까 평안의 복음이란 구원을 이루어 주신 주님의 소식으로 준비된 신발을 신으라, 즉 구원의 복음으로 준비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를 구원 주님의 모습과 같이 잘 준비하고 주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발을 신으라는 말의 의미 속에는 단단히 신으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단히 준비하라! [주님의 모습] 그렇다면 주님은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주님의 모습을 알야야 주님처럼 되지요. 이사야53:1-5절입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운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기록되었습니다.
주님과 같이 되려면 주님의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 하는데 성경에서 가장 잘 표현된 말씀이 바로 이사야 53장 말씀입니다. 첫째 ‘누가 전한 것을 믿었느냐’란 말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모습입니다. 다음으로는 연약한 모습입니다. 얼마나 연약한 모습인지 메마른 땅에 새싹처럼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서 정말 볼품없다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것 즉, 그야말로 별 볼일 없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귀하게 여겨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멸시천대 당하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알아주지도 인정해주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의 질고를 대신지시고 우리가 당해야 할 슬픔을 다 감당하시고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사랑이고 주님의 모습이며, 주님은 사랑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 이해가 갑니까?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된 신발을 신었다는 것은 주님처럼 복음을 위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낮은 자리에서, 별 볼일 없는 자리라도 기다리고, 낮추며, 사랑하며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발길이 되어 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단단히 준비된 분이 바로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된 신발을 신으신 성도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진짜 사랑인데 진짜 사랑의 모습으로 잘 준비되라는 것입니다. [기다림] 주님의 사랑 안에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러브 이스 패이션트! 사랑은 기다림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기다리지 않습니다. 맘에 안 들면 교회도 수시로 문 닫고, 맘에 안 드는 성도가 있으면 나가라고 하고 조금만 기다리다가 전도고 뭐고 다 포기하고 기다리지 못해 망하는 교회, 망하는 목사님이 한두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평생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수천 년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이 사랑입니다. 기다릴 줄 아는 분이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발을 신은 분입니다. 신앙을 기다림입니다. 목회도 기다림입니다. [져주는 것] 또 사랑은 져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신이시면서 연약한 인간에게 져주시잖아요. 져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져주는 분이 진짜 주님의 사람입니다. 부부 간에도 져주는 쪽이 더 사랑합니다. 솔로몬의 재판 때 진짜 어머니가 져주잖아요, 솔로몬은 진짜 사랑은 져주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집에서도 지고, 교회에서도 지고, 늘 양보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높여주고 섬겨주는 그 사람이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발을 단단히 신은 사람입니다. 은혜 받으려면 이 복음의 신발에 대한 말씀만으로도 몇 번의 설교를 해야 하고 저는 또 이 자리에 언제 올지도 모르니 이쯤하고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네 번째 믿음의 방패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그야말로 사생결단이요, 전쟁 중에 전쟁이며, 최후에 발악을 하는 사탄의 맹공이 퍼부어지고 있는 사느냐 죽느냐의 순간에 서 있는 것이 현재의 성도의 영적인 삶입니다. 사탄은 영어로 ‘데블’입니다. 참소자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성경은 사탄을 하늘의 악한 영으로 총칭하고 통치자, 어둠의 주관자, 마귀, 귀신, 타락한 천사 등 대적자, 공격자, 참소자 등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불화살을 쏜다고 합니다. 그 말의 의미는 사탄의 공격으로 상처가 나면 그 아픔은 그 맞은 곳의 상처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불이 번지듯 주변으로 번진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의 공격은 작은 부위에서 큰 부위로 확산된다는 의미입니다. 시험이 든 한 사람이 가정을 망하게 합니다. 시험에 든 한 사람이 교회를 흔듭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라고 강조하기 위해 불화살이라고 합니다. 핸드릭슨과 스톨트와 존스 등은 고난, 고뇌, 박해, 기근, 의심, 욕정, 탐욕, 허영, 시기, 참소, 의심, 낙담, 불순종, 배반, 악의 두려움 등과, 또 성경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 또 그리스도를 반대하게 하는 생각, 정욕과 욕망, 뜨거운 흥분, 잘못된 상상력 등을 사탄의 불화살이라고 정의합니다. 여러분 사탄은실제로 쉴 새 없이 불화살을 날립니다.
장예모 감독 이연걸 주연의 영웅이라는 영화에서 무려 십만 명이 화살을 날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십만 명이 화살을 쏘고 난 후에 전경은 그야말로 온 세상이 화살로 덥여 있습니다. 정말 참혹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보다 더한 엄청난 공격을 쉴 새 없이 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자는 누구도 견뎌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런 불화살들을 방어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만이 그 모든 불화살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문제가 옵니까? 믿음의 방패! 그것으로 끝입니다. 믿음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믿음만이 사탄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에는 속성이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숫자가 많은 쪽이 당연히 유리합니다. 어중간하게 지혜로운 사람은 싸움이 일어나면 밤새면서 이길 준비를 합니다. 또 싸우는 방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싸울 일이 생기면 뭉칩니다. 아무리 준비하고 난다 긴다 해도 하나는 여럿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방패도 마찬가지입니다. 방패 하나로는 한 쪽 밖에 못 막습니다. 그런데 네 개면 사방, 여덟 개면 팔방을 막습니다. 그러니 누가 믿음의 방패를 잘 든 사람이냐? 잘 뭉치게 하는 사람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요! 진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인 신실한 성도는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하나가 되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하는 그 사람들이 항상 문제입니다. 그런데 믿음 좋은 분들은 이리 가도 뭉치게 하고 저리 가도 하나 되게 합니다. 성령은 하나가 되게 하고 마귀는 분열시킵니다. 그렇기에 믿음이 좋은 성령의 사람들은 늘 하나가 되게 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합심하여 기도하고 믿음으로 나가는데 무엇이 가로 막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믿음이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습니까? 시험이 올 때 믿음을 내어보이십시오.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가 되십시오. 협력하여 선을 이루십시오.
다섯 번째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여러분 누가 진정한 강자라고 했습니까? 바로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이 강자입니다. 갓난 아이 앞에 두 여자가 있습니다. 아이의 눈빛만 봐도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아는 경험 많고 능력 있는 산파와 바로 앞에 아이를 사생아로 낳은 십 대의 철없는 아기 엄마가 서 있습니다. 누가 아이를 잘 길러 낼까요? 아이를 누구에게 맡겨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은 산파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산파에게는 사랑의 확신이 없습니다. 산파는 그 아이를 목숨처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철없더라도 그 아이만을 믿고 사랑하고 지켜졸 엄마가 맡아야 합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아이를 사랑으로 지키겠다는 엄마, 모르면 배우고, 넘어지면 일어나고, 그 아이를 향한 반드시 지켜낼 수 있다는 확신이 가득 찬 엄마입니다. 그렇게 고귀한 어미의 사랑 앞에 무슨 경험이나 지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사랑의 확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머리로 움직이는데 바로 구원의 확신이 머리입니다. 가장 중요합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그 구원의 확신이 공격당하지 않게 쇠로 된 투구를 쓰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도가 구원의 소망이 흔들리면 봇물처럼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잘 압니다. 구원의 소망이 흔들리는 성도는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탄이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다니다가 절망의 수렁에 빠져 지옥으로 끌려갑니다. 수많은 은사자들과 목회자들이 무너졌습니다. 특히 자신이 무엇인가 잘한다고, 쓸만하다고 착각하는 순간 틈이 생기고 그 틈을 사탄은 귀신이니 귀신처럼 파고듭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사탄이 구원의 소망을 흔들어대는 순간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멍청이가 됩니다. 우리가 심한 욕을 할 때 골빈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이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보다도,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보다도 더 불쌍한 사람이 머리가 온전치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치매를 저주받은 병이라고 합니다. 구원의 소망을 잃어버리면 치매환자와 같습니다. 아니 더 불쌍한 존재가 됩니다. 여러분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요? 모세도 자기가 가장 의로운 선택을 했다고, 자신은 왕도 될 수 있었음에도 노예인 자신의 백성을 선택한다고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잘난 채하다가 넘어져 사십 년을 광야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고도 그렇게 훈련을 받고도 므리바 반석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내가 물을 내랴?”하고 자신이 하는 것처럼 화를 내다가 끝내 가나안 땅에 함께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겸손한 모세가 겸손하지 못해 넘어집니다. 다윗의 장점이 무엇입니까? 신실함입니다. 언제나 한결 같은 믿음, 빈들에서나 사막에서나 궁궐에서도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실한 다윗도 한가로이 자신의 구원의 소망이 흔들릴 때 사탄은 어김없이 공격합니다. 하나님을 잠시 잃어버리고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사탄의 궤계에 빠져 목욕하는 밧세바에게 미혹되어 음행을 저지르고 기어이 살인을 합니다. 신실함이 자랑이던 다윗도 신실하지 못해 넘어집니다. 용기, 담대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베드로가 주님이 로마병정에 붙들리시자 소망이 흔들려 한낮 계집종 앞에서도 주님의 배신합니다. 담대함을 자랑하던 베드로가 비겁하게 넘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향한 소망, 주님에 대한 확신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 누구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잠시만 딴 곳을 바라보고, 잠시만 딴 생각을 해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구원의 소망을 잠시도 놓지 마시고 단단히 붙드십시오. 그렇기에 구원의 소망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고 항상 깨어 기도하는 성도가 구원의 투구를 쓴 성도입니다.
여섯 번째 마지막은 성령의 검, 말씀의 검입니다. 검이 없다면 어찌될까요? 아무리 갑옷을 잘 입고 방패를 잘 들었어도 검이 없으면 언제인가는 지쳐 땅에 쓰러질 것입니다.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결국 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검, 말씀의 검이 없으면 결국 패할 수박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검이나 말씀의 검이나 같은 말입니다. 말씀이 있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분이 성령의 검, 말씀의 검을 소유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검술은 연마해야 합니다. 즉 매일 훈련하지 않으면 결국 전쟁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매일매일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옛날에 말씀을 많이 가까이하시고 은혜 받았다고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말씀이라는 원어에는 현재진행형의 시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사용하고 말씀을 현재에 은혜누리지 못하면 전쟁에 녹슨 칼을 들고 나가는 것과 똑 같습니다. 녹슨 칼로는 적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사탄의 칼은 그 어떤 칼보다 날카롭습니다. 오히려 적에 칼에 맞아 죽을 위험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성별된 삶을 살아가려면 구별되어야 하는데 말씀이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까지 쪼개어 성별된 삶을 살게 합니다. 말씀이 들려 있지 않는 삶은 분별이 없는 삶입니다. 분별을 잘 하지 못하면 적도 아군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좋은 일, 나쁜 일도 잘 구분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항상 혼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검, 말씀의 검을 들고 강력한 용사로 사시기 바랍니다.
제가 영적인 강자로 사실 수 있는 여섯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어렵다고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여섯 가지 밖에 안 됩니다 영적 군사로 서는 것이 이기는 길이고, 능력 있는 길이고, 영적 강자로 살아가는 길이고 축복된 삶을 사는 길이고, 구원의 참 소망을 누리는 길인데, 당연히 걸어가야 할 삶인데 무엇이 힘이 들다는 말입니까? 밥 먹기 싫다고 밥 안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진정한 강자가 얼마나 복된 삶을 사시는 줄 아십니까? 세상에서 맘껏 누리며 사는 것은 물론이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구원 또한 풍성히 누립니다.
이제 방법을 배웠으니 영적 강자로 사십시오. 승리하면서 사십시오. 비참한 질고를 더 이상 지지 마십시오. 영적 군사, 영적 강자로 우뚝 서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밝은빛교회 유지명 목사
|